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4화 (304/605)

304화. 황금평야

백작이라 해도 실상은 시골 족장이라 대부분 세력이 크지 않았다. 과거에는 찬란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몰락한 백작도 많았다. 왕이 임명한 영주(남작)보다 비루한 토박이 영주(백작)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영지가 작다거나 성이 초라하다고 비웃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그래도 무례 좀 범하겠소.”

로벨은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이런 곳을 거점으로 삼을 수 없소.”

로벨의 언사가 과격하다 말할 사람은 없었다.

성(城)이라고 불러야 할 것은 외풍이 덜 드는 외양간이고, 성벽이라 여겨야 할 것은 발로 차면 쓰러질 썩은 울타리였다. 성문, 아니, 대문은 누가 훔쳐가서 휑하니 비어있고, 우물 하나 덩그러니 있는 앞마당은 추위에 바스러진 노란 잡초로 뒤덮여있었다. 이런 곳이 성이면 자작나무 숲 오두막은 요새였고, 하얀 숲 오두막은 궁궐이었다.

“본인도, 본인도 이 지경일 줄은 몰랐소.”

흑태자도 억울했다. 웨스텅 백작령은 증조할머니에게서 상속받은 땅으로 사실상 작위만 계승했을 뿐이다. 반세기 동안 관리한 적이 없으니 망가질 때로 망가진 것은 당연했다.

“안 망가졌어도 초라하긴 마찬가지지만...”

영지민도 많지 않았다. 100명? 150명? 집 안에 숨어있는 여자와 아이를 합쳐도 200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겨울을 겨우 버틴 가난한 농민들이라 징발할 것도 없었다. 저들이 가진 곡식을 전부 모아도 울프 용병단 하루 끼니도 안 될 것이다.

호른 경이 꾸역꾸역 올라오는 각 제후의 병사들을 보며 속삭였다.

“백악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성벽을 부수고 성채에 불을 질렀는데 말이오?”

“그래도 여기보단 나을 겁니다.”

군대는 철저히 소비하는 집단이다. 식량을 소비하고, 무기를 소비하고, 생명을 소비한다. 그런 점에서 군인은 불과 닮았다. 태우고 태우고 태우다가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으면 재가 되어 흩어진다. 불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화덕이 필요하듯, 군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거점이 필요했다. 거점이 없으면 제멋대로 번지고, 흩어지고, 파괴하다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백악성은 안 되오. 그곳은 물러날 곳이 없으니까.”

더불어 잉그비아 왕국 내부로 진격하기도 힘들었다. 사태를 파악한 기사들이 모여 빠르게 의논했다.

“차라리 린딘 시티로 진군하시지요. 지금까지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적은 준비가 덜 될 것을 거요.”

“어허? 에디즈 자작, 지금 주군께 도박을 권하는 거요?”

“내일 저녁, 늦어도 모레 아침이면 후속부대가 도착합니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다음으로...”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이 열을 올리자 흑태자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말을 잃었다. 고향에 온 것은 좋은데, 죄지은 객장이라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게 낫겠군.”

로벨이 입을 열자 쫑알쫑알하던 볼탄 반도 기사도, 눈치 보던 잉그비아 왕국 기사도, 내 알 바냐 하품하던 용병들도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흑태자를 돌아보았다.

“4, 5천의 병사가 주둔할 장소가 있소?”

에드워드 3세가 아니라 흑태자에게 물은 것이 의미심장했다. 흑태자는 잉그비아 왕국의 차기 주인답게 술술 말했다.

“엘리엇 영지, 길포드 영지, 헤이스팅스 영지라면 가능하오. 하지만 수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오.”

“엘리엇 영지? 혹시 로버트 엘리엇 백작의 땅이요?”

“그자를 아시오? 이런, 멍청한 질문이군. 검은 숲에서 싸웠지.”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꼬면서 생각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게 재미난 생각이 있는데, 도와주겠소?”

“본인이? 무엇을 말이오?”

로벨은 말없이 웃었다. 흑태자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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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연합군 2천 명이 엘리엇 영지로 진격했다.

100여 명의 기사와 20문의 대포가 이동하니 숨기는 것이 불가능한 행군이었다. 고르곤 공작의 정보원과 지방 영주들은 발 빠르게 린딘 시티로 소식을 전했다.

“도베른에 이어서 엘리엇까지 빼앗기면 왕국의 남쪽을 전부 내주게 되오! 반드시 막아야 하오!”

사흘째 계속된 긴급회의가 새로운 국명을 맞이했다. 싸우느냐 마느냐는 진작 건너갔다. 언제, 어디서 싸우느냐가 관건이었다.

잉그비아 국왕 존 2세라 자칭하는 하이랜드의 고르곤 공작은 반백의 콧수염을 쓸어 올렸다.

잉그비아 왕국인은 깔끔한 인상을 좋아해 수염을 길게 기르지 않는데, 고르곤 공작은 보기 드물게 수염이 풍성했다. 혹자는 머리숱이 적은 것을 수염으로 만회한다 하고, 혹자는 왜소한 체구 탓에 위엄이 살지 않아 수염에 힘쓴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옛 신과 고르곤 공작만 알았다.

“엘리엇 백작.”

고르곤 공작의 호명에 모든 시선이 회의장 구석으로 향했다.

“백작은 로벨 로드릭 공작과 겨뤄보았지. 어떻소? 우리가 이길 수 있겠소?”

엘리엇 백작은 침음을 삼켰다.

본디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다. 검은 숲에서 패배하고 막대한 몸값을 지불했다. 면목이 없어서 말을 아끼고자 했으나, 왕이 직접 물으니 도리 없었다.

“...어렵습니다.”

엘리엇 백작이 입을 열자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이 비난을 보냈다. ‘겁쟁이!’, ‘늙은 두더지!’, ‘썩 꺼져라!’ 고르곤 공작은 비난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늑대 공작이 그리 대단한가?”

“우리군은... 볼탄 반도, 검은 숲, 그리고 백악성에서 3번 싸워 3번 패배했습니다.”

자잘하게 따지면 9번 패했지만, 그것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겨두었다.

“확실히 실력은 있다는 것이군. 흐음... 그럼 백작의 생각은 어떻소? 백작의 영토를 그대로 넘겨줄 것이오?”

엘리엇 백작은 비웃음을 머금은 기사들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엘리엇 성은 반드시 사수해야 합니다.”

“늑대를 이길 수 없어도?”

“이기지 못한다 하여 지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엇 백작이 천천히 가슴을 폈다. 비난을 쏟아붓던 기사들이 주춤하며 말을 삼켰다.

“제 고향이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엇 성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100명의 정병이면 1,000명의 적을 능히 막을 수 있으니, 로벨 로드릭 공작이라도 쉬이 넘지 못할 겁니다.”

고르곤 공작이 계속 말하라는 듯 눈짓했다.

“원정군의 고질적인 문제는 보급입니다. 열흘을 버티면 식량이 바닥나고, 보름을 버티면 무기가 바닥나니 그 전에 퇴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게 군사를 지원해주시면 성을 사수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기회를 엿보다 지친 늑대의 숨통을 끊으십시오.”

고르곤 공작은 수염 끝을 위로 올리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리 말해야 나의 기사지! 좋소! 쉐필드 백작, 노리치 백작, 첼름 남작은 로버트 엘리엇 백작을 지원하시오! 더불어 철사자 용병단과 까마귀 용병단을 붙여주겠소! 검은 숲의 패전을 설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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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비아 왕국 수도 린딘 시티에서 남서쪽으로 22마일 지나면 드넓은 평야 지대가 나온다. 안개 강이 굽이쳐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여름에는 보리가, 가을에는 호밀이 황금빛으로 물결쳤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진짜 이름을 잊고 황금평야라 속삭였다.

“쏴라! 쏴라! 계속 쏴라!”

“사다리를 노려라! 아처! 아처! 사다리 겨냥해!”

그러나 올해는 색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안개 강은 핏물로 오염되고, 보리싹은 철갑에 짓밟혔다. 기름과 화약이 휩쓸고 간 땅에는 앙상한 재가 휘날렸다. 지금의 광경을 보면 핏빛평야, 혹은 시체평야라 불러야 마땅했다.

“포비아 왕국군이 물러납니다!”

“우와아아! 적이 퇴각한다! 퇴각한다!”

로버트 엘리엇 백작은 떨리는 손으로 롱소드를 꽂아 넣고 바이저를 올렸다. 지치고 피곤했다. 그러나 벅찬 감정이 피로를 억눌렀다. 기쁨? 안도? 만족?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첼름 남작이 성탑 위에서 큼직한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엘리엇 백작! 우리가 이겼소! 적들이 물러나고 있소!”

엘리엇 백작은 여장을 짚고 서서 적을 살폈다. 이성의 한 자락이 의심을 부추겼다. 이틀 전에도 저리 물러나는 척하다가 추격이 없자 재차 공격해 왔다. ‘영악한 놈...’ 엘리엇 백작은 적의 깃발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기사도, 땅바닥에 주저앉은 병사도 내심 불안한지 안개 강 남쪽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진짜였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 후퇴했다. 닷새간 이어진 줄기찬 공격이 마침내 끝났다.

“엘리엇 백작, 승리를 축하하오.”

엘리엇 백작은 여장에서 손을 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수천의 대군을 이끌고 오만하게 휘날리던 로드릭 가문의 깃발이 선명했다.

엘리엇 백작은 들뜬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겨우 한 번 이겼을 뿐이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첼름 남작 얼굴에 미소가 옅어졌다. 그러나 정작 엘리엇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기쁨을 억누르기에는 승리가 너무 달콤했다. 검은 숲의 패배를 딛고 마침내 승리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오늘은 기뻐해도 되겠지.”

첼름 남작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피칠갑한 기사와 병사들이 다시금 환호했다. 잉그비아 왕국의 첫 승리였다. 그리고 앞으로 승리만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개 강 북쪽에서 처참한 몰골의 린딘 시티 기사가 소리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엇 백작! 엘리엇 백작! 성문을 여시오! 성문을 열어주시오!”

승리의 함성 속에서 못난 기사의 외침은 처량했다. 그 가냘픈 소리가 엘리엇 백작 귀에 들리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 필요했다.

엘리엇 백작은 기사 종자의 도움을 받아 플레이트 아머를 벗다가 기사를 맞이했다.

“아니, 무슨 일이오? 브롬턴 경이 왜 이곳에 온 것이오?”

기사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22마일을 쉬지 않고 달려와 성 밖 병사들과 드잡이를 한 탓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브롬턴 경은 경이로운 정신력으로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당장 병력을 보내시오!”

“병력을 보내? 어디로 말이오?”

“린딘 시티로! 린딘 시티가 위험하오!”

엘리엇 백작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사가 가슴을 쥐고 악을 썼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2천의 후속부대를 이끌고 린딘 시티를 공격 중이오! 도시가 함락되고! 화이트 타워가 위태롭소!”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대포와 비슷했다.

“그, 그럴 리가? 그자는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소! 우리와 싸우는...”

엘리엇 백작은 지난 나흘간의 전투를 되짚었다. 지금 생각하니 로벨을 보지 못했다. 로드릭 가문의 깃발만 보았을 뿐이다.

“아아... 옛 신이시여...”

로벨 로드릭에게 또다시 당했다는 생각에 앞이 까매졌다. 엘리엇 백작은 기사 종자를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전 병력을 집합시키시오! 린딘 시티로 가야 하오!”

전투수당을 협상하기 위해 찾아온 철사자 용병대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 엇? 지금 말입니까?”

“그렇소! 지금 당장! 수도를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오!”

엘리엇 백작은 잉그비아 왕국에서 손꼽히는 명장이 분명했다. 승리 후 늘어진 병사를 순식간에 정비하여 린딘 시티로 회군을 시작했다. 평범한 기사는 흉내 낼 수 없는 부대 장악력이었다. 샘 포클의 환생, 성 마르틴의 재래라 불리는 로벨 로드릭이 적이 아니었으면 이처럼 쉽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엘리엇 백작은 로벨 로드릭 공작에게 패배했다. 그 사실은 린딘 시티 남쪽 장로 강 다리를 3마일 앞두고 깨달았다.

“...뭐라고?”

“뭐가 뭐라고요? 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지 묻지 않소이까! 존 2세 폐하를 배신한 것이오?”

죽기 살기로 도우러 온 군대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린딘 시티가... 함락되어서... 로드릭 공작의 군대가...”

엘리엇 백작은 3살짜리 꼬마처럼 횡설수설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고르곤 가문 기사의 경멸스러운 표정을 무시하고 다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브롬턴 경! 브롬턴 경은 어디 있나!”

이미 짐작한 것처럼 브롬턴 경은 보이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의 수도 린딘 시티는 안전하고, 고르곤 공작도 안전했다. 그러나 드넓은 황금평야를 다스리는 엘리엇 성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데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작군이 엘리엇 성을 점령했습니다! 다시 보고합니다! 로벨 로드릭과 흑태자 에드워드가 엘리엇 성을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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