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무지
로벨은 바바 야가의 절굿공이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현대의 병장기 중 상당수가 농사 도구에서 비롯되었다. 플레일, 워 사이드, 밀리터리 포크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절굿공이는 조금 곤란했다. 크기와 무게가 있으니 둔기로 쓰면 좋을 듯하나, 무게 균형이 양쪽 모두에 치우쳐 생각만큼 휘두르기 좋지 않았다. 펄프 대장이 고민 없이 제안했다.
“허리를 자르시죠?”
“그럴까?”
로벨은 외팔이 더치한테서 잘 손질된 손도끼를 빌렸다. 기사답게 후진이 없었다. 오직 직진, 돌진, 돌격...
로벨이 도끼를 치켜들자 마녀 키르케가 비명 지르며 뛰어들었다.
“으아악! 안 돼요! 뭐 하는 거예요!”
마녀는 주저 없이 절굿공이를 끌어안았다. 로벨은 마녀의 정수리를 쪼개기 직전에 간신히 손을 놓았다. 손도끼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허풍쟁이의 앞머리를 몇 가닥 자르고 기둥에 꽂혔다. 허풍쟁이는 자지러지며 쓰러졌지만, 자기 일이 아니면 담이 북극 빙하만한 용병들은 한가롭게 도끼날이 살아있다고 품평했다.
로벨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마녀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제가 할 말이에요! 이건 바바 야가의 절굿공이라구요!”
로벨은?로벨 앞에서만-새끼 양처럼 얌전한 마녀가 소리를 빽- 지르자 살짝 당황했다.
“그렇지만, 쓸모가 없잖아?”
“왜 쓸모가 없어요? 마법의 절굿공이인데욧!”
“그야 절굿공이니까...?”
“그럼 외형을 바꾸면 되죠!”
로벨 이하 울프 용병단은 억울했다. 지금 외형을 바꾸는 중이었다.
“여기를 자르면 아쉬운 대로 곤봉으로 쓸 수 있을 거 같아. 두 개가 되니까 하나는 너 줄게. 어때?”
“그건 좀 혹하지만... 안 돼요! 자꾸 까먹으시는데, ‘마법의’ 절굿공이라고요! 기사님은 마법이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사실은 잘 모르지만, 마녀가 설명할 때마다 귀찮아서 이해한 척했더니 모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떡해? 물레방앗간에 줘야 해?”
로벨이 아쉬워하자 마녀가 절굿공이를 휘리릭- 돌려서 깃대처럼 세웠다
“에헤헴!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쓸모 있게 만들어줄게요!”
“그쪽이 말이오?”
펄프 대장이 못 미더운 듯 중얼거렸다.
“제가 이래 봬도 숲의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 드루이드라고요!”
“호른 나으리가 반푼이라고... 그 늙은 마녀도 비웃었고...”
“이익! 모르는 소리!”
마녀 키르케는 절굿공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바바 야가는 옛 신의 신앙이 전해지기 전까지 동방의 신이었어요. 절구를 보세요. 절구는 곡식을 가루 내는 파괴의 도구이며 빵과 약을 만드는 생명의 도구에요. 양쪽에 무게가 실린 모양이 양면성을 상징해요. 삶과 죽음, 낮과 밤, 땅과 하늘...”
울프 용병단 중 농민 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녀의 말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주문이고 마법이었다.
바바 야가의 절굿공이가 반짝반짝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끈한 표면에 빛 반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장마철 곰팡이처럼 퍼져갔다. 마법이 생소한 용병들은 후다닥 뒷걸음쳤다.
“세상에... 진짜 마녀였어...”
“마녀 아니고 마법사라고요!”
로벨을 자주 따라다닌 외팔이, 애꾸눈, 허풍쟁이 등을 제외하면 마녀 키르케가 마법을 쓰는 것을 본 울프 용병단이 없었다. 로벨의 하녀 내지 늑대성의 요리사로 생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죽은 나무가 분명한 절굿공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목에 싹이 나듯 한쪽이 길어지고, 다른 한쪽이 가늘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한 자루의 잘 빠진 해비 랜스가 되어 있었다.
“머, 멋져!”
로벨은 무심코 소리 내었다. 아무도 비웃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손잡이에서 자라난 듯한 원뿔 모양 창대와 묵직하게 무게를 잡아주는 꼬리가 완벽히 균형을 이루었다. 거친 나뭇결 위로 세 가닥의 나뭇가지 무늬가 끊어질 듯 말듯 뻗어 나가 창끝에서 합쳐지는 것이 무기보다 무기 모양의 예술품 같았다.
해비 랜스는 소모성 무기라 이처럼 공을 들여 제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금속이 아니기에 칼이나 도끼하고 느낌이 달랐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받아들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멋진 랜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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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흉갑을 갖춰 입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창 받침대만 있으면 되니 갑옷을 다 입을 필요 없었다. 혀를 쭉 내밀고 낮잠 자던 모닝스타가 주인을 보고 기뻐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조랑말’, 배불뚝이, 로시난테 3세를 씻기던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기겁하면 마구간 밖으로 도망쳤다. 로벨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오는 모닝스타를 다독인 후 속삭였다.
“이거 봐라? 새 창이다?”
“...하다하다 짐승한테도 자랑하시네.”
모닝스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로벨의 뺨을 핥았다.
새 등자를 묶고, 전투용 안장을 얹은 후 사뿐히 올라탔다. 기분 탓인지 갑옷 탓인지 몸이 가벼웠다.
“랜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손을 뻗었다. 마녀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바바 야가의 창을 건네주었다. 그 사이 펄프 대장과 어린 집사가 사격훈련용 허수아비를 가져와 연병장 중앙에 세웠다. 두꺼운 나무판에 지푸라기를 감고 생가죽 갑옷을 입힌 튼튼한 녀석이었다.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상하좌우로 휘둘렀다.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신기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칼끝에 손잡이를 올려도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룰 것만 같았다.
‘그럼 내구성은 어떨까?’
로벨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볼 때 인지의 세계에서 만든 마법의 무기는 파괴되지 않는다. 바바 야가의 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벨과 사람들이 부산을 떨자 구경꾼이 제법 모였다. 고기와 치즈를 가져온 시장 상인, 장작을 쌓는 숲지기 아들, 기름을 떠가는 초장이와 무두장이, 근무 교대하는 용병과 도시락을 싸온 용병 아내 등등이 젊고 멋진 영주님의 묘기를 관찰했다.
로벨은 처음 말을 타고 창을 잡은 14살 철부지 시절을 떠올렸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 집사와 코흘리개 어린 집사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그 시절에 비하면 몸도 마음도 훌쩍 커지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럼 해보자! 히이럇! 히럇!”
로벨은 창 자루로 모닝스타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로벨만큼 신이 난 모닝스타는 가볍게 투레질하고 무섭게 내달렸다. 괜히 명마가 아니었다. 세 걸음 만에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급가속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허수아비를 겨냥했다. 생가죽을 입혔지만 진짜 갑옷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창이 관통하는 것은 당연하니 무게를 덜기 위해서 재빨리 버려야 할 것이다. 로벨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타이밍을 계산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퍼엉-!
창끝이 허수아비에 닿는 순간, 생가죽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지푸라기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어서 팔뚝만한 나무허리가 뚝 부러져 처량히 넘어갔다. 창에 폭약을 넣고 터트린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제법 구른 용병도, 마상시합에 익숙한 상인과 농부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진짜 놀란 것은 로벨이었다. 마법보다 마법 같은 위력에 우선 놀랐고, 가벼워진 창 무게에 다시 놀랐다.
로벨은 오른손을 눈앞으로 끌어올렸다. 10피트 길이의 해비 랜스가 온데간데없고, 한 뼘 길이의 뱀플레이트(Vamplate:해비랜스 손보호대) 아래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일회용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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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다행히 일회용은 아니었다.
악마추종자를 잡으라고 준 무기를 허수아비에 날렸다고 좌절할 때, 조각난 뱀플레이트 사이로 가지가 자라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자빠질 만큼은 아니지만, 양초가 타는 것보단 빠르게 가지가 자라났다. 서로를 꼬면서 조금씩 조금씩 덩치를 불렸다. 어린 집사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뽑으면 어떻게 될까요?”
“안 돼!”
로벨이 결사적으로 새싹을 보호했다. 왠지 뽑아도 다시 날 것 같긴 하지만, 하나뿐인 마법의 창으로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파괴와 창조! 역시! 바바 야가의 절굿공이에요!”
마녀 키르케가 호들갑을 떨며 절구의 상징을 이야기했다. 물론,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창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12시간 뒤였다. 로벨은 아침 세수를 하기도 전에 바바 야가의 창을 살펴보고 활짝 웃었다. 마녀 키르케가 만들어준 모양 그대로 복구되어 있었다.
“정말 멋지잖아!”
로벨은 바바 야가의 창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병장기에 마음이 있다면 여럿 질투했을 것이다.
오늘은 창술에 주력했다.
로벨이 18살에 그랜드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검술 이상으로 창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전(前) 그랜드 챔피언 볼프 사트로 후작을 꺾은 것도 마상창이었다.
시니컬한 사제와 염세적인 부르주아는 ‘꼬챙이로 사람을 떨구는 유치한 스포츠’라 비웃지만, 그들도 막상 창을 든 기사 앞에 놓이면 방광이 제구실을 못해 꼴불견을 보일 것이다. 지금 로벨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앗!”
로벨은 모닝스타 위에서 해비 랜스를 내찔렀다. 랜스 레스트에 손잡이를 얹고 주력(走力)에 의지해 들이박는 카우치드(Couched)만이 랜스 차칭이 아니었다. 보조 장비 없이 겨드랑이에 끼우고 허리와 허벅지 힘으로 휘두르기도 하고, 아예 오른쪽 왼쪽 바꿔가며 찌르기도 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하는 모든 공격이 랜스 차칭이었다.
‘직접 때려보면 좋겠지만...’
로벨은 연병장 구석에 쌓여있는 허수아비들을 힐끔 보았다. 어제저녁 박살난 불운한 허수아비도 함께 있었다. 알뜰살뜰한 어린 집사는 저것도 수리해서 쓸 것이다.
모닝스타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려서 아쉬운 대로 아침 훈련을 끝냈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모닝스타의 안장을 벗겨 간단히 씻기는데, 성문 밖에서 소란이 감지되었다. 이 시간은 로벨의 훈련시간이라 교대로 근무하는 울프 용병단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로벨은 콧등에 주름을 그리며 양동이와 브러쉬를 치웠다. 모닝스타가 왜 씻기다 마냐는 듯 주둥이로 로벨의 엉덩이를 꾹꾹 찔렀다. 로벨은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 소란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영주님을 뵙게 해주시오! 시급한 일이오!”
“허어, 이 양반이 아침을 잘못 잡쉈나? 우리 나으리가 댁네 촌장 아저씨인 줄 아나?”
“돈!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겠소! 내 아내와 아이의 목숨이 달려있단 말이오!”
“돈 같은 소리 하네. 정 뵙고 싶으면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하시오.”
억양과 차림새를 보아 로드릭 시민이 아니고, 외지에서 온 상인 같았다. 이 성이 볼탄 반도 공작의 성이란 사실도 모르는 듯 했다. 로벨은 기사의 도량을 보이고자 헛기침하며 다가갔다.
“내가 늑대성의 주인...”
목소리가 좀 작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외지의 상인이 흥분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거나.
“내 아내가 괴물에게 잡혀갔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오! 제발 영주님을 알현하게 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