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9화 (309/605)

309화. 절구

오전 업무가 끝나자 호른 경이 말한 마법사가 찾아왔다. 로벨은 지긋지긋한 숫자에서 벗어나 기쁜 마음으로 홀에 내려갔다.

고대부터 마법사는 불길한 존재로 여겨졌고, 옛 신의 교단이 득세한 이후에는 사악한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마법이 가진 신묘한 힘을 부정할 수 없기에 정말 독실한 가문이 아닌 이상 거래하는 마법사 하나쯤은 있었다. 당장 마녀 키르케만 해도 로드릭 가문의 마법사로 알려져 있었다.

“존엄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벨은 영주의 의자에 앉아 머리 숙이는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악마추종자도 보고, 하얀 숲의 드루이드도 보고, 샘 포클 왕성의 마법사도 보았지만, 이자는 무언가 달랐다. 우선 외모가 특이했다. 눈과 코를 가리면 예순 넘은 노파 같고, 입과 귀를 가리면 중년 아저씨 같고, 목소리는 변성기가 찾아온 소년 같으며, 몸짓은 젊고 아름다운 처녀 같았다. 전체적으로 종잡을 수 없었다.

“어서 와.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너를 소개해 주었어.”

“그렇지 않습니다.”

“응? 아니야?”

로벨이 당황해서 되묻자 마법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주름살만 아니면 여염집 처녀로 여겼을 것이다.

“요정의 기사는 자신이 찾아왔다고 믿겠지만, 진실은 제가 원해서 찾아간 것입니다.”

“음... 그럴 수 있지.”

로벨은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제 발로 늑대성에 온 것은 사실이니, 저 정도 자존심은 인정해줄 수 있었다.

“그럼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왕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것이 마법사의 본분이지요.”

“난 왕이 아니야.”

로벨은 호칭을 정정해주었다. 볼탄 반도 공작이면 사실상 일국의 왕이나 진배없으니 오해할 만했다. 샘 포클 이전에는 수많은 제후들이 칭왕하였으니, 역사와 정치를 배운 적 없는 사람들은 공작(Duke)과 후작(Marquess)이 왕의 또 다른 호칭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로벨은 마법사의 수준이 의심되었지만, 호른 경의 체면을 생각해서 계속 질문했다.

“네 발 달린 마녀 바바 야가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럼요. 물론입니다.”

로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허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분해졌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집사는 순진무구한 로벨이 의심이란 것을 하자 기뻐했다.

“그 마녀에 관해서 이야기해줘.”

마법사는 무릎 꿇은 자세가 불편한지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 동쪽 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마녀입니다.”

“그리고?”

“새의 발이 달린 오두막에서 살며, 수시로 집을 옮겨 다니지요.”

여러 번 들은 말이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발이 진짜 발이야? 그러니까 상징이나 장식물 같은 게 아니고?”

“예. 진짜 발입니다. 살아있는 집처럼 걸어 다닙니다.”

마법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안 있고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어린 집사는 신경이 쓰였지만 마법사의 기행이라 생각하고 꾹 참았다.

“계속 말해봐.”

“마법의 절구통을 가지고 있어서 절굿공이를 휘저으면 하늘을 날고, 낮과 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정말 동화 같아.”

로벨이 중얼거리자 마법사가 또다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요정이 마법의 검을 선물하고, 사신이 친구를 납치하는 것도 동화 같지요.”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경계했다.

“악의는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널 오늘 처음 보았잖아? 네가 어느 지역, 어느 가문 출신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라. 그런 널 믿어야 할 이유가 뭐야?”

“제가 세상에서 바바 야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벨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35년 짬밥의 펄프 대장이 부하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일전에 당한 바가 있어서 ‘마법사’라 하면 일단 해치울 방법부터 강구했다. 기둥 사이로 크로스보우에 얹어진 쿼럴이 반짝였다.

로벨은 그 모습을 봤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의심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로벨의 질문에 제자리를 돌던 마법사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제가 바로 바바 야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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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이 정예라 하지만, 개개인이 뛰어난 무사거나 훌륭한 사냥꾼은 아니었다. 애당초 우수한 군인의 자질은 싸움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심이 좋고 인내심이 강하며 명령에 잘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 울프 용병단은 최정예였다.

“ㅆ, 쏴...!”

마법사가 마법을 부렸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용병이 없었다. 로벨 내지 펄프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격통제 훈련을 빡세게 시킨 보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저리들아! 이럴 땐 알아서 쏴야지!’

...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 떠올랐고, 지금 당장은 메인 홀을 채운 네 발 달린 오두막에 정신을 빼앗겼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면 놀랍기보다 황당할 것이다. 늑대성이 작은 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검은 성이나 장미성처럼 으리으리한 성도 아니었다. 기둥이 빽빽한 메인 홀에 오두막이 들어오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에 마법이었다.

“이게 무슨...?”

로벨을 포함한 늑대성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의 닭다리였다. 뜬금없지만 탓할 수 없었다. 세 갈래로 갈라진 발가락에 토실토실 살이 오른 장딴지를 보면 누구나 닭다리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낮과 밤을. 주관하는. 동토의 여신. 바바 야가다.”

로벨은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기묘한 다리 위에 집이 올라가 있었다. 큼직한 대문도 있고, 네모난 창문도 있고, 기울어진 지붕과 앙증맞은 처마도 있는 진짜 ‘집’이었다.

“저걸 참... 어쩌지...?”

일단 칼을 빼들긴 했는데 난감했다. 똑같은 덩치라도 사람이나 짐승이면 찔러보겠는데, 누가 봐도 그냥 집이라 칼질하기가 이상했다.

먼 훗날의 자유민이 고상한 기사의 시대를 조롱하기 위해 풍차에 랜스 차징하는 이야기를 지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어느 기사가 건물에다 병장기를 휘두를까. 머리가 시켜도 몸이 무슨 짓이냐며 거부했다.

기사와 용병이 머뭇거리자 보다 못한 마녀 키르케가 나섰다.

“거짓과 모순은 재미없는 장난! 내 앞에서 사라져라!”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창처럼 휘두르며 소리쳤다. 늑대성의 모두가 마녀의 늠름한 주문에 집중했다. 그러나 쓸데없이 호른 경의 말이 맞았다. 바바 야가가, 네 발 달린 오두막이 산드러지게 웃었다.

“어리고 나약한 마법사야. 너의 주문은 간지럽기만 하구나.”

마법의 힘은 상상하고 자각하는 힘, 인지의 힘이었다. 압도적인 존재감-닭다리 오두막-을 뿜어내는 바바 야가 앞에서 그 존재감을 지우거나, 그 이상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떤 마법사가 와도 지금의 바바 야가의 마법을 깨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설적인 바바 야가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동방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약점일 것이다.

“마법이 안 되면 물리력이죠! 가라! 용감한 늑대들아!”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난감해했다. 자신이 용감하다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체고가 상당한 오두막에 덤비는 것은 어려웠다. 크로스보우를 겨냥하고도 어디를 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창문을 쏠깝쇼?’, ‘나무창인데? 그보다 부뚜막이 약점 같지 않냐?’ 애초에 마녀 키르케에게는 지휘권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펄프 대장이 그 점을 지적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마녀 키르케에게는 지휘권이 있었다. 두 명, 아니, 두 마리뿐이지만 사랑과 우정과 고기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릴 자격이 있었다.

“컹! 컹컹!”

“크르르르릉-!”

아야와 이야카가 2층 계단을 날듯이 내려와 오두막에 달려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명령하지 않아도 닭다리처럼 생긴 오두막 다리가 몹시 탐스러워 알아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느, 늑대! 늑대가 왜 여기에...!”

오두막의 크기와 비교하면 아야와 이야카는 생쥐 사이즈에 불과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두막이 뒷걸음쳤다. 상황을 묘사하는 명사와 동사의 연결이 어색하지만, 사실이었다. 오두막이 도망쳤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붕붕 돌리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바바 야가 전설에 따르면! 바바 야가는 숲의 짐승을 무서워하죠! 우리 귀염둥이가 생긴 것은 귀염귀염해도 토종 늑대라고요!”

어린 집사가 로벨 뒤에서 뛰쳐나와 소리쳤다.

“거짓말!”

“뭐가요?”

“쟤네는 용감하지 않잖아요!”

용감한 늑대를 불렀는데 아야와 이야카가 나왔으니 잘못되었다. 로벨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인정.”

닭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으르릉거리는 아야와 이야카가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바바 야가의 마법이 깨졌다. 전설을 바탕으로 한 마법은 전설에 나오는 공격에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늑대성의 용적을 무시하던 오두막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리 풀린 바바 야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제 와 보니까 여든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파였다. 영생을 살아가는 마도의 수호자에게 나이는 무의미하지만, 생김새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옆으로 치우고 말했다.

“괜찮아? 안 다쳤어?”

전설적인 대마녀 바바 야가는 새파란 어린 마녀에게 당한 것이 부끄러운지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대한 왕이여, 노파의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하셨나이다.”

“으응? 시험이야?”

로벨은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로벨보다 겁이 많고 죽고 사는데 민감한 용병들은 헛소리를 더 하기 전에 제압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영리한 어린 집사도 적극 동의했다.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주위를 빙글빙글 돈 것이 마법을 위한 수작이었음을 알았다.

‘네 발 달린 오두막을 상상하게 하고, 크기를 부풀리는 사전 준비였어!’

어린 집사는 확인을 위해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좀 멋있죠? 하지만 너무 반하지 말아요!’

어찌 되었든 대마녀 바바 야가가 떠들게 두어서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울프 용병단은 사람을 닥치게 하는 스물아홉 가지 방법-혀를 잘라내거나, 기도에 구멍을 내거나, 폐를 쇠꼬챙이로 지지는 등등- 중 가장 온건한 방법을 골라 재갈을 준비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바바 야가가 먼저 움직였다.

“늙은 괴물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소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왕이여, 왕은 왕이기에 왕입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한 말과 똑같았다. 마법사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인가 싶을 때 바바 야가가 이어 말했다.

“그렇기에 왕에 대적할 수 있는 것도 왕으로 태어난 자뿐입니다.”

“그러니까, 난 왕이 아니라니까.”

로벨이 살짝 짜증을 담아 말했다. 바바 야가는 노인처럼 홀홀 웃었다.

“마법사의 왕도 진짜 왕이 아니지요.”

엉뚱한 왕이 거론되자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악마추종자의 대장쯤 되는 자 같은데, 대체 누군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것은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입니다.”

바바 야가가 앙상한 옷가지에서 무언가를 뽑았다. 저 작은 몸에 어찌 숨겼는지 의심스러운 나무토막에서, ‘아, 마법이구나?’ 싶어지는 나무막대로 바뀌었다. 아니, 그냥 나무막대가 아니었다. 앞뒤로 묵직하고 가운데가 가느다란 나무막대,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굿공이였다. 마녀 키르케가 늑대성의 모두를 대표해 놀랐다.

“바바 야가의 절구에요!”

로벨은 무심코 절굿공이를 받았다. 크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익숙한 무게감이었다. 흐룬팅을 처음 휘둘렀을 때, 파나케아 투구를 처음 착용했을 때와 똑같았다.

“왜 나한테...”

바바 야가는 눈길을 돌려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저 아이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로벨도 덩달아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마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바바 야가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거짓과 모순은 재미없는 장난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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