319화. 불꽃
로벨 일행은 한때 성문이었던 곳을 지나 과거 안뜰이었을 공터로 들어갔다.
허풍쟁이는 암살-혹은 암습-을 너무 대놓고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 외곽으로 돌아가자 제안했다. 하지만 괜한 기우였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없었다.
성 안쪽은 노랗게 말라버린 잡초와 깨진 파편이 전부였다. 과거의 영광은 부서진 돌조각뿐이니, 성보다 성터란 표현이 적당했다.
“어어? 잘못 찾아왔나?”
로벨은 어깨높이까지 올린 아론다이트를 슬그머니 내렸다.
“이런 곳에 이런 성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백작 놈이 사기 친 거 아닙니까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로벨 일행은 어색한 표정과 난감한 몸짓으로 안뜰을 가로질렀다. 확실히 사기는 아니었다. 서른 명 정도 모여서 파티하기 좋은 안뜰을 지나 아성 앞에 도착했을 때 확실히 깨달았다.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괴물이 있었다.
드드드득... 드득득...
어디선가 숫돌 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놓지 않은 로벨 일행은 즉시 무기를 추어올렸다. 전후좌우 어디에서 튀어나와도 혼쭐을 내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적이 등장한 곳은 머리 위였다.
“...저게 뭐야!”
성문 위에 악마 조각상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백 년의 풍파로 깨지고 금이 간 표피가 허물처럼 벗겨지고 반들반들한 새 피부가 드러났다. 오른쪽 날개가 위로 올라가고, 왼쪽 날개가 따라 올라가고, 기다란 목이 꼿꼿이 서더니, 주둥이가 두 뼘 크기로 벌어졌다.
“카아아아아-ㄱ-!”
기가 약한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귀를 틀어막고 뒷걸음쳤다.
“가, 가고일이 움직이잖아?”
“우아악! 신부님 말이 사실이었어! 악마다!”
가고일은 옛 신의 교회 앞에 흔히 세워져 있는 조각상이었다.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교회를 지키는 부적으로 여겨졌다. 장난기 많은 사제들은 말 안 듣는 어린 수사와 신자를 겁주는데 활용했다. ‘미사시간에 자꾸 졸면 가고일이 밤에 찾아간다?’ 그 사제도 진짜 찾아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황하지마! 마법이야!”
로벨이 아론다이트를 쭉 내밀었다. 가고일은 새하얀 칼날을 보고 길길이 날뛰었다. 몸에서 떨어진 돌조각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뭐, 뭐가 다행입니까요!”
로벨은 가고일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며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잖아?”
가고일은 날개를 휘젓다가 벼락처럼 쏘아졌다. 비유나 묘사가 아니라 진짜 돌덩이였다. 어설프게 막아서는 몸이 성치 못했다. 로벨은 몸을 뒤로 눕히며 아론다이트를 세로로 휘둘렀다.
까가가강-!
쇠와 돌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칼날이 가고일의 몸을 길게 베며 불똥을 뿌렸다.
“큭!”
깊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로벨은 등이 땅에 닿자 그대로 한 바퀴 굴러 일어났다. 인체공학적인 필드 아머라 가능한 곡예였다.
“카학! 카하악!”
가고일은 하늘로 날아올라 분통을 터트렸다. 칼날이 스친 자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끌어올려 그대로 쏘았다. 울프 용병단 최고의 명사수답게 겨냥과 격발이 동시였다. 가고일은 회피 비슷한 동작도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았다. 깡-!
“젠장! 피할 필요가 없잖아?”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가고일은 조각상이었다. 그것도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칼날도, 화살도 통하지 않았다.
“그럼 때려 부수자! 메이스!”
과묵한 몬트가 허리에 찬 철퇴를 던져주었다. 한 팔 길이의 나무자루에 사과 같은 쇳덩이가 달려있었다. 로벨은 빙글빙글 돌려서 무게와 길이를 익힌 후 자세를 잡았다. 주 무기가 양손검이라 해도 창(槍), 곤(棍), 도(刀), 편(鞭), 순(盾)을 모두 다룰 줄 알았다. 활처럼 아예 궤를 달리하는 무기면 모를까, 손에 쥐고 휘두르는 거면 요령으로 충분했다.
가고일이 재차 달려들 때 몸을 비틀어 피하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팔심과 허릿심과 가고일의 속력이 완벽히 맞아 떨어진 그림 같은 카운터였다.
퍼걱-!
가고일의 머리가 터지고, 메이스의 모가지가 부러지고, 로벨의 몸뚱이도 나가떨어졌다.
“으으으-!”
메이스가 부러져서 다행이었다. 충격을 그대로 받았으면 가고일만큼은 아니어도 성치 못했을 것이다.
“기사님! 기사님!”
허풍쟁이 뒤에 숨어있던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라 뛰어왔다. 로벨은 자루만 남은 메이스로 제지했다.
“오지 마. 위험해.”
그리고 좀 허전한지 자루를 흔들었다.
“어? 부러졌네?”
로벨은 과묵한 몬트를 슬쩍 보았다. 세상 사람이 다 자기 같은 줄 알아서 애병을 부러트렸다고 화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과묵한 몬트는 애당초 비싼 무기를 취급하지 않았으며, 소모품에 애착도 없었다. 그래서 부러진 무기보다 안마당에 처박힌 가고일에게 집중했다.
“카하학- 하아악- 악-!”
가고일은 돌팔매 당한 물새처럼 푸드득- 거렸다. 몸짓만 보면 처량한데, 얼굴이 박살난 440파운드 몸뚱이를 생각하면 무시무시했다.
“지가 살아있는 생물인 줄 아네.”
울프 용병단은 표정으로 의사를 타진한 후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든 끝맺음이 확실해야 좋았다.
퍽-! 퍽퍽! 까강-!
@
로벨은 시큰거리는 팔뚝을 주무르며 아성의 사다리를 올랐다. 지상에서 대여섯 단 밖에 안 되는 짧은 사다리지만, 성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폭우, 폭설이 올 때를 생각하면 효과적인 저지 수단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은데...”
로벨은 썩어서 문드러진 나무문짝을 넘어 메인 홀을 바라보았다. 기둥이 너무 촘촘해서 숲에 들어온 것 같았다. 300년 전 볼탄 반도의 건축기술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기사님, 저쪽에 계단이요.”
먼지 쌓인 돌 마루 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괴물은 보통 지하에 있지?”
“왕은 높은 곳에 있잖아요?”
‘죽은 자’는 지하실 느낌인데, ‘왕’은 꼭대기 느낌이다. 로벨은 갈등하다가 2층을 택했다.
“여차하면 도망치기 좋은 곳은 2층이니까.”
목숨이 소중한 줄 아는 용병들은 군말 없이 동의했다.
끼이이이-익-
2층으로 가는 것도 험난했다. 돌바닥과 달리 나무로 만들었는데, 세월 앞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비바람을 피해서 그나마 형상을 유지할 뿐이었다. 마녀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한 사람씩 올라가요. 제발요.”
용감한 로벨이 앞장서서 올라갔다. 로벨의 몸은 용병에 비해 가벼운 편이지만, 두 자루 칼과 육중한 판금갑옷 탓에 만만치 않았다. 나무판자가 비명을 질렀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날 때는 천하의 로벨도 멈칫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조, 좋아! 별거 아니네. 이제 한 명씩 올라와.”
로벨은 2층에 무사히 올라서서 허세를 부렸다. 진지하고 구체적인 허세였다.
“한 명씩. 한 명씩 말이야. 흉내쟁이, 넌 마지막에 올라와.”
옛 신이 가호하는 로벨 일행은 사고 없이 2층에 올라왔다. 네 발로 기어서 올라온 흉내쟁이 퍼시발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안도했다.
“정말, 정말 굉장한 모험 났습니다요.”
“이 정도면 할 만하지. 난 애초에...”
허풍쟁이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재빨리 꺾었다. 마법사 앞에서는 말이 씨가 되고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대로 가자. 이대로. 그게 제일이야.”
로벨은 아론다이트 대신 길이가 짧은 흐룬팅을 뽑았다. 슬슬 끝을 보고 싶었다.
1층 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를 빙 돌아 누가 봐도 성 주인이 머물 것 같은 방을 찾았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장전해 문틈으로 조용히 밀어 넣었다. 숨죽인 시선이 오가고, 암묵적인 동의하에 발가락이 벌컥 열어젖혔다.
“꼼짝 마!”
외딴 성에서 외롭게 살아온 괴물치고 말을 잘 들었다.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기뻐하지 않았다.
“뭐야, 시체야?”
손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침대 위에 앙상한 해골이 누워있었다. 아니, 해골이 아니라 미라였다. 장기는 거의 녹아내렸지만, 살가죽이 그대로 남아 뼈와 살에 붙어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악취도 나지 않았다.
“저게... 죽은 자의 왕이야?”
머리에는 냄비 받침만한 왕관이 씌워져 있고, 목에는 금과 은으로 된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려있으며, 손가락에는 빨갛고 파란 보석반지가 두세 개씩 끼워져 있었다. 누가 봐도 왕의 모습이었다.
“그냥 죽은 왕이잖아?”
“어... 진짜 죽었어? 찔러볼까?”
“가까이 가기 싫은데... 애꾸눈, 한 발 쏴봐.”
옛 신의 사제가 보면 화를 내겠지만, 사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기사와 용병은 쏘라고 재촉했다. 애꾸눈은 찝찝함을 삼키고 방아쇠를 당겼다. 팡-! 오랫동안 참고 참은 쿼럴이 300년 묵은 공기를 가르고 왕의 옆구리에 꽂혔다. 풀썩- 소리가 나면서 먼지와 가루가 날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죽었네.”
“죽었어.”
“죽었잖아?”
로벨 일행은 병장기를 치우고 미소지었다. 엉뚱하고 싱겁지만 목숨을 거는 것보다 나았다.
“그 백작 놈이 잔뜩 겁을 줘 가지고...”
“걔도 쥐뿔도 모르나 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지가 와서 처리했을 걸?”
깊이 생각하면 이상하게 여겼을 테지만, 긴장이 풀린 탓에 그저 희희낙락했다.
욕심 많은 허풍쟁이는 돈 될 만한 것을 찾아 방을 기웃거렸고, 욕심이 더 많은 흉내쟁이는 죽은 자의 왕 손가락에 걸린 보석에 눈독 들였다. 겁도 없이 미라 손가락에 달라붙은 반지를 빼기 위해 용을 썼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주인이 퀭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했다.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마녀 키르케였다.
“앗! 살아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주어를 빠트렸다. 시선이 마녀에게 모였다가 마녀가 보는 쪽으로 향했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흉내쟁이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 대신 머리를 찍어누르는 통증을 느꼈다.
“으, 으으, 으아아! 으아앗!”
흉내쟁이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눈물콧물 짜며 비명 질렀다. 로벨이 다급히 소리쳤다.
“빠져나와! 당장!”
“아, 안... 끄아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죽밖에 없는 앙상한 손인데 이상하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곧게 세워서 달려들었다. 과묵한 몬트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바닥이 움푹 꺼지도록 박차고, 죽은 자의 왕, 와이트의 팔뚝을 짚단처럼 매끄럽게 베었다. 흉내쟁이는 잘려나간 팔을 쳐내고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쳤다.
“이 괴물!”
로벨은 흐룬팅을 끌어당겨 죽은 자의 왕을 찔렀다.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검은 거리낌 없이 괴물의 몸을 갈랐다. 그러나 상대는 마도의 수호자였다. 칼질 한 번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아아아아... 아아...”
죽은 자의 왕이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었다. 폐가 없으니 소리가 나올 리 만무한데, ‘소리’가 나왔다. 로벨은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에 흐룬팅을 놓고 뒷걸음쳤다.
“끼야아-!”
로벨이 비명을 지르자 마녀 키르케가 마법으로 응수했다.
“폭군의 분노! 벤시의 노래! 갓난아기의 울음! 가장 무서운 꿈도 아침 햇살에 녹아내리는 법!”
죽은 자의 왕이 공허한 눈구멍으로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어리고 어리석은 마녀야. 현세에 물든 네 마법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마녀 키르케도 동의했다. 마녀의 마법으로는 ‘마법’의 그 자체인 마도의 수호자를 쓰러트릴 수 없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현세에는 현세에 무기가 있는 법이다. 마녀 키르케는 꼬뜨를 걷고 허벅지에 묶어둔 무기를 꺼냈다. 수컷의 본능은 어쩔 수 없어서 용병의 시선이 허벅지에 집중되었다. 심지어 고통에 신음하는 흉내쟁이조차 숨을 멎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마녀의 빈약한 다리보다 우람한 쇳덩이가 더 큰 존재감을 뿜었다. 과묵한 몬트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아쿼버스?”
류트 공자가 본의 아니게 선물한 최신형 무기였다. 마녀 키르케는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흥얼거렸다.
“태양의 노래! 용암의 춤! 용의 잠꼬대! 살라만다의 한숨!”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