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8화 (318/605)

318화. 와이트

호른 경은 워 해머를 옆으로 돌려 뾰족한 가시를 앞으로 오게 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한 박자 반 타이밍을 재어 냅다 휘둘렀다. 여장 위로 기어 올라온 오크는 기뻐할 겨를 없이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꾸웨엑-!”

오크 비명은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인간의 비명보다는 나았다. 오크가 성벽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자루를 비틀어 무기를 회수했다.

“후욱... 후욱...”

헬름이 숨통을 쪼여왔다.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다. 바이저를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명, 욕설, 고함, 애원, 호통... 시선이 닿는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었다. 오크들이 기어이 성벽 위로 올라와 난전을 벌였다. 심지어 진짜 위험한 곳은 성벽이 아니었다.

쾅-!

덩굴성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호른 경은 두 눈을 질근 감았다. 보고가 올라오기 전에 상황을 짐작했다.

“성문이 뚫렸다! 성문이 뚫렸다!”

여드레 동안 열여섯 대의 충차가 공격해왔다. 기름과 화약이 바닥나자 바위와 통나무로 막아왔다. 그럼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오크들은 시체의 산을 넘어 기어이 성문을 부수었다.

호른 경은 바이저를 내리고 워 해머로 성 안쪽을 가리켰다.

“아성으로! 아성으로 가라! 서둘러라!”

“우아아악! 사람 살려!”

호른 경은 워 해머를 어깨 뒤로 당겨 집어던졌다. 겁쟁이 데비 위에 올라타 악착같이 꼬챙이로 찌르려던 오크 머리통을 정확히 날렸다.

“후, 후하-! 뒤질 뻔했네!”

힘 싸움에서 밀려 거의 죽을 뻔한 겁쟁이는 장탄식을 뱉으며 뻗었다. 호른 경은 편히 쉬게 두지 않았다.

“일어나라! 아성으로 이동한다! 부하들을 챙겨서 먼저 가!”

호른 경은 피에 젖어 축 처진 에디즈 가문 깃발을 무쇠발로 부러트린 후 휘둘렀다.

“아성으로 이동한다! 외팔이! 싸움개! 후퇴해라!”

안뜰에서 바리게이트에 의지해 저항하던 풋맨 소대와 맨앳암즈 소대가 깃발을 따라 물러났다. 모두가 무사하지는 못했다. 자리가 안 좋은 병사들은 몸을 빼내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울프 용병단의 우수한 무기와 단단한 갑옷도 수백 마리 오크의 질량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호른 경은 깃발창을 자벨린처럼 집어 던져 오크 하나를 처리한 후 아성을 향해 뛰었다.

“호른 나으리! 빨리 오쇼! 빨리 좀!”

외팔이 일당이 아성 안에서 소리쳤다. 시뻘건 머리와 수염을 하고 도끼날로 재촉하는 것이 어째 오크보다 위험해 보였다.

‘저런 것을 부하라고 부리시다니...’

호른 경은 피식- 웃고 몸을 던졌다.

강철 몸뚱이가 성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크로스보우 소대가 마지막 남은 쿼럴을 쏟아부었다. 오크 무리가 와르르- 쓰러지고, 그 틈에 최후의 보루가 문을 닫았다.

@

로벨 일행은 바위산을 넘어갔다.

평지를 달리기는 덧없이 좋은 말(馬)이지만,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넘는 데는 숫제 짐짝이었다. 기사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용병은 구슬땀을 흘리며 수레를 밀었다.

“그래도 종자 나으리가 있어서 다행이오.”

“히히힛! 우리 기사님이 보기보다 똑똑하다니까요?”

“...왠지 불쾌한 칭찬이야.”

로벨이 켈트 가문의 골칫거리를 데려온 이유는 명확했다. 말을 탈 줄 알기 때문이다.

로벨은 죽은 자의 왕 위치를 알아낸 후 조나 켈트를 전령으로 보냈다. 주인(Master)의 심부름을 받는 것이 종자의 역할이라 몹시 기뻐했다. 로벨의 기사 종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말 한 필이 아쉬운 마당에 잘 됐지.”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었다. 덩굴성에서 구원요청이 온 지 닷새가 지났다. 호른 경과 외팔이 일당이 아무리 유능해도 한계가 왔을 것이다.

‘조금만 버텨줘. 금방 도우러 갈 테니까...’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진 바위산을 한참 걷자 마침내 도반 도트넘 백작이 말한 ‘죽은 자의 성’이 나타났다.

로벨은 모닝스타 안장에 기대서서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토해냈다. 볼탄 반도 토박이로 오만 곳을 싸돌아다닌 허풍쟁이도 이곳은 처음인지 탄성을 질렀다.

“이런 외진 곳에 성이 있습니다요?”

“오래전에 버려진 곳 같은데...”

샘 포클 시대 이전에 지어진 고성으로 성벽이 얇고 성탑이 직사각형이었다. 그나마도 비와 바람에 깎여나가 7피트 이상은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옛날에 이만한 성을 지었으면 대단한 귀족이었을 텐데...”

“이 지역의 왕이었겠지. 그때는 너도나도 왕이라 자칭했으니까.”

마녀 키르케는 ‘왕’이란 단어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늑대의 왕 리카온도 본래는 시크론 섬의 왕이었다. 그렇다면 죽은 자의 왕도 한때 왕이었을 것이다. 왕과 죽음, 괴물과 마법...

“아앗! 알았다! 알았어요! 와이트(Wight)에요!”

“응? 별로 하얘(White) 보이지 않는데?”

허풍쟁이가 따지자 마녀 키르케가 한심하게 보았다.

“화이트 말고 와이트라구요! 가만, 죽은 자의 왕이 아니라 죽은 왕이잖아?”

와이트. 구울하고 비슷하지만, 살아생전 왕이었던 만큼 한층 고차원적이었다. 고서에 따르면 흉측한 해골 현상에 온갖 귀금속을 두르고 오래된 성에서 성주 역할을 하였다. 발가락 슈미츠 등은 귀금속이란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

“이 성이 옛날에 왕성이었구나.”

지금 보면 늑대성보다 조금 작은데, 수백 년 전의 건축기술을 생각하면 엄청난 부와 권력의 과시였을 것이다.

“조심해야 해요. 와이트는 아주 강력한 괴물이에요. 왕을 지키는 괴물도 있을 테고요.”

귀금속으로 달아오른 욕망이 괴물이란 단어에 차게 식었다.

“어, 어쩔 수 없네요. 그 꼬맹이 종자 나으리가 부대를 끌고 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그게 좋겠습니다. 늑대의 왕과 비슷한 괴물이라면 우리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로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지원군은 안 와.”

“예?”

로벨을 따라온 11개의 눈동자가 집중되었다. 괜히 죄진 기분이 들었다.

“조나인지 존나인지 종자 나으리가 펄프 대장을 부르러 간 거 아닙니까요?”

“지원군은 덩굴성으로 갈 거야.”

“아니! 그럴 거면 진즉에 보내시지...?”

“시간을 맞춰야 하니까. 본대까지 고립시킬 수 없잖아.”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쓱쓱 만지며 확인했다.

“처음부터 사자(死者)의 왕은 영주님 혼자 처리할 생각이셨습니까?”

“혼자가 아니야. 너희가 있잖아.”

코밑을 쓱쓱 문지르며 쑥스러움으로 전우애를 표현하면 참 아름답겠지만, 평균 연령 32살의 닳고 닳은 용병 일당은 코가 아니라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아아! 내 이랄 줄 알았다! 기사 나리를 따라오면 항상 이렇지!”

“기마병, 저격수, 마부와 마녀... 애초에 암살을 염두에 둔 구성원이었군요.”

로벨은 암살이란 단어에 발끈했다.

“암살이 아니야! 그냥, 좀, 조용하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거야!”

“...그게 암살 아닙니까?”

로벨은 끝까지 암살이란 단어를 부정했다.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 힘없는 용병들이 이해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고성으로 향했다. 고용주가 멋대로 앞장서니 고용인은 별수 없이 따라갔다. 로벨이 잘못되면 밀린 급료와 수당은 둘째 치고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의 원망에 목숨을 부지하기 힘드니 어떻게든 보호해야 했다.

“으으...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기껏해야 구울이나 고블린이겠지. 겁먹지 마.”

로벨 일행은 기둥만 남은 석벽에 말들을 묶어두고 눈빛을 교환했다. 거의 동시에 병장기를 뽑았다.

“가자.”

괴물을 잡기 위해 미궁으로 향하는 영웅의 이야기는 고대 신화부터 어린이 동화까지 식상할 만큼 흔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접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첫째는 그런 괴물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런 곳에 들어가서 살아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

아성(Keep)은 영주의 집이자 영지민의 대피소이며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는 방어시설이었다. 이곳까지 밀리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성문을 막아! 빨리!”

“그쪽 테이블 가져와! 의자도!”

아성에 숨은 호른 경, 에디즈 경, 그리고 울프 용병단과 영지민은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다. 성 안의 가구를 닥치는 대로 모아 성문을 틀어막고 무기를 준비했다.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들썩였다. 힘 좋은 오크가 망치질을 하는지 뒤죽박죽 쌓은 자재가 들썩였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어린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와라! 와라! 최소한 세 놈은 데려가 주마!”

외팔이가 어금니로 바클러 끈을 쪼이며 으르렁거렸다. 싸움개는 플레일과 숏소드를 좌우로 늘어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결국 기사 나리는 안 오시나?”

“설마 당한 것은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호른 경이 헬름을 벗어 머리를 쓸어 넘긴 후 용병처럼 말했다.

“기사 나으리는 무적무패다. 지금 꼬라지가 이렇지만, 우리 복수를 해줄 거다.”

울프 용병단은 긴장과 공포로 덜덜 떨면서도 씨익- 웃었다. 겁쟁이 데비가 대거로 자세 잡고 중얼거렸다.

“뭐, 진즉에 죽어나자빠졌을 싸구려 용병을 이만큼 먹고 살게 해줬으니 원망은 없어.”

쿵! 쿵! 쿵-! 콰직-!

성문에 금이 갔다.

외팔이가 괴성을 지르며 손도끼를 치켜들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오크 대가리를 시원하게 쪼개줄 기세였다. 그런데 조용했다. 침방울을 튀기며 소리 지른 것이 머쓱해졌다.

“...왜 안 들어와?”

마지막 성문이 망가졌다. 각종 집기로 바리게이트를 쌓았지만, 발길질 몇 번이면 뚫릴 수준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조심성 많은 오크라도 신이 나서 밀고 들어와야 정상이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오침이라도 하나?”

피리 부는 쟝이 “나, 나가 볼까요?” 하고 속삭였다. 호른 경조차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뒤집어놓은 테이블이 끼리릭- 끼릭- 소리를 내며 옆으로 움직였다. 용병들은 화색이 되어 다시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럼 그렇지! 진짜 온다!” 긴장이 한번 풀린 탓에 미소가 감돌았다. 유쾌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리게이트를 걷어내고 굵은 팔뚝이 등장했다.

“나원참, 이걸 방벽이라고 쌓... 우아앗!”

“으랴차! 죽어랏, 괴물새끼... 갓니잖아!”

보편적인 심미관으로 볼 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오크로 착각할 만큼 괴상한 얼굴도 아니었다. 거칠게 날아들던 도끼와 몽둥이가 화급히 방향을 틀었다. 성 밖에서 찾아온 불청객도 깜짝 놀라 엎드렸다. 의자 다리가 방패가 되어 아슬아슬하게 참사를 피했다.

“이 자식들아! 누구를 보내려고!”

짧게는 3년, 길게는 17년 동안 보아온 정겨운 얼굴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도끼를 치우고 소리쳤다.

“펄프 대장!”

울프 용병단의 최고참 최고령 멤버이자 실질적인 지휘관인 펄프 대장이었다.

“와씨! 심장 떨어질 뻔했네. 임마! 이것들 좀 치워!”

“어, 어떻게... 오크들을 어쩌고...?”

호른 경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기사도 긴장이 풀리면 다리 힘이 빠지는 모양이다. 펄프 대장은 바지를 탁탁 털고 뒤를 가리켰다.

“영주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나으리가 무사한 걸 보니 늦지 않았군요.”

“오크들은?”

“우리가 올 때쯤 꽁지 빠져라 도망치고 있더군요.”

“도망? 왜? 알아듣게 설명해라!”

펄프 대장을 따라온 울프 용병단이 바리게이트를 치우며 성 안으로 들어왔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지원군인데, 이렇게 등장하니 기쁘기보다 떨떠름했다. 펄프 대장은 콧등을 긁적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영주님께서, 우리 무적무패 기사 나리께서 뭔가 저지른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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