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3화 (313/605)

313화. 출정

고블린이 여우처럼 영악하고 승냥이처럼 사납다고 하지만,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발을 맞춰 걷는 군대 앞에서는 사슴이나 마찬가지였다.

울프 용병단의 스피어맨이 빽빽하게 세운 창으로 밀어붙이니 고블린은 어찌할 줄 모르고 뒷걸음쳤다. 그리고 나무와 바위에 가로막혀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는 곳에서 예정된 죽음을 맞이했다.

고블린 중에서 남달리 용감한 고블린은 자상을 감수하고 창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돌도끼와 푸주칼을 휘둘렀지만, 거리를 좁히기 전에 맨앳암즈에 가로막혔다.

사슬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무장한 중장병은 어린아이 체구의 고블린이 휘두르는 조잡한 원시무기에 코웃음을 쳤다.

규격 외 몬스터 트롤 때문에 부득이 후퇴했을 뿐, 고블린만 출몰했으면 방진을 짤 것도 없이 맨앳암즈 1개 소대만으로 소탕했을 것이다.

“꾸에엑-!”

애꾸눈이 쏜 쿼럴에 마지막 고블린이 쓰러졌다. 거친 호흡, 숨 가쁜 눈짓, 살인의 흥분 따위는 아쉽게도 없었다. 그런 것을 보이기에는 용병짓을 너무 오래 했다. 펄프 대장은 로벨의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명령했다.

“영악한 놈들이다. 확인 사살해라.”

울프 용병단은 즉시 칼과 도끼를 꺼내 고블린 시체를 쑤셨다. 아니나 다를까, 어설프게 찔려 죽지 않은 고블린이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막 재장전을 마친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끌어올려 쏘았다. 팡-! 두 뼘 길이의 짤막한 쿼럴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고블린 뒤통수에 꽂혔다.

“역시 애꾸눈이야.”

“기가 막히네!”

용병들은 원로 울프 용병단원을 추켜세우며 고블린 시체를 난도질했다.

로벨은 반의반으로 줄어든 바바 야가의 창을 물끄러미 보다가 안장고리에 걸었다. 한 방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한 번 밖에 못쓰는 것이 아쉬웠다.

‘늑대의 왕과 싸울 때 이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로벨은 무시무시했던 마도의 수호자를 떠올렸다.

‘마법사의 왕, 혹은 죽은 자의 왕을 상대하란 거겠지?’

로벨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영주님, 전부 사살했습니다. 시체는 어찌할까요?”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지만, 시체가 부패하면 독이 되고 병이 되었다. 땅에 묵거나 불로 태우는 것이 좋지만, 숲에서는 곤란했다.

“한곳에 모아둬. 나무와 바람이 처리할 거야. 숲지기에게 말해서 이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전투 후속조치를 마치고 숲을 빠져나오니 해가 서녘으로 넘어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과 농민이 성문 밖까지 마중나왔다.

찰드 촌장과 나이 많은 농부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승리를 축하했고, 감수성이 풍부한 처녀들은 부상 입은 용병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로벨은 헤벌쭉해서 웃는 용병과 시기 질투하는 용병을 차례로 보며 말했다.

“괴물이 더 있을지도 몰라. 여자와 아이들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남자들은 셋 이상 무리 지어서 다니도록 해.”

“그리 전하겠습니다.”

찰드 촌장은 지시사항을 까먹지 않게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엄하고 자상하신 영주님의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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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우려가 사실이 되었다.

그 뒤로도 몬스터가 수차례 출몰했다. 북쪽 숲뿐만 아니라 볼탄 반도 전역에서 몬스터의 출몰이 증가했다.

북부대로를 이용하는 상인의 숫자가 눈의 띄게 경감했고, 늑대성의 관세와 통행세 수입도 크게 줄었다. 어린 집사는 북쪽 영주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말 그대로 ‘물어’ 뜯었다.

“으으으...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구나!”

아야와 이야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동질감을 표시했다. 인간 숫자가 많은데 어째 늑대가 인간이 되지 않고 인간이 늑대가 되어갔다. 늑대성이란 이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정통성 전쟁 때하고 비슷하지 않아?”

로벨이 초점을 몬스터로 옮겼다. 과거에도 북쪽 지역에 몬스터가 크게 늘어나 피난민이 생겨난 적 있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강철성의 짓일까?”

“이번에도 피난민이 몰려오겠죠?”

전쟁을 먼저 생각하는 로벨과 경영을 먼저 생각하는 어린 집사의 초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괜히 무안해져서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가, 강철성이 왜요? 볼프 사트로 후작도 쥐 죽은 듯이 있고, 잉그비아 왕국도 지들끼리 싸우느라 바쁜데, 혼자서 시비 걸 이유가 없잖아요?”

“정통성 전쟁 때랑 달리 각 지방 영주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피난 가기 힘들지 않을까? 농민 입장에서도 집 버리고 땅 버리고 타지로 떠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잖아.”

그렇게 서로의 질문에 해답을 주었다. 역시 머리를 맞대니까 정리가 잘 되었다.

“그럼 괴물을 부리는 것은 누구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강철성이 아니어도 용의자가 몇 명 있어요.”

“누군데?”

“동방의 대마녀 바바 야가, 악마추종자의 우두머리 마법사의 왕, 그리고 도반 도트넘 백작이 경고한 죽은 자의 왕. 공통점은 마법을 쓸 줄 알고, 영주님과 인연이 있다는 거죠.”

“앞에 두 사람은 그렇지만, 죽은 자의 왕은 아닌데? 마법사인지도 모르고, 나랑 일면식도 없잖아.”

로벨이 로벨스럽지 않게 지적하자 어린 집사가 당황했다.

“별명이 딱 마법사잖아요? 죽은 자의 왕이잖아요? 제대로 된 사람이면 산 자의 왕이겠죠.”

“...제대로 되었으면 그런 유치한 별명 안 지어.”

로벨과 어린 집사가 머리를 싸매고 추리하는 사이에도 몬스터 소동은 계속되었다.

볼탄 반도의 용맹한 기사들은 자신의 백성을 괴롭히는 괴물을 용서 못해서, 혹은 주군과 귀부인에게 자랑할 공훈 한 자락을 위해서 말과 갑옷을 갖추고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몬스터 ‘사냥’이라고 부르지만 진짜 사냥하고 달랐다. 몬스터는 짐승보다 영악하고 잔인하며 사나웠다.

그랜드 챔피언의 무용과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무기와 10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정예 용병단이 없는 시골 기사들은 고블린의 기습과 트롤의 난동에 무참히 박살났다. 자연히 충성을 바친 주군에게 구조요청이 전해졌다. 그리고 주군에서 주군으로 두어 다리 건너면 볼탄 반도 공작 로벨 로드릭에게 이어졌다.

“여기저기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어린 집사는 볼탄 반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구원요청에 혀를 찼다. 양식 있는 영주는 금화 자루와 함께 도움을 청했지만, 교양머리 없는 것들은 다짜고짜 기사와 병사를 보내 달라 요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기사와 병사로 성을 점령하고 쫓아내고 싶지만 애써 참았다.

“이걸 어쩌죠? 전부 보낼 수는 없는데요.”

로벨은 덩굴성에서 온 편지를 건성으로 읽고 답했다.

“급한 곳은 도와줘야지.”

로벨에게 충성하는 기사는 100여 명이나 되지만, 늑대성에 상주하는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제임스 공작이나 볼프 후작이 수행기사로 서너 명씩 데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검소하다고 해야 할지 궁상맞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정 급하면 비빌 곳이 있었다. 늑대성에서 말 타고 반나절 거리인 호른 성의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를 보내 호른 경을 호출했다. 호른 경은 30분이 안 되어서 도착했다. 로벨이 부르기 전에 먼저 달려온 것이다. 그 증거로 길이 엇갈린 과묵한 몬트는 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성에서 소리 지르다 빈손으로 돌아와야 할 운명이었다.

“주군, 괴물들의 준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로벨은 예상보다 3시간쯤 일찍 온 호른 경을 반기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경을 부르려고 했소.”

로벨은 어린 집사가 그린 볼탄 반도 지도를 가리켰다. 전문 화가가 그린 지도에 비하면 지저분하지만, 거리와 지형 등은 훨씬 정교했다.

“현재 위험한 곳은 두 곳이오. 하나는 덩굴성 북쪽 경계고, 하나는 바위성 동쪽 산기슭이오.”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고블린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이상하게 생긴 나무조각이라 생각한 장기말을 덩굴성과 바위성으로 옮겼다. 로벨과 함께 숱한 전쟁터를 누벼온 호른 경은 로벨의 의도를 재깍 알아챘다.

“둘 중 한 곳을 지원하면 됩니까?”

“울프 용병단 2개 중대를 내어주겠소.”

호른 경은 내키지 않았다. 충성맹세를 받았다고 하지만, 이렇다 할 교류도 없는데 150명 가까운 정예 용병을 지원하기가 껄끄러웠다.

속내를 조금 더 파면, 로벨과 떨어져서 전쟁하는 것이 불안했다.

로벨이 말 위에서 당해낼 자가 없는 강자라고 하지만, 사랑에 빠진 기사에게는 아직 여린 처녀였다. 호른 경도 당혹스러웠다. 여자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호른 경의 복잡한 마음을 알 리 없는 로벨은 늑대모양 장기말을 두 패로 나누며 말했다.

“2개 중대로 부족하오? 맨앳암즈와 핸드 캐논을 내어주겠소. 에디즈 자작군과 연합하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로벨은 아니라니까 아닌 줄 알고 말을 탄 기사 장기말과 늑대 모양 장기말을 덩굴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남은 말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바위성으로 갈 것이오. 먼저 이기는 쪽이 고전하는 쪽을 돕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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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숲을 토벌할 때와 달리 차분히 병력을 소집했다.

울프 용병단 330명을 소대 단위로 쪼개서 완편된 2개 중대-8개 소대- 160명의 지휘권을 호른 경에게 맡겼다. 로벨의 힘이자 늑대성의 상징과 같은 부대의 지휘권을 넘기는 일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호른 경이 딴마음을 먹어도 보병대장 외팔이 더치와 포병대장 겁쟁이 데비가 따르지 않을 테고, 그 아래 싸움개 닥스, 발냄새 베커, 피리 부는 쟝 등이 불만을 보일 테니, 진짜 지휘권은 여전히 로벨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새로 고용한 말단 용병은 몰라도, 소대장 이상의 고참 용병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있으니 울프 용병단이 배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전쟁이라는군.”

“저렇게 다 떠나면 우린 누가 지켜주나?”

“성벽과 해자가 있잖수. 이럴 때를 대비해 죽자고 만든 것인디.”

로드릭 시민은 성 밖에서 따온 꽃잎으로 울프 용병단을 축복했다. 꽃가루가 시가지를 지나 도시 밖 개울까지 휘날렸다.

로벨은 모닝스타 갈기에 달라붙은 이름 모를 꽃잎을 떼어내 도개교 아래로 흘려보냈다. 여름비로 불어난 개울이 연약한 꽃잎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영주님! 빨리 다녀오세요!”

성문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늑대성에서 작별 인사한 어린 집사가 도시 성문까지 따라와 또 인사했다. 시가행진하는 동안 먼저 온 모양이다. 로벨은 대열에서 이탈해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말고 기다려!”

“가을이 되기 전에 돌아오세요! 바위성 영주가 말 안 들으면 그냥 버리고 오시고요!”

어린 집사를 따라온 시민들이 껄껄 웃었다.

로벨이 빠져도 울프 용병단은 2열 종대로 꿋꿋이 행진했다. 군대는 깃발과 앞사람을 따라가니 지휘관은 잠깐 이탈해도 문제없었다. 그것은 호른 경도 마찬가지라 자신의 부대를 외팔이 더치에게 맡기고 로벨을 찾아왔다.

“주군, 저희는 동부대로를 따라 곧장 덩굴성으로 가겠습니다.”

로벨은 덩굴성까지 거리를 계산한 후 말했다.

“도착하는 즉시 바위성으로 전령을 보내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호른 경은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렸다.

“왜 그러시오?”

적의 심장을 도려내고 핏물로 목을 축이는 용맹한 기사도 속마음을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른 경은 바이저를 내리고 주먹을 가슴에 붙였다.

“그럼 승전보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로벨은 애간장을 태우듯 배시시- 웃었다.

“그런 일을 없을 거요. 내가 먼저 승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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