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8화 (308/605)

308화. 한계

매의 눈.

사자의 심장.

사슴의 다리.

포클랜드 검술학회 현관에 새겨진 문구였다. 의미 그대로 검술가가 가져야 하는 자질, 혹은 재능이었다.

로벨은 검술학회에 등록된 7명의 롱소드 마스터 중 하나였다. 마스터라 해서 급료가 나오거나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예롭기는 했다.

로벨이 소드 마스터 자격증을 딴 것은 18살 때였다. 그때도 충분히 강한 기사였지만, 육체가 완성되고 실전 경험이 쌓인 지금은 1대 1로 당해낼 기사가 없었다. 평복 대결이라면 2~3명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추고 덤비면 좀 어렵지만...

‘그렉 페럿 경.’

로벨은 흐룬팅을 곧게 세우고 최강의 기사를 따라 했다.

그림 리퍼, 늑대의 왕, 더스틴 폴라 경 등등 수많은 강자와 만났지만, 검술만 보면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 그렉 페럿 경이 최고였다. 하지만 메서 계통 기술이라 가벼운 흐룬팅으로 따라 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로벨은 자세를 바꾸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

로벨에게 타이틀을 뺏기기 전까지 최강이라 불려온 포비아 왕국 전(前)그랜드 챔피언이었다. 완력과 패기만 보면 그렛 페럿 경 이상이었다. 정교함이 조금 떨어지지만...

‘쥬드 맥켈런 남작.’

기왕 과거로 돌아간 김에 옛 챔피언을 떠올렸다. 기술만 보면 그렉 페럿 경보다 노련한 기사였다. 전성기 때 만났으면 지금의 로벨이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한 기사가 작고 외진 섬에서 해적이나 소탕하며 일생을 보낸 것이 안타까웠다.

로벨은 숨을 깊이 토해낸 후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창보다 짧고, 도끼보다 약하고, 철퇴보다 무르지만, 찌르고, 베고, 때리기가 모두 가능한 전천후 무기가 검이었다.

로벨은 칼끝을 치켜 올려 가상의 공격을 빗겨낸 후 갓난아기 주먹만한 폼멜로 턱을 쪼개주었다. 뒤로 한걸음, 좌로 반걸음 이동하며 턱을 잡고 낑낑대는 적을 비스듬히 베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를 활용해 파고드는 적을 밀어붙였다. 몸통 박치기라 하면 우습지만, 체중을 실어 부딪치는 강철 폴드런은 어지간한 바위보다 강력했다.

기습에 실패한 적은 1피트쯤 붕 떠서 나자빠졌다. 로벨은 부츠 끝의 꼬챙이를 훤히 드러난 사타구니에 박아준 후 흐룬팅을 한 바퀴 돌려 중단세로 잡았다. 칼에 베인 것보다 끔찍한 비명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공포가 퍼졌지만, 로벨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제 남은 적은 바짝 긴장해서 포위를 형성했다. 워 해머, 배틀 액스, 숏소드와 버클러를 가진 적이 세 방향에서 좁혀왔다. 로벨은 포위를 뚫기 위해 제일 왼쪽 워해머를 타깃으로 잡았다. 조금씩, 조금씩 왼쪽으로 몸을 옮기다가, 벼락같이 파고들어...!

“우와아악-!”

가상의 적과 가상의 무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로벨은 재빨리 칼끝을 끌어당겼다. 어린 집사가 물통을 방패처럼 올리고 비명 질렀다.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줘요!”

“...무슨 잘못?”

로벨은 흐룬팅을 치우며 물었다. 어린 집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로벨과 훈련장을 번갈아 보고 안도했다.

“느, 늦게 와서 잘못했다고요!”

“죽을 만큼 잘못한 것은 아니야.”

로벨은 흥건하게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털어냈다. 여름이 가까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샘솟았다. 어린 집사는 비명 지른 게 무안한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죽일 것처럼 칼부터 들이미는데 안 놀라겠어요? 무슨 훈련이 그리 과격해요?”

“오늘은 다섯 명이라서...”

로벨이 개떡같이 말해도 어린 집사는 찰떡같이 이해했다.

“그게 효과가 있어요?”

“그럭저럭?”

“누구누구였어요?”

“싸움개 닥스, 미치광이 존, 코골이 바디, 발냄새 베커, 피리 부는 쟝.”

로벨의 상상 속에서 찔리고, 베이고, 터진(?) 용병들은 성 아래에서 근무서다 움찔했다.

“조금 전 기술은 이름이 뭐에요?”

“이름?”

로벨은 의아해했다. 칼질에 이름을 붙이자니 망치질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큼이나 우스웠다.

“...이름이 있어야 하나?”

머리치기, 손목베기, 손잡이 때리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마구잡이에 가까웠다. 빈틈이 보이면 눈도 찌르고, 무릎도 차고, 낭심도 때리는데, 자세나 동작을 생각하며 싸우는 사람은 없었다.

로벨이 실전의 복잡함을 설명하자 어린 집사가 질색했다.

“에이, 야만적이야.”

로벨은 빙그레 웃으며 수건을 받았다. 얼굴과 팔을 닦고 머리에 얹은 채 중얼거렸다.

“목말라.”

“목욕물 준비했어요. 거기서 드세요.”

물을 주면 머리에 부어버리니 안 가져온 모양이다. 로벨은 투덜거리며 훈련용 무구를 챙겼다.

@

예전에는 침실로 물을 길어와 씻었지만, 늑대성에 사람이 많아지고, 물동이를 옮기는 것도 일이라 로벨과 어린 집사 외에 들어갈 수 없는 지하창고로 옮겼다.

일부 용병들은 우물가에서 안 씻고 굳이 물을 길어가는 것을 의아해했는데, 어린 집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로 일축했다.

“우리 영주님은 뜨거운 물이 아니면 못 씻어요. 물을 끓일 화덕이 있어야 하거든요.”

“역시 귀족 나리!”

“하긴, 공작님이면 그 정도 사치는...”

귀족은 몸에 흐르는 피 색깔도 다르다고 믿는 작자들이라 쉽게 납득했다. 하지만 지하창고에 화덕 따위는 없었다. 불이 나면 전 재산이 날아가는데, 그런 위험한 것을 사용할 리 없었다.

로벨은 옷가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허리춤까지 채워진 물동이에 발가락을 살짝 담갔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여름이라 다행이야.”

로벨은 한숨을 쉬고 조심조심 나무욕조에 몸을 넣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다.

“갈아입을 옷은 왼쪽에 있어요!”

어린 집사가 문밖에서 소리쳤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씻는 것을 돕고 했는데, 나이를 먹더니 자주 내외했다. 로벨은 조금 서운했다.

로벨은 욕조 안에 웅크리고 앉아 물을 머리와 어깨에 끼얹었다. 세간의 거친 묘사와 달리 피부가 고왔다. 햇볕을 쬔 적이 없어 투명하리만큼 하얬다. 어깨가 널찍하고, 등근육이 오밀조밀하며, 이두근과 삼두근이 지나치게 발달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아름다웠다. 선천적으로 키가 크고 팔다리가 날씬한 덕분이었다. 늑대성에서 로벨보다 키가 큰 사람은 외팔이 더치와 호른 경 뿐이었다.

‘호른 경...’

로벨은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쇠냄새에 익숙해져서 분냄새는 기억나지 않고, 브레와 쇼오스가 편해져서 쉬르코는 입어본 적이 없었다.

‘나한테 어울릴까?’

로벨은 고깔 모양의 에냉을 쓰고 비단으로 짠 쉬르코를 입은 채 남자와 팔짱 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욕조 물에 머리를 담갔다.

‘어울리지 않아.’

로벨이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장시간 침묵하자, 어린 집사가 심심한지 말을 걸어왔다.

“그 마녀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자주 거론하는 마녀는 늑대와 뒹구는 철부지 마녀지만, 지금 마녀는 달랐다.

“...아니.”

로벨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도 골치 아픈데, 네 발 달린 마녀까지 등장해서 걱정이 많았다.

“그 마녀는 또 무슨 꿍꿍이일까?”

늑대의 왕처럼 패악무도한 자일지, 뱀파이어 군주처럼 역사를 흔드는 자일지, 그림 리퍼처럼 음흉한 관망자일지, 요정왕처럼 호기심 많은 참견꾼일지 알 수 없었다. 마도의 수호자라 해도 목적과 성향이 제각각 다르니 평범한 인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더스틴 폴라 경이 잘 알지 않을까요? 동향이잖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로벨은 머리에 물을 한 바가지 끼얹고 일어났다. 아침이 밝고 하루가 시작되었다.

인지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하나, 현세에 쌓인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마녀가 찾아올 거야.”

“아까부터 그 말을 했잖아요?”

“그 마녀 말고. 착하고 이쁜 마녀 말이야.”

로벨은 못 봤지만, 어린 집사의 얼굴이 여름 햇살처럼 달아올랐다.

“기사님! 집사님! 아침 준비 끝났어요!”

그때 마침 마녀 키르케가 냄비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로벨은 새 옷을 입고 나오다 어린 집사의 빨간 귓불을 보고 그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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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젖은 머리를 비벼서 말리며 메인 홀 식탁에 앉았다. 춘경지에서 보리수확이 시작됐지만, 식탁에는 하얀 밀빵과 와인이 메인으로 올라왔다. 작년 가을 비축분부터 소비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난 보리빵이 좋은데...”

“그 딱딱하고 시꺼먼 게 뭐가 좋아요? 남들은 밀이 없어서 못 먹는데!”

“보리가 소화가 잘된다고...”

아야와 이야카에게는 돼지 앞다리가 하나씩 주어졌다. 어린 집사는 묽은 잼을 바르다가 눈초리를 치켜떴다.

“사람은 맛대가리 없는 빵 쪼가리 먹는데, 저 개 같은 것들이...!”

“뭐라고요?”

마녀 키르케가 국자를 움켜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 집사는 움찔해서 변명했다.

“개 같다는 것은, 욕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거 말고요! 내 요리가 맛이 없어요? 굶을래요? 굶고 싶어요?”

“아, 그쪽이 화난 거예요?”

어린 집사는 로벨에게 도와 달라 눈짓했다. 하지만 로벨은 굶고 싶지 않았기에 외면하고 빵을 찢어 입에 욱여넣었다. 몸을 쓰고 목욕을 마친 후라 투정과 달리 식욕이 돌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의 투닥거리는 소리, 아야와 이야카의 뼈 갉아먹는 소리, 장작 갈라지는 소리, 기름 타는 소리가 어우러진 늑대성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주군, 계십... 이런, 식사 중이셨군요.”

평소에 없는 소리가 등장했다. 로벨이 반색하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호른 경?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로벨과 달리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불청객을 본 것처럼 뚱했다.

“호른 경은 영지 관리 안 해요? 맨날 놀러 와요?”

“저 기사님은 엄청 한가한가 봐요. 일거리 왕창 줘버려요.”

호른 경은 호가호위하는 소년소녀를 잠깐 노려보고 호랑이를 향해 웃었다.

“사악한 마녀를 걱정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주 좋은 마법사를 물색했습니다.”

“마법사?”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여기 있지 않으냐는 의미였다. 마녀 키르케는 옆구리에 손을 얹고 콧대를 세웠다.

“저 반푼이 마녀를 어찌 믿습니까? 진짜 마법사를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요! 그리고 반푼이 아니거든요!”

시선이 어린 집사에게 집중되었다. 믿기지 않지만, 어린 집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와아... 집사님...”

마녀 키르케가 양손을 모으고 감격했다. 어린 집사는 새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 화를 냈다.

“그, 그러니까, 마녀가 좋은 말은 아니잖아요? 영주님 앞에서 할 말이 아니죠! 마녀를 데리고 있으면, 거시기, 영주님이 뭐가 되어요? 그렇잖아요? 마녀 말고 마법사라고 하자고요!”

그리고 수습이 안 되자 후다닥 도망갔다. 아야와 이야카가 컹컹 짖으며 뒤쫓아 가고, 마녀 키르케가 아침은 먹고 가라고 소리쳤다.

“응. 응응. 좋을 때야.”

로벨은 청춘남녀를 응원하고 호른 경에게 자리를 권했다.

“식전이면 같이 먹겠소?”

“아, 감사합니다.”

호른 경은 암탉을 잡아 푸짐하게 먹고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기꺼이 한 끼 더 먹기로 했다.

로벨은 산발한 머리카락을 모아 슬그머니 묶었다.

“그 마법사는 어디 있소?”

호른 경은 로벨의 새하얀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어제저녁에 연락이 닿았으니, 오늘오후 중에 볼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렇소? 신경 써주어 고맙소.”

“주군께 봉사하는 것이 기사의 본분 아닙니까.”

로벨과 호른 경은 깨작거리며 빵을 쪼갰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조잡한 행동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한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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