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7화 (317/605)

317화. 인간

덩굴성의 희망과 달리,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투에 지친 울프 용병단과 바위산 사냥꾼은 그대로 두고 직속 랜스 3인방과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마녀 키르케, 그리고 떼쓰면서 따라붙은 조나 켈트까지 7명만 거느렸다.

로벨 포함 전원이 말과 마차에 탑승하여 이동속도가 매우 빨랐다. 하지만 편안한 여정은 아니었다. 로벨은 하루하고 한나절을 휴식 없이 트롯과 캔터 속도로 이동했다. 식사시간조차 챙기지 않는 굉장한 강행군이었다.

사람이나 말이나 지칠 때로 지쳐서 구데타, 배신, 하극상 따위의 단어를 생각할 때, 로벨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서 쉬자.”

“오오! 옛 신이시여!”

허풍쟁이가 성호를 긋고 탄식했다.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들 때도 안 하던 짓을 하는 것 보면 진짜 하극상도 각오한 모양이다.

로벨 일행은 굽이치는 개울가에 자리한 농장으로 다가갔다. 농촌이라 하기는 규모가 작고, 농가라 하기는 집과 창고가 많았다.

“이 정도 농장이면 기사의 사유지일 거야.”

로벨은 용병들에게 눈짓했다.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의미였다. 칼밥을 오래 먹은 용병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하지만 한 사람을 간과했으니, 칼밥도 눈치밥도 못 챙겨먹은 전직 기사 종자였다.

“이리 오너라! 귀한 분께서 오셨다! 머리를 조아리고 냉큼 맞이하라!”

그리고는 ‘나 잘했죠?’ 얼굴로 로벨을 보았다. 어쩐지 익숙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사고를 치고 애교 부리는 것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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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과 달리 기사는 없었다. 기사의 대리인이자 농장의 관리인이 헐레벌떡 뛰쳐나와 눈치를 살폈다. 그 뒤에 농기구로 무장한 장정이 여럿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살인과 폭력이 일상인 볼탄 반도에서 저 정도 반응은 예사였다.

농장 관리인은 부티 나는 모닝스타와 고급스러운 필드 아머를 보고 ‘귀한 분’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정중히 맞이했다. 예의 바른 관리인이라 말고삐를 잡다가 정수리가 물린 것 말고는 아무 말썽도 없었다.

로벨은 우물에서 막 길어낸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농장 관리인을 칭찬했다.

“교육을 잘 받았구나. 네 주인이 누구지?”

농장 관리인은 빈 잔을 공손히 받으며 눈치를 살폈다. 가문과 가문에는 은원이 많아 재수 없으며 칼부림이 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속이거나 숨길 수도 없었다. 옛 신의 가호를 바라며 솔직히 고했다.

“모몬트 가문의 조이 모몬트 경입니다.”

“조이 경?”

로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농장 사람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다 들리게 속삭였다.

“하인즈 자작의 기사 나리 아니었소?”

“아, 기억났다. 우리 기사 나리한테 쥐어터진 양반이지.”

원한 관계라면 원한 관계인데, 이쪽은 당한 것이 없어 보복하기가 어색했다.

“그냥... 음... 먹을 것과 쉴 곳을 준비해줘. 대가를 지불할게. 그리고 조이 모몬트 경에게는 머를 브릭 자작이 다녀갔다고 해.”

“...그 나으리는 무슨 죄가 있어서 맨날 팔려가지.”

허풍쟁이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척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뾰족한 쇠와 반짝이는 금이 최고인데, 로벨은 둘 다 가지고 있으니 지극한 환대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농장 관리인은 돼지도 잡고 닭도 잡아서 푸짐한 상을 내왔으며, 잠자리의 짚을 새로 깔아주었다. 심지어 말들한테도 귀한 콩과 귀리를 푹 삶아 내주었다. 강행군에 지친 로벨 일행은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흡족해했다. 하지만 만족감 뒤에 걱정도 숨어 있었다.

“그런데 기사 나으리, 덩굴성을 구하러 안 가도 됩니까요?”

“갈 거야.”

로벨이 즉답하자 맥주를 홀짝이는 용병들 사이에서 복잡한 눈빛을 오갔다. 애꾸눈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 인원으로 지원하는 겁니까?”

“응? 아니야. 아니야.”

로벨은 용병들이 오해하는 것을 깨닫고 제대로 설명했다.

“이번 일은 덩굴성 하나의 문제가 아니야.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성들도 공격받고 있잖아.”

“그렇다면 더욱 빨리...”

“지금 당장 군대를 모아 소탕해도 괴물은 계속 나올 거야.”

로벨은 맥주잔을 비우고 구석으로 치웠다. 발효할 때 호밀을 넣었는지 입안이 텁텁했다. 구수하고 쌉싸름한 리암 수사표 맥주가 그리웠다.

“그들을 모두 구할 방법은 하나야. 원흉을 제거하는 거.”

머리가 좋은 애꾸눈과 과묵한 몬트는 마녀 키르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가 있습니까?”

로벨은 건틀렛을 풀고 소드 벨트 뒷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한 장은 동쪽에서 온 편지고, 다른 한 장은 북쪽에서 본 편지였다.

“오늘은 푹 쉬어. 내일이면 단서가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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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부지런하여 동이 트기 전에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저녁에 먹고 남은 빵과 채소를 죽처럼 쑤어서 마시는 편인데, 오늘은 귀한 분이 있어서 계란도 삶고 치즈도 썰었다. 그리고 혹여나 귀한 분이 화를 내지 않을까 눈치를 살폈다. 로벨이 찌뿌둥한 표정을 지을 때면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질책했다. ‘내가 닭 한 마리 더 잡자고 했잖수!’, ‘지, 지금이라도 잡을까? 씨암탉으로...’ 하지만 오해였다. 로벨이 불편한 것은 갑옷을 입고 잔 탓이지 아침 메뉴 탓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호화로운 아침상에 희희낙락해서 배를 채웠다. 일단 양이 마음에 들었다. ‘일 인당 계란이 3개라니!’ 호사가 따로 없다.

로벨은 적당히 배를 채운 후 농장 관리인을 불렀다.

“간밤에 신세 졌어. 사례금이야.”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10페닝 금화가 반짝였다. 농장 관리인은 넙죽 절했다.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응? 진짜?”

“...기사님의 자비로움을 오랫동안 칭송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빼앗아 갈까 품안에 넣었다. 돼지와 닭과 계란 값을 생각하면 크게 남는 것은 아니지만, 쇠붙이를 쓰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과묵한 몬트 등이 말을 꺼내러 나간 사이, 로벨은 빗물받이통에 고인 물로 세수하고 건틀렛과 소드 벨트를 착용했다. 농장 관리인의 ‘어서 가! 어서!’ 표정이 살짝 거슬렸지만 너그러이 이해했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느에에? 네, 네!”

한 번 더 참았다.

“성난 거인 바위가 어디 있어?”

“성난 거인... 성난 거인... 아, 주정뱅이 절벽 말씀이군요?”

“주정뱅이 아니고 성난 거인이야.”

“옛날 이름이 성난 거인 바위입니다. 절벽 위에 있는 큰 바위였는데, 어느 날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주저앉았지요. 거인이 술 취해서 발을 헛디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다 보니 주정뱅이 절벽이 되었지요.”

“그래? 같은 곳이야?”

“예. 예. 그게 벌써 4, 50년 전이라, 성난 거인 바위란 이름은 나이 많은 노인들 말고 안 쓰는데, 그걸 어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로벨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거기서 나이 많은 산노인을 만나기로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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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성난 거인 바위, 또는 주정뱅이 절벽으로 이동했다. 농장 관리인은 찾기 쉬울 거란 말했지만, 혹시나 못보고 지나칠까봐 시야가 트인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햇님이 동쪽 들판을 지나 정수리를 구경할 무렵 주정뱅이 절벽을 발견했다. 농장 관리인의 말이 맞았다. 울퉁불퉁한 구릉과 자잘하게 자란 북방계 관목 위로 삐죽 솟은 바위산은 못 보고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과거에는 산 위에 큼직한 바위까지 얹혀있었다 하니 약속장소로 잡기 더할 나위 없었다.

“벌써 와 있겠지?”

로벨이 무기를 점검하자 용병경력이 눈치경력인 용병들도 무기를 준비했다. 도끼날 덮개를 빼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메이스를 안장 앞으로 옮기고, 아바레스트의 시위를 빙글빙글 감고... 마녀 키르케는 칼잡이들의 행동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싸울 생각이에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어쩔 수 없으면.”

로벨은 불만에 찬 마녀 키르케를 외면하고 손짓으로 이동을 명령했다. 과묵한 몬트가 ‘조랑말’을 몰아 선두에 서고, 발가락 슈미츠의 배불뚝이와 흉내쟁이 퍼시발의 로시난테 3세가 로벨을 호위하듯 좌우에 붙었다.

기사를 수행한 적 없는 조나 켈트는 초조해서 로벨 뒤를 쫓았다. 용병처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로벨은 조나의 표정을 오해했다.

“긴장하지 마. 위험한 일 아니야.”

위험한 일이면 아무리 떼쓴다고 15살짜리 전직 기사 종자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절벽 반대편에서 바위산을 오르자 과연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제대로 된 날짜와 시간도 없는 약속인데, 그날이 오늘인 양 기다리고 있는 것이 ‘과연’ 그러했다.

로벨 일행은 병장기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긴장이 안 된다면 무지하거나 몽매한...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로벨 일행은 정신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은 진리였다.

그가 바위에서 일어나 헬름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보았다.

“자기소개가 필요한 자리인 줄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분명히 밝힐 필요도 있군. 난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이요. 그 이름으로 로벨 로드릭 공작을 초대하였소.”

저 말을 이해한 사람은 로벨과 마녀 키르케뿐이었다.

‘뱀파이어 군주가 아니고?’

‘우리 편이라는 뜻이겠죠!’

한편, 자기소개를 요구한 조나 켈트는 두 사람과 다른 의미로 놀랐다.

“히이익! 강철성의 백작!”

잠시 잊었는데, 붉은 산 전쟁 이후 켈트 가문과 도트넘 가문은 철천지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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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장갑을 벗으려는 철부지 기사 종자를 팩트로 혼내고-‘넌 기사가 아니잖아?’- 눈에 빤히 보이는 상상의 나래도 꺾은 후-‘아니야! 인질로 주려는 거 아니야!’- 도반 도트넘 백작 앞으로 다가갔다.

“본인을 믿어주어 고맙소.”

“아직 믿지 않아.”

“거짓말이 서투시오. 위기에 처한 덩굴성을 두고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오?”

로벨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

“마도의 수호자 짓이지?”

도반 도트넘 백작도 본론으로 응수했다.

“죽은 자의 왕을 처치하시오.”

“왜? 직접 하지 않고? 너보다 강해?”

마냥 유치하지만 항상 효과적인 도발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 묵은 악마는 그냥 웃었다.

“힘의 문제가 아니오. 규율의 문제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동화 속에 마왕이 왜 하나만 등장하는지 아시오?”

게다가 눈높이 교육도 할 줄 알았다. 더 물으면 바보가 될 거 같아서 화제를 바꿨다.

“너희들은 같은 종자잖아? 왜 싸우는 거야? 돈이라도 빌렸어?”

마지막 말은 어린 집사한테 옮은 농담이었다. 어린 집사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성을 얻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지만, 그 방법은 사뭇 다르오. 지금껏 우리를 상대해 온 공작은 잘 알지 않소?”

로벨은 알지 못했다. 로벨의 머리는 악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의심은 할 줄 알았다.

“넌 인간의 적이야?”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이름으로 살아왔을 마도의 수호자가 웃었다.

“조금 전 말했잖소? 본인은 도반 도트넘 백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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