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4화 (314/605)

314화. 복수자

가볍게 무장한 풋맨 20명, 롱 스피어와 파이크로 무장한 스피어맨 33명, 금속갑옷을 갖춘 맨앳암즈 25명, 쇠뇌를 등에 맨 크로스보우맨 68명, 대포를 끄는 포병대 12명, 로벨의 직속 랜스 3명, 종군상인 12명, 기사와 기마용병의 전투마 4마리, 수레를 끄는 짐말 15마리, 기타 가축 35마리...

국가와 국가가 총력을 다해 수천, 수만이 싸우는 전쟁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지만, 골짜기의 광산 하나, 임야의 토지 한 토막 두고 싸우는 영주들의 전쟁에서는 대단한 전력이었다. 제대로 된 병장기를 소지한 용병이 세 자릿수란 사실만도 엄청난데, 기마대와 포병대까지 포진했으니, 어지간한 장원의 전력으로는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바위성의 켈트 남작은 저 무시무시한 군대가 아군이란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늑대성의 주인이자 볼탄 반도의 군주이신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오! 성문을 여시오!”

허풍쟁이 제이콥이 소리치자 바위성의 성문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열렸다. 그리고 로벨의 첫 봉신인 켈트 남작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왔다.

“My Lord...”

수백 명의 군사가 지켜보는 자리였다. 주종관계를 명확히 보이지 않으면 곤란했다.

켈트 남작이 무릎을 꿇자 부인과 아들도 따라 몸을 낮췄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켈트 일가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일어나시오. 경의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이런 예는 필요 없소.”

어린 집사가 있었으면 입술을 삐쭉였을 것이다. 로벨의 초창기 봉신 중 가장 말 안 듣고, 가장 까칠한 봉신이 켈트 남작이었다. 본래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였던 탓에 로벨을 쉬이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많이 공손해졌다.

로벨은 켈트 남작의 체면을 생각해서 손수 일으키고 친절히 말했다.

“경의 충성에 화답하고자 병사를 이끌고 왔소. 자세한 이야기는 성 안에서 합시다.”

그 광경은 바위성의 병사와 영지민에게 퍽 인상적이었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높은 귀족과 친분을 과시했으니 켈트 가문의 권위는 오랫동안 탄탄할 것이다. 켈트 남작은 그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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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성의 성문 주변은 큰 바위를 그대로 깎아 세웠기에 묘한 야성미가 넘쳤다. 처음 본 사람은 기묘한 건축술에 넋을 잃곤 했다.

로벨은 성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메인 홀에 들어갔다. 정통성 전쟁 때 루카스 남작을 사로잡은 곳이었다.

켈트 남작은 벽에 걸린 초를 빼서 작전 테이블에 놓인 여러 촛대를 하나하나 밝혔다. 대낮까진 아니지만, 깨알 같은 성경 글씨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켈트 남작은 아내에게 그만 물러가라 속삭였다. 하지만 14, 5살쯤 된 아들은 그대로 남았다. 이만한 규모의 작전회의는 좀처럼 없으니 경험 삼아 참관시키려는 듯했다.

로벨은 별말 없이 묵인했다. 펄프 대장을 비롯해 울프 용병단의 고참병이 대거 자리했는데 영주의 아들 하나쯤 더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어린 켈트는 흉악한 외모와 흉흉한 병장기를 가진 용병들 속에서 주눅이 들어 아비의 눈치를 보았다. 저 나이면 기사 아래에서 종자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 품에 있는 것이 특이했다.

“괴물이 처음 목격된 곳은 바위산 동쪽 사냥꾼 마을입니다.”

켈트 남작이 바위성 주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농경지부터 수목지까지 매우 자세히 그린 지도였다.

“피해는 어떻소?”

“장정이 아홉 명 전사했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무사히 피난했습니다.”

로벨은 입모양으로 감탄했다. 바위산의 사냥꾼은 구릉성의 목동과 더불어 숙련된 전사였다. 과거 전쟁에서도 이들은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쪽 마을도 나름 방비가 되어있는 모양인데, 왜 피난을 떠난 겁니까?”

펄프 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켈트 남작은 화내지 않았다. 세 자릿수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대장이면 질문할 자격이 있었다.

“그곳 사냥꾼 말로 첫날 습격한 고블린만 100에서 120마리라는군.”

“와우-!”

“겁나 많은데?”

용병들이 혀를 찼다. 하지만 켈트 남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마을에서 버티며 지원을 요청했겠지. 둘째 날에 오크 무리가 목격되었다. 경황이 없어 숫자를 파악 못했으나 쉰 마리는 확실히 넘었다고 한다.”

“고블린과 오크라니...”

“여기가 검은 숲도 아닌데, 어디서 그렇게 흘러들어온 거지?”

본래 볼탄 반도에는 몬스터가 희귀했다. 숲 속 깊은 곳이나 산골짜기 동굴 속에 몇 마리 숨어있기야 하겠지만, 수백 단위로 출몰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검은 숲 해방전쟁 당시 검은 숲에서 흘러온 몬스터 무리가 유일했다.

“죽은 자의 왕...”

로벨이 중얼거리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싹 사라졌다.

몬스터는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현세의 생물이 아니라 신화, 전설, 민담 등이 만들어낸 인지의 세계에서 넘어온 생물이었다. 검은 숲에서 자주 출몰하는 것은 검은 숲 자체가 공포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이며,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된 전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도의 수호자를 불러낼 정도의 마법사라면 몬스터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린 집사의 말대로 죽은 자의 왕이 정황상 가장 유력했다.

영웅소설을 보면 영웅의 자질을 가진 젊은 기사가 사악한 마왕-혹은 사악한 마법사-이 숨어있는 외딴 성-혹은 미궁-에 찾아가 정의의 이름으로 무찌르고 평화를 되찾는데, 현실적으로 말하면 마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웅이 군대 모아서 오라고 거취를 드러내고 기다릴 리 만무했다. 당장 악마추종자만 해도 음지에 숨어서 100년 넘게 색출을 못하고 있었다.

죽은 자의 왕인지 산 자의 왕인지 어디 사는 누군지 모르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일 제7시까지 바위성의 병사를 모으시오. 적의 위치가 확인되는 대로 출병할 것이오.”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가 한숨 쉬었다. 적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 누구 몫일지 뻔했다.

‘오늘 밤 잠자기는 글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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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풍파는 열정이나 양심 같은 좋은 것을 깎아내는데, 경우에 따라 노련함이나 이해심으로 메울 수 있었다.

로벨이 몬스터의 소재지를 찾으면 30페닝을 하사하겠노라 공지했다. 반짝이는 것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용병의 지론이라 너도나도 정찰대에 자원했다.

펄프 대장은 눈이 좋고 발이 빠른 20명을 골라 2인 1조로 내보냈다. 바위산이 자그마한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야영지도 작은 규모는 아닐 테니 충분히 성과를 기대할 만했다.

로벨은 켈트 경이 내어준 침실에서 갑옷을 벗고 손과 발을 씻었다. 전장에 나오면 어지간해서 갑옷을 벗지 않는 로벨이지만, 여름은 조금 힘들었다.

기사 종자가 있으면 손을 보탤 테지만, 로벨은 종자가 없기에 홀로 해결했다. 그래도 제법 할 만했다. 플레이트 사이의 고리를 완전히 풀지 않고 느슨하게 한 다음 위아래로 벗었다. 그러면 입을 때도 쉽고 빨랐다.

로벨은 땀에 젖은 가죽 더블릿을 수건으로 닦다가 낯선 시선을 느꼈다. 빠끔히 열린 방문으로 주근깨 소년이 쭈뼛거렸다.

로벨은 노크도 없이 찾아온 방문객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티 나는 가슴을 가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넌 켈트 남작의...?”

“케, 켈트 가문의 장남, 조, 조, 조나 켈트입니다.”

“그래? 이름이 참 길구나?”

“예, 예?”

조나 켈트는 존경하는 공작님의 존경하기 힘든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벨은 몸을 돌리고 우플랑드를 꺼냈다. 어린 켈트는 너무 긴장해서 더블릿 위에 우플랑드를 입는 이상한 행동을 깨닫지 못했다.

로벨은 한결 가벼워진 몸에 소드 벨트를 차며 말했다.

“한번 봐줬어.”

“...예?”

“네 무례 말이야. 한번은 봐줬어. 하지만 계속 그렇게 있으면 켈트 경의 아들이라도 용서하기 힘들어.”

그리고 칼자루에 손을 척 얹었다. 어린 켈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결례를, 아니,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좋아. 용서할게.”

“예! 예?”

“용서했으니까 무슨 용무인진 말해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에게 옮은 화법이라 보통 사람은 따라오기 힘들었다. 어린 켈트는 어버버하다가 간신히 외쳤다.

“저를! 저를 전장에 데려가 주세요!”

로벨은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부탁은 켈트 남작에게 해야지. 넌 나의 기사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버지의 주군이시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기사 서임도 받지 않은 봉신의 장남을 내 마음대로 종군시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그, 그런가요?”

“왜 전쟁터에 가고 싶은데?”

역시 로벨의 화법은 이상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다리가 몇 개 빠졌다. 어린 켈트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요약하면 별거 없었다.

“바이란 남작의 기사 종자로 보내졌는데, 도망쳤다고?”

“도망이 아니라... 그러니까... 도망쳤습니다.”

“음. 켈트 남작이 많이 부끄러웠겠어.”

아버지와 두 오라비가 죽어서 곧장 기사 작위를 받은 로벨이 할 말은 아니지만, 기사 수업은 매우 고단했다.

훈련을 가장한 폭력과 험하고 더러운 기사 뒷바라지는 길드의 도제와 비교해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 짓을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을 걸쳐야 하니, 기사가 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망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내답지 않고 명예롭지 않았다.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은 켈트 남작과 바이란 남작의 친분 때문이겠지.’

상황이 대충 이해되었다. 어린 켈트는 불명예를 씻고 싶어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켈트 남작에게 말해볼게. 하지만 결정은 남작이 할 거야.”

어린 켈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상에 어느 기사가 주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로벨의 대답은 곧 켈트 남작의 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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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짧은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올랐다.

새벽내 바위산을 헤집고 다닌 정찰대가 귀환했다. 이슬에 젖은 퀭한 얼굴이 되었지만 성과가 있었다.

“바위산 남쪽 계곡입니다요. 농장을 점령하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습니다요.”

“계곡의 농장이라면... 제기랄, 돌체 일가의 농장이군. 산 사람이 있나?”

“아마 없을 겁니다요. 사람 몸통 비슷한 것도 굽고 있었으니까요.”

켈트 남작은 험한 말을 씹어뱉다가 로벨에게 사과했다. 로벨은 괜찮다고 말했다. 자신의 영지, 자신의 백성이 괴물의 한 끼 식사가 되었는데 화나지 않을 영주는 없었다.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의 죽음을 복수하시오. 나와 내 병사가 도울 것이오.”

로벨의 위로는 출병명령이 되었다. 울프 용병단과 바위성의 사냥꾼은 아침 겸 점심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성문 앞에 집결했다. 뿔나팔이 한번 울리고, 복수자들이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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