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11화 (311/605)

311화. 폭음

로드릭 영지에서는 다사다난한 지난날을 대변하듯 몬스터가 자주 출몰했다. 북쪽 숲의 오크와 고블린, 뉴 로드릭 마을의 구울을 완전히 소탕한 것이 불과 3년 전이었다.

“몬스터 때문이면 저 아래 쪽에 용병단 주둔지로 가쇼! 펄프 대장을 찾아서 말하면 해결해 줄 것이오.”

지금까지 대체로 그랬다. 몬스터가 마을 경계에 나타나거나, 여자와 아이가 실종되면 펄프 대장에게 보고되었다. 경력만큼이나 노련한 펄프 대장은 몬스터의 종류와 숫자를 파악해서 토벌대를 보내고 어린 집사에게 보고했다.

굶주린 고블린이나 갈 곳 없는 구울이 대부분이라 10명 안팎의 인원으로 큰 피해 없이 해결되었다. 수백, 수천 단위의 전쟁에서 손발을 맞춰온 울프 용병단에게 몬스터 몇 마리는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롱 스피어로 밀어내면서 크로스보우로 무력화하면 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로벨과 용병들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인을 다독여서 펄프 대장에게 보냈다. 상인은 끝까지 로벨이 누군지 몰라보고 무례를 범했지만, 로벨은 자비롭게 용서했다. 처자식이 몬스터한테 잡혀갔는데 존칭쯤이야 생략할 수도 있었다.

“잘 해결되어서 진상품을 가져오면, 그때 정식으로 용서하자.”

진정한 기사요, 위대한 영주였다. 하지만 세상사는 마냥 아름답지 않았다.

로벨이 연병장에 앉아 무구를 손질할 때, 펄프 대장이 한쪽 다리를 끌며 늑대성으로 들어왔다. 로벨은 순간 펄프 대장이 공격받은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고질병이 도졌음을 깨닫고 도로 앉았다.

“벌써 괴물을 잡았어?”

로벨은 햇빛에 칼날을 비추며 물었다. 꽤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로벨이 눈살을 찌푸리고 흐룬팅을 치우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죽었습니다.”

최근 들어 거듭 생각하는데, 주어가 생략되면 화가 났다.

“누가? 괴물이? 상인이?”

“영주님께서 보낸 상인과 상인의 가족... 그리고 우리 병사 셋이 죽었습니다.”

로벨의 얼굴이 천 년 묵은 고목처럼 딱딱해졌다. 칼을 집어넣고 한숨을 쉬었다.

“...고블린이 아니었어?”

“고블린과 트롤이 함께 있었습니다.”

펄프 대장이 왜 저리 심각한지 알았다. 몬스터라고 퉁 쳐서 부르지만, 엄연히 종(種)이 있고 파(派)가 있었다.

오크, 놀, 고블린 등은 지능이 높아서 때때로 협력하지만, 오우거, 트롤, 사이클롭스 등은 지능이 낮고 식탐이 강해서 타 종족을 먹이로 삼을 뿐 협력하지 않았다. 트롤이 다른 종과 어울린다면, 트롤보다 강한 상위종이 강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상위종에는 인간도, 뱀파이어도 포함되었다.

‘강철성이?’

정통성 전쟁과 왕위계승전쟁 때 증명된 바와 같이 도반 도트넘 백작의 특기는 몬스터를 부리는 것이다. 옛 신의 교단에서 탐탁지 않아 하여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가진 비술을 볼 때 가능성이 있었다.

“괴물을 소탕하자. 울프 용병단을 소집해.”

“몇 명이면 됩니까?”

로벨은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가능한 인원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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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에 비상이 걸렸다. 성 아래 주둔지부터 뉴 로드릭 마을 임시 요새까지 모든 용병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로벨이 류트 공자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고블린은 열 마리 내외이고, 트롤은 한 마리만 목격되었습니다.”

“저, 포병대는 어찌합니까요? 대포도 가져갑니까요?”

“핸드 캐논 소대만 붙여. 맨앳암즈 1소대가 엄호하고.

“스피어 소대 무장 점검해라. 롱 파이크를 왜 가져오냐? 멍청아! 숲이라고!”

갑작스러운 소집이라 혼란이 있지만 펄프 대장 이하 노련한 고참들이 잘 통솔했다. 오히려 통솔이 안 되는 것이 로드릭 시민이었다.

“뭣이여? 또 전쟁이 난 것이여?”

“어디서 쳐들어 왔는가? 북쪽인가? 남쪽?”

“아이고! 우리 영주님은 박복하시기도 하시지!”

울프 용병단이 수십 명씩 모여 늑대성으로 발맞춰 올라가자 덜컥 겁이 난 상인들은 짐 싸들고 성 밖으로 도망갔다. 징발령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상인들이 이탈하자 자연히 어린 집사가 분노했다.

“영주님! 영주님! 영주니이임!”

로벨은 침대에 앉아 서배튼을 신고 그리브를 쪼이다가 움찔했다.

“나, 나 좀 바쁜데?”

“그야 그렇겠죠! 우리 도시 돈줄을 죄다 쫓아내고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도시를 지키는 거야.”

“고작 고블린 몆 마리라면서?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떨 필요 없잖아요!”

로벨은 종아리에 가죽끈을 잘 매듭지어 마무리한 후 상체를 일으켰다. 갑옷을 절반만 착용한 모습이 묘하게 야만적인데, 로벨의 물오른 미모와 합치니 조금 뇌쇄적이기도 했다. 어린 집사는 잠시 말을 잊었다. 로벨은 스커트를 허리에 감으며 말했다.

“전쟁이 날지도 몰라.”

“저, 전쟁이요?”

“생각해 봐. 도반 도트넘 백작이 왜 그런 편지를 보냈을까?”

어린 집사는 우수한 기억력으로 편지 내용을 떠올렸지만 시치미를 떼었다.

“그 작자가 무슨 편지를 보냈죠?”

“바바 야가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잖아.”

“그게 왜요?”

확실히 음모와 모략 쪽으로는 어린 집사도 둔했다.

“바바 야가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괴물이 아니었어. 오히려 힘을 주었지.”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힐끔 보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뭘까?”

“어... 도반 도트넘 백작이 영주님의 적이니까요?”

“그런 유치한 이유로 이간질할 것 같지 않아.”

로벨은 확신 없이 중얼거렸다. 스커트의 고리를 잠그고,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백 플레이트를 챙겨 들자 어린 집사가 쪼르르 달려와 거들었다. 숙달된 기사도 흉갑은 혼자 착용하기 힘들었다.

“그자는 정말로 바바 야가와 만남이 안 좋을 거라 경고한 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에이, 아무리 마도의 수호자라도 예언자가 아닌데요?”

“그건 모르지. 그리고 하나 더 짚이는 게 있어.”

도반 도트넘 백작의 편지에 나온 것은 네 발 달린 마녀만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왕.”

“...그놈의 왕은 몇 명이래요?”

어린 집사가 툴툴거렸다. 포비아 왕국의 왕은 하나뿐인데, 여기저기 왕이 너무 많았다. 로벨은 앞뒤로 꽉 쪼이는 흉갑에 가는 신음을 흘리고 말했다.

“뱀파이어 군주는 죽은 자의 왕을 조심하라고 했고, 대마녀 바바 야가는 왕에 대적할 왕이 되라고 했어. 그리고 수년 만에 몬스터가 출몰했잖아. 이 정도면 군대를 동원하기 충분하지 않아?”

어린 집사가 폴드런을 어깨에 올리며 타박했다.

“그래도 갑자기 병사를 소집할 필요는 없잖아요. 몬스터 토벌이라고 공지하거나, 훈련 핑계로 부르면 영지민도 상인들도 안심할 텐데요.”

“앗, 그렇네?”

요령이 없기는 로벨이 더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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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 앞에 모인 울프 용병단은 임무를 나간 용병과 연락이 안 닿은 용병을 제외한 155명이었다. 당일 소집한 것치고 상당한 숫자였다. 용병들은 무기와 갑옷을 점검하며 구시렁거렸다.

“고작 고블린이라며?”

“트롤도 한 마리 있다는데?”

“제기랄... 돈은 주겠지?”

그러나 로벨이 전신 갑옷을 입고 등장하자 입을 다물었다. 소탈하긴 해도 볼탄 반도의 군주였다. 그런 기사가 완전무장하고 진두지휘하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확인된 것은 고블린 9마리와 트롤 1마리지만, 그 이상일 가능성이 높아. 왜인지는 알지?”

울프 용병단에 들어와 지금껏 살아남았으면 용병경력이 최소 3년 이상이었다. 종이 다른 몬스터가 뭉쳐 다니면 안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혹은 눈치껏 아는 척했다.

“이틀 정도 수색해야 할 거야. 무사히 토벌이 끝나면 술과 고기를 나눠줄게.”

“에이...”

“우우-!”

간이 큰 몇몇 용병이 야유했다.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등이 화냈지만, 로벨은 개의치 않았다. 용병이 무례한 것은 당연했다. 사실 울프 용병단 정도면 점잖은 편이었다.

“물론, 전투수당도 줄 거야. 계약대로 기본금의 1.5배야.”

“오오!”

“와아아!”

기사는 땅에 충성하고 용병은 금화에 충성했다. 3, 400년 정도 지나면 애국심이나 충성심으로 싸울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군인은 결코 대가 없이 싸우지 않았다.

“풋맨 1소대부터 출발해.”

금화에 사기가 오른 울프 용병단은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힘차게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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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가문과 로드릭 시티가 유명해지면서 북쪽 숲은 ‘북쪽의 숲’이라는 지리적 서술에서 ‘북쪽 숲(North Forest)’이란 고유명사로 바뀌어 갔다. 북쪽 숲의 북쪽에서도 북쪽 숲이라 지칭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그러했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끌어안고 한숨 쉬었다. 첫 개시(?)를 하나 싶었는데, 여름 햇살에 흠뻑 젖은 북쪽 숲은 10피트짜리 해비 랜스를 휘두를 공간을 양보하지 않았다.

“병사가 이렇게 많은데 기사님이 싸울 필요 있나요?”

“그건 그렇지만...”

창끝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로벨은 입모양으로 투덜거리고 바바 야가의 창을 아래로 기울였다. 30년 묵은 가문비나무가 항의하듯 잔가지를 흔들었다.

“뭐야?”

로벨은 나무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자 잎사귀가 일제히 몸을 떨었다. 이건 로벨 때문이 아니었다.

“트, 트롤이다!”

쿵-! 쿵! 우직-!

수풀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기어 나왔다. 산 바위가 굴러오는 듯한 무게감에 겁 많은 로시난테 3세가 울음을 터트렸다.

짐승만 아니라 사람도 겁먹었다. 9.5피트에 이르는 키와 절구통 같은 주먹을 마주하면 상대적으로 왜소한 인간은 겁먹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울프 용병단이 정예는 정예였다. 뒷걸음치는 중에도 대열을 유지해 숏 스피어와 울 파이크로 창벽을 형성했다. 눈앞에 뾰족한 가시가 있으면 주저하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트롤은 최소한의 가공으로 완성한 수제 곤봉을 치켜든 채 머뭇거렸다. 일전에 잡아먹은 누릿한 인간과 달리 쇠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매캐한 냄새가 물씬 났다. 불길했다. 아니, 무서웠다.

“젠장! 뭐 저리 커?”

“그리즐리보다 큰 거 같은데?”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인간도 무서웠다. 울프 용병단은 서로 눈짓하다가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오우거 슬레이어로 알려진 고용주, 로벨 로드릭 공작이었다.

‘기사 나리가 잡아주시겠지?’

‘그럼 우리 수당은?’

‘기사 나리가 적당히 패 놓으면 마무리하자.’

신참 용병 사이에서 못된 생각이 오갔다. 로벨을 우습게 본 생각이었다. 로벨을 단순무식한 구닥다리 기사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반만 맞고 반은 거짓이었다. 로벨은 바보가 아니었다. 거리와 장소를 가늠한 후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핸드 캐논 준비.”

겁쟁이 데비가 이끄는 2인 1조 포수들이 거치대를 땅에 꽂고 쇠통을 올렸다. 이름 그대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대포, 핸드 캐논이 준비되었다.

“점화.”

불이 꺼지지 않게 빙글빙글 돌리던 화승을 화약접시에 밀어 넣었다. 치치칙-! 트롤이 겁내는 매캐한 냄새가 극대화되었다. 1초? 1초가 조금 안 될 시간 후 폭음이 터졌다.

콰과광-!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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