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2화 (312/605)

312화. 함성

화약무기의 장점은 대략 일곱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는데, 그중 최고의 장점을 꼽으라면 역시 ‘위력’이었다.

롱보우와 아바레스트의 장력이 아무리 강해도 화약의 폭발력에 비할 바 아니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어린아이 주먹만한 돌덩이가 쏘아졌다.

포탄은 눈 깜박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날아가 트롤 몸뚱이에 접촉했다. 질량만 보면 작디작은 돌 쪼가리가 깨지거나 튕겨나가야 하지만, 초속 920ft의 넘치는 속도 탓에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 포탄은 트롤의 가슴과 복부를 무자비하게 꿰뚫고 들어가 내부에서 깨져버렸다.

“아윽-!”

“우웨엑!”

전쟁터를 누비며 볼꼴 못 볼꼴 많이 본 용병들이지만, 핸드 캐논에 직격당한 트롤은 처음 보았다.

살점이 터지고, 내장이 쏟아졌다. 하얀 뼈가 피부 밖으로 뚫고 나와 햇살에 반짝였다. 트롤의 경이로운 재생력도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겁쟁이 데비 이하 포수들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쯤이야. 어험. 어험. 기본이지.”

“이게 바로 최신무기라고! 잘 봐둬, 새내기들아!”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곤죽이 된 트롤 앞으로 다가갔다. 몸통이 세 쪽으로 갈라졌는데 숨이 붙어서 눈을 깜박였다. 괴성을 지르는 듯하나 폐가 조각나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휘둘렀다. 키가 낮아져서 적당하게 머리통을 쪼갤 수 있었다.

“꾸루룩...”

트롤은 괴기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소리는 못 질러도 피거품은 흘릴 수 있는 모양이다.

로벨은 피에 젖은 아론다이트를 회수해 좌우로 털며 명령했다.

“아직 고블린이 남아 있을 거야. 풋맨과 맨앳암즈 소대가 수색해. 나머지는 혹시 모르니까 대기하고,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 등은 날 따라와.”

과묵한 몬트 외 ‘기타 등등’으로 분류된 발가락 슈미츠, 흉내쟁이 퍼시발이 구시렁거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로벨은 기마부대 속에서 뚜벅뚜벅 쫓아오는 허풍쟁이를 앞세우고 조용히 물었다.

“시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느 시체라고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상인 가족과 울프 용병단의 시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허풍쟁이는 투구를 벗고 뒤통수를 긁었다.

“글쎄요... 인육을 즐기는데다가 저장 개념이 부족한 놈이라 어려울 겁니다요.”

“그럼 유품이라도 챙기자. 교전장소가 어디야?”

허풍쟁이는 괜한 짓이라고 말릴까 하다가 관두고 흔적을 찾아갔다. 이 근방 어디인데, 울프 용병단의 정찰로를 따라가면 되니까 어렵지 않았다.

“이쪽에 싸움 흔적이 있습니다요!”

관목 한 그루가 부러져 있고, 깨진 금속조각과 핏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로벨 일행은 전투마에서 내려 흔적을 따라갔다. 시체를 끌고 간 듯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수풀을 헤집고 나가자 응달진 공터에 취사흔적이 발견되었다.

“우욱!”

발가락 슈미츠가 고개를 틀었다. 말 그대로 취사를 했다. 칼과 불 대신 도끼와 이빨을 사용한 취사였다. 갈기갈기 찢어진 파편이 작은 공터를 가득 메웠다. 그중에는 5, 6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애 두개골도 있었다.

“상인의 아들인가?”

눈알이 뒤집혀서 늑대성으로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보내지 말 것을 그랬다.

“유품이 될 만한 것을 챙겨. 가족과 연이 닿으면 전해줄 거니까.”

고용주의 명령은 옛 신의 명령과 동급이라 울프 용병단은 즉시 흩어졌다. 고기조각 사이를 헤집으며 값나가는 것을 주웠다. 옷가지 사이로 손모가지나 발모가지가 떨어지면 기겁했다.

허풍쟁이는 상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 무명옷을 집어 들다 머리와 다리가 양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욕지기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되지?”

남들보다 비위가 강한, 혹은 강해 보이고 싶은 흉내쟁이가 낄낄거리며 묘사했다

“이렇게 앞뒤로 잡고 당기면 되지 않을까?”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과묵한 몬트는 진지하게 흉내쟁이의 동작을 따라했다.

“야야, 너까지 왜 그러냐.”

발가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과묵한 몬트는 진지했다.

“이상하군. 아무리 트롤이라도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동시에 잡아 뜯을 수 없다.”

“그 괴물 놈의 힘을 몰라서 그래. 20년 묵은 참나무도 뿌리째 뽑는 놈들인데.”

“힘이 얼마나 좋던지 불가능하다. 팔 길이가 되지 않아.”

로벨은 머리가 쪼개진 트롤을 떠올렸다. 키는 9.5피트쯤이고, 어깨너비는 2피트? 2.5피트? 사람보다 팔 길이가 길지만, 힘을 줄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아침에 본 상인의 키를 생각하면...

“혼자서 이렇게 할 수 없어.”

로벨이 중얼거리자 모두가 작업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혼자서... 못하면요?”

로벨도, 과묵한 몬트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옛 신이 축복한 상상력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 있었다. 두 마리가 앞뒤로 잡고 당기면 가능했다.

“그럼 트롤이 더 있을지도...?”

“우아아악-!”

“살려줘!”

울프 용병단의 비명이 들려왔다. 로벨 등은 즉시 전투마를 끌어와 안장에 올라탔다.

“어엇? 전 어쩝니까요?”

로벨의 랜스와 달리 말이 없는 허풍쟁이가 소리쳤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말머리를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잡아!”

허풍쟁이는 허둥거리며 로벨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안장에 올라타지 못했다. 모닝스타가 콧김을 뿜으며 비협조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안장 앞뒤로 비스듬히 걸어놓은 바바 야가의 창 때문이었다. 허풍쟁이의 왼발이 창대를 넘지 못해 도로 나자빠졌다. 로벨은 머쓱해서 과묵한 몬트에게 소리쳤다.

“허풍쟁이를 태워! 이럇!”

그리고 한발 앞서서 비명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과묵한 몬트는 최소 600년 동안 이어질 유구한 집단문화, ‘하급자에게 떠넘기기’를 사용했다.

“발가락! 허풍쟁이를 태워라! 이랴앗!”

“뭐? 내가? 왜? 임마!”

발가락 슈미츠는 과묵한 몬트를 소대장으로 인정하기 싫어 반발했지만, 허풍쟁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이기지 못했다.

“제기랄! 날 잡아서 푸닥거리 한 번 해야지! 진짜 지가 대장인 줄 알잖아!”

@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투덜대는 동안 로벨은 캔터 속도로 숲을 가로질렀다. 한여름의 울창한 숲에서 선보이기는 위험한 승마술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숲 지리와 모닝스타의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가지에 치여 날아가거나 잔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물푸레나무 군락을 지나자 비명소리가 한층 커졌다. 볼탄 반도를 주름잡은 울프 용병단이 질서를 잃고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종종 몸을 돌려 크로스보우로 반격하기는 했다.

‘저래서는 안 돼! 진형을 유지해야 해!’

로벨은 적을 살폈다. 과묵한 몬트가 추리했듯 트롤이 한 마리 더 있었다.

‘저렇게 많이 숨어들 때까지 몰랐다니!’

숲지기를 혼내야 할지, 찰드 형제를 혼내야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바로 치웠다. 지금은 전열을 수습해야 했다.

추악한 고블린 십수 마리가 짤막한 다리로 쫓아오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지금 잡아야 할 것은 트롤이었다.

‘어떻게?’

로벨은 질문과 동시에 허벅지에 치이는 바바 야가의 창을 잡았다. 쓸 수 있으면 쓰려고 했지만, 이렇게 쓸 줄 몰랐다.

“영주님! 속도를 줄이십시오!”

생각은 길고 질척였지만 시간은 짧았다. 새로운 트롤과 거리가 30야드 앞으로 좁혀졌다. 제대로 된 랜스 차칭을 하려면 속도를 갤럽으로 올리고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시간도 장소도 협소했다.

로벨은 안장 위로 한쪽 발을 올리고 고삐를 놓았다. 모닝스타가 고개를 돌려 로벨을 보았다.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로벨은 그냥 몸을 움직였다. 안장에서 뛰어올랐다.

“히히히힝-!”

모닝스타가 고개를 상하로 크게 휘저으며 가벼워진 몸을 더욱 박찼다. 그와 동시에 트롤이 매끈한 나무곤봉을 휘둘렀다. 몽둥이질 좀 해봤는지 정확히 기수의 눈높이였다. 하지만 기사가 탄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꾸룩?”

트롤은 헛스윙으로 몸을 반 바퀴 돌리고 사라진 쇳덩이 인간을 찾았다. 오른쪽, 왼쪽, 발아래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야.”

정답은 머리 위였다. 아름드리 밤나무의 가지를 잡고 위로 오른 것이다. 관성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44파운드의 갑옷 무게를 생각하면 쉽게 흉내 내기 힘든 곡예술이었다.

“크와앗-!”

키가 10피트 가까이 되는 트롤은 올려다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로벨은 트롤의 생소한 경험을 배려해주었다.

“이 정도 길이면 충분할 거야.”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역수로 쥐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랜스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상하지만, 본디 절굿공이였으니 아주 잘못된 용도는 아니었다. 로벨은 트롤의 몸뚱이를 힘차게 빻았다.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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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의 몸뚱이가 폭발했다. 나무껍질 같은 피부가 찢어지고 피와 내장과 갈비뼈 마디마디가 비산했다.

위력만 보면 핸드 캐논하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냉병기가 대포 수준의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에 감탄할 수는 있지만, 위력 자체는 경악할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임팩트가 달랐다.

10피트 높이의 나무 위에서 10피트짜리 꼬챙이를 쥐고 10피트 괴물을 향해 온몸을 집어던진 모습이 비정상이었다. 성 안에 네 발 달린 오두막이 들어왔을 때만큼 기괴했다. 그런 이유로 트롤의 가슴이 터치고 기사의 강철 부츠 아래 깔리는 광경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이 숲은... 무슨 저주받았나?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

트롤 시체 위에서 깨진 창을 늘어트린 기사의 모습은 현실이 아니라 동화 속 장면 같았다. 요정왕이 나타났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착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로벨은 트롤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필드 아머를 찝찝해하며 주위에 남은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

“외팔이, 겁쟁이, 새집머리, 지금 뭐하는 거야? 밀집대형으로 뭉쳐! 소속 따위 신경 쓰지 마! 일단 모여! 피리 부는 쟝! 싸움개 어디 갔어? 뭐? 그럼 네가 소대장이잖아! 앞에서 창 잡아!”

로벨은 습관적으로 부러진 랜스를 버렸다가 아차해서 되줍고 흐룬팅을 뽑았다. 위엄이 조금 떨어지지만 막힘이 없었다.

울프 용병단은 최고 지휘관의 지휘에 힘입어 전열을 정비했다. 강력한 아군이 허무하게 당해 넋이 나간 고블린은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울프 용병단이 방진을 짜기 전에 덤비거나 도망갔어야 했다.

“꾸이익-!”

“뀌익!”

고블린은 살기에 반응해 난동을 피웠지만, 고슴도치처럼 솟은 창벽에 덤비지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시도는 할 수 있었지만, 창벽 사이사이로 날아오는 매서운 쿼럴에 빠르게 쓰러졌다.

로벨은 흐룬팅을 앞으로 뻗으며 재차 명령했다.

“속보로 전진! 빠르게 처리한다!”

울프 용병단은 함성을 지르며 걸음을 떼었다. 착! 착! 착! 착! 죽음의 발소리가 숲 속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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