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3화 (303/605)

303화. 백악성

촤아아- 촤아아-

8척의 함대가 북해를 가로질렀다.

선수가 높고 선루가 큼직한 3마스트의 무장카락이 파도를 가르면, 선체가 길고 선폭이 날렵한 7척의 갤리어스가 바람을 따라 쫓아갔다. 서로의 항해를 방해하지 않는 거리, 그러나 유사시 바로 지원할 수 있는 간격으로 흩어져 검푸른 바다를 항해했다.

멀리서 보면 웅장함을 넘어 장엄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고통과 공포와 악취가 가득했다.

한 배에 평균 300명이 탑승했으니, 발 뻗을 공간도 부족했다. 콩나물처럼 빽빽한 선실에서 누군가 뱃멀미로 게워낸 토사물을 베고 잠들 때면 노잡이 노예가 부러울 정도였다.

그런 고통도 바다가 주는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다가 무서운 것은 태풍이나 암초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물이었다. 끔찍하게 많은 물이 공포였다.

‘여기서 습격 받으면 꼼짝없이 죽겠지...?’

옛 신이 선물한 상상력이 악마의 저주가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초대형 갤리선을 운영하는 에르나 왕국과 비교할 수 없지만, 잉그비아 왕국도 ‘제법’ 해상강국이었다. 바다 위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해상전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로벨은 바다사자 호 선교에서 밤을 꼴딱 새웠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교대로 찾아와 말렸지만 잠시도 쉬지 않았다. 구멍 난 가죽 망토를 두르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만 내려가세요. 잉그비아 왕국군이 나타나면 바다사자 남작님이 상대하겠죠. 까놓고 영주님 맥주병이잖아요? 아니면 뭐, 배 몰 줄 알아요?”

100번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을 가진 18살 이후 10년 동안 전쟁을 치러왔다. 그러나 오늘처럼 부담되는 전쟁은 없었다.

로벨의 명령으로 2천 명이 넘는 선원과 병사가 북해를 건너고 있었다. 풍랑, 암초, 화재, 질병 등등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길이었다. 무사히 상륙해도 그곳은 낯선 땅, 낯선 나라였다.

로벨은 네 자릿수의 목숨을 무겁게 실감 중이었다.

“첫 원정이라 그래요.”

어린 집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로벨은 자신보다 자신을 잘 아는 오래된 친구를 돌아보았다.

“첫 원정?”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싸우긴 했지만, 결국 포비아 왕국이었죠. 말로 달리면 수일 안에 집에 갈 수 있는 옆 동네요. 그러니 여차하면 부대를 해산하고 살 길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 생각한 적 없... 진 않아.”

다시 말하지만, 로벨보다 로벨을 잘 아는 어린 집사였다. 허세는 바람에 실어 날려 보냈다.

“지금 가는 곳은 다르죠. 바다를 건너니까 도망갈 곳이 없죠. 게다가 2천+2천해서 총 4천 명의 목숨을 챙겨야 하고요. 영주님이 아니라 누구라도 부담이 될 거예요.”

“그래... 그렇지?”

로벨이 슬며시 웃었다. 난 사실 겁쟁이가 아닐까 걱정했다. 그 걱정이 기사답지 못해서 부끄러웠다. 어린 집사가 힘차게 끄덕였다.

“그럼요! 샘 포클도 이런 일은 못 했어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요. 우리 영주님은 유라피아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요.”

어린 집사의 말이 맞았다. 첫 원정전쟁이었다. 걱정되고 부담되는 것은 당연했다.

“응. 고마워.”

그래서 로벨은 그날 저녁 잉그비아 왕국의 하얀 절벽이 보일 때까지 선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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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일어났다.

좋은 일은 잉그비아 왕국 해군과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최대한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시작한 군사작전이라 잉그비아 왕국의 명령체계가 따라오지 못했다. 혹은 고르곤 공작의 해군 장악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쁜 일은 상륙 즉시 잉그비아 왕국 지상군과 마주친 것이다. 정확히는 하얀 절벽의 도베른 백작군이었다.

로벨은 긴 항해로 짜증이 난 모닝스타를 다독이며 하얀 절벽을 보았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까 훨씬 아름다웠다.

석회가 많은 땅이라 온통 하얀색이었다. 해안의 모래사장도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불과 150야드 떨어진 곳에 장벽처럼 늘어선 해안 절벽도 하얀색이었다.

시야가 닿는 끝에서 끝까지 하얀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로벨의 군대가 잉그비아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듯했다.

‘진짜 우리를 막는 것은 저들이지.’

하얀 절벽 위에 깃발이 펄럭였다. 숫자만 보면 200명이 안 되는데, 지형이 안 좋았다. 하얀 절벽에서 가장 높은 곳은 300피트에 이르렀다. 중간중간 경사가 완만한 곳이 있지만, 그곳도 수레를 끌고 넘기에는 충분히 험난했다.

‘저 위에서 화살을 쏘면... 곤란한데...’

로벨은 모닝스타에 안장을 얹고 가죽끈을 쪼이며 고민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회하는 것이다. 하얀 절벽은 잉그비아 섬 남쪽 12마일에 걸쳐 있었다. 자연히 방비가 소홀한 곳도 있었다.

“주군, 하선이 끝났습니다.”

약 2천의 병력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기뻐했다. 특히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고향에 돌아온 기쁨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했다.

“공작, 이곳은 오래 머물기 좋지 않소.”

단 한 사람, 새까만 갑옷을 입고 새까만 전투마를 탄 흑태자만이 오늘보다 먼 곳을 보았다.

지금은 잉그비아 왕국군이 수적 열세라 얌전하지만, 봉신을 소집하고 전열을 정비하면 내일이라도 공격해 올 것이다. 그 전에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로벨은 잉그비아 왕국 상인이 구해준 지도를 떠올리며 말했다.

“웨스텅 영지가 가깝다고 들었소. 그곳으로 갑시다.”

웨스텅 백작령이 거론되자 웨스텅 백작 흑태자가 당황했다.

“그곳은 좀...”

“북해안에서 멀지 않다고 들었는데... 아니오?”

“웨스텅 성으로 가려면 도베른 백작령을 지나야 하오.”

로벨은 하얀 절벽 위에 포진한 도베른 백작군을 힐끔 보았다. 솜씨 좋은 궁수면 활을 쏘아 맞힐 수 있는 거리와 높이였다.

‘바람 때문에 안 되나?’

로벨은 유난히 강한 해양풍에 감사했다. 뱃멀미를 일으켜 다수의 용병을 녹아웃 시켰지만, 그래도 악명 높은 잉그비아 롱보우는 막아주었다.

“그럼 도베른 백작령을 공격합시다.”

로벨과 흑태자는 첫 번째 목표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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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드 멕켈런 남작이 왜 이곳을 상륙지점으로 삼았는지 의아했는데, 해안을 따라 걷다보니 납득이 되었다.

하얀 절벽은 옛 신이 만든 자연 요새였다. 12마일의 해안 중 바다와 절벽의 폭이 10야드가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일렬로 서서 발목을 적시는 해안가를 지날 때면 머리 위가 오싹오싹했다. 대포와 투석기를 동원할 필요 없이, 적당히 크고 둥근 바위만 굴려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그나마 처음 상륙한 해안이 안전한 장소였다.

3, 4마일 쯤 행군하자 깎아질 듯한 절벽이 한결 무난해지고, 초승달 모양 만(灣)에 항구가 나타났다.

“저곳이 도베른 백작의 성이오. 잉그비아 왕국의 첫 관문이기도 하지.”

인구가 3천이나 될까 싶은 작은 도시였다. 포비아 왕국과 교역도 하지만, 고기잡이가 좀 더 주된 생업이었다. 그 증거로 바닷가에 작은 어선이 줄지어 있었다.

“돈이 안 되겠는데...”

외팔이 더치가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째려보자 찔끔해서 딴청을 피웠다.

“우선 성을 점령해야 해. 그리고 흑태자의 웨스텅 성으로 가자.”

로벨은 옹기종기 모인 민가 너머로 우뚝 솟은 백악성(白堊城)을 보았다. 이름과 달리 화강암으로 만들어 회색빛이었다. 석회석으로 성벽을 쌓으면 부실하니까 당연했다.

“성을 포위해. 새벽에 총공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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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련이 많은 새벽별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쪽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렸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좋은 선물을 주었어.”

로벨은 아무 생각없이 중얼거렸다. 로벨의 고운 턱선을 감상하던 호른 경이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지만, 크고 요란한 굉음에 묻혀버렸다.

“Fire!”

콰과과쾅-! 콰콰쾅-!

산 넘고 바다 건너온 2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매캐한 화약연기가 시야를 가렸다가 차디찬 북풍에 밀려 시가지 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거운 것도 있었다. 오우거 주먹만한 돌덩이가 어스름을 가르고 150년 묵은 성채를 두드렸다. 유화적인 표현이었다. 성벽 위에 병사들 의견을 들으면 ‘박살냈다’ 내지 ‘깨부쉈다’고 말할 것이다.

로벨이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소?”

이번에는 제대로 들렸다. 호른 경은 겁먹은 자신의 전투마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외성은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1시간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겁쟁이 데비의 포병 중대가 안쓰러워졌다.

“화약을 아끼지 말고 계속 쏘시오.”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쭉였다. 병력 소모를 줄인 대신 페닝이 왕창 소모되었다.

로벨은 기왕 말머리를 돌린 김에 도베른 시티를 내려다보았다. 겁먹은 시민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었다. 봇짐을 싸들고 도시 밖으로 피난하는 일가족도 드물게 보였다.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약탈을 승인했다. 재물은 둘째 쳐도, 먹을 것과 불을 피울 자재가 필요했다.

“이곳을 점령하는 즉시 웨스텅 백작령으로 갈 것이오.”

그곳은 흑태자의 땅이니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Fire!”

열 번째인지 열한 번째인지 가물가물한 포격이 시작됐다. 저 멀리서 겁쟁이 데비가 포신을 식히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보고했다. 로벨은 한껏 달아오른 대포를 살피지 않았다.

“그만 쏴도 되겠어.”

“예?”

로벨은 손가락으로 백악성을 가리켰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성벽 한 구간이 와르르- 주저앉았다. 기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오오! 역시 주군이십니다!”

“공작님께서 성벽을 무너트렸다!”

로벨은 기막힌 타이밍에 떨떠름해서 손가락을 치웠다. 본래 가리킨 것은 성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백기(白旗)의 기사였다. 호른 경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첫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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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연합군의 승리소식이 잉그비아 왕국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큰 충격이었다. 고르곤 공작은 3개 섬 12개 지방에 소집령을 내렸으나, 내전으로 피폐해진 기사들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호른 경의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백악성이 함락된 지 사흘이 지났으나 고르곤 공작 휘하에 모인 병력은 고작 2천 명이었다.

“이걸로는 싸울 수 없어!”

“아아! 존 2세가 나라를 망치는구나!”

“류트 프란시스, 류트 프란시스, 류트 프란시스... 이자가 어쩌자고 사자의 코털을...”

잉그비아 왕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좌절하는 시각, 재미있게도 로벨 역시 좌절 중이었다.

“...이게 성이오?”

솔직히 말해 백악성을 보았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포비아 왕국 기준으로 그저 평범한 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웨스텅 성을 보는 순간 평가를 조정해야 했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짚고 헐떡이듯 말했다.

“백악성은 정말 대단한 성이었네요.”

“커험! 험!”

흑태자가 말조심하라는 듯 헛기침했지만 아무도 새겨듣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 주둔하게 될 웨스텅 성은 ‘성’이라 부르기가 민망했다. 로벨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성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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