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2화 (302/605)

302화. 오산

로벨은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총 맞은 것보단 낫지만, 맨바닥에 나자빠진 몸이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꽁지머리 아래에 엄지만한 혹이 나 있었다.

“류트 프란시스... 진짜...”

로벨은 욕설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호른 경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로벨은 자꾸 몸을 더듬는 어린 집사를 뿌리치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마법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소.”

저주가 통하지 않으니 불가피하게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한 모양이다.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소집 중이에요.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나 봐요.”

로벨은 늑대성의 유일한 마법 전문가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많이 아파요? 진통제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면 두통약? 배탈약?”

마녀 키르케는 전문가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벨은 우선 사람을 진정시켰다.

“얼굴 찌푸리지 마. 걱정할 거 없어. 난 아무렇지 않아.”

“기사 나리...”

그리고 상황을 정리했다.

늑대성 근무자를 제외한 울프 용병단을 숙영지로 돌려보냈다. 몇몇은 고집부려서 끝까지 남았는데, 굳이 말리지 않았다. 늦게까지 주방 일을 도운 여인들에게 은화 한 닢씩 쥐여 주고 남은 음식을 싸가도록 허락했다. 먹을 것이 귀한 계절이라 고개 숙여 고마워했다.

사람들이 떠나고, 고기냄새와 화약냄새가 사라지자 겨울밤의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저녁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로벨은 텅 빈 메인 홀에 앉아 생각했다. 오늘 일이 아니라 내일 일을 생각했다. 호른 경이 그런 로벨의 생각을 읽었다.

“이걸로 명분이 생겼군.”

“무슨 명분이요?”

로벨이 걱정되어 훔쳐보던 어린 집사가 물었다. 호른 경은 귀찮다는 듯 힐끔 보고 대답했다.

“흑태자와 손잡고 고르곤 공작과 싸울 명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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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정확히는 로벨의 대리인 호른 경은 포클랜드 시티와 린딘 시티를 향해 항의편지를 무차별 발사했다. 그러는 동시에 볼탄 반도 제후들에게 볼탄 반도 공작 로벨 로드릭이 잉그비아 국왕의 사절 류트 프란시스에게 비겁하고 비열하고 치졸하고 야비한 피습을 당하였노라 퍼트렸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국왕과 포클랜드 귀족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펄쩍펄쩍 뛰었다. 여섯 차례에 걸쳐서 해명하는 편지를 보내고, 위로품을 가장한 뇌물을 보내왔다.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분노했다. 로벨을 존중해서 분노하는 기사도 있지만, 볼탄 반도의 자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분노하는 기사가 더 많았다. 막말로 공작까지 암살하는데, 일개 기사인 자신은 어찌 대하겠는가.

로벨은 류트 공자가 흘리고 간 아쿼버스를 힐끔 보았다. 까마귀 성의 도너반 자작이 쓰는 것을 본 적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작고 정교했다.

“이거 꽤 비쌀 텐데...”

“영주님 몸값에 비하면 싸구려죠.”

로벨은 화승을 꽂고 방아쇠를 당겼다. 기계장치가 맞물리며 용두(龍頭)가 앞으로 밀려났다. 불이 없어서, 그리고 화약 접시가 비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본 원리는 쇠뇌하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벨은 방아쇠를 몇 번 당기다가 흥미를 잃었다. 대포를 좋아하지만, 직접 다루는 것은 별로였다.

“가질래?”

“저요! 저요! 제가 가질래요!”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로벨은 아쿼버스를 반 바퀴 돌려 손잡이를 내밀었다. 호른 경과 애꾸눈 볼포스가 아쉬워했지만 모른 척했다. 대포는 불을 다루는 마녀에게 어울렸다.

로벨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고쳐 묶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충분히 했다. 준비도 철저히 했다. 남은 것은 행동이었다.

“잉그비아 왕국을 치자.”

로벨의 깜짝 선언에 어린 집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엥? 포클랜드가 아니고요?”

“응. 잉그비아 왕국을 칠 거야.”

로벨은 자신만만한 척 눈치를 보았다. 똑같은 전쟁이라도 외국과 싸우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바다를 건너는 것부터 큰 난관이었다. 그러나 호른 경, 펄프 대장, 애꾸눈, 외팔이 모두 심드렁했다. 외팔이야 아무 생각이 없으니 그렇겠지만, 그 외 사람이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역시 그렇군요.”

호른 경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로벨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알고 있었소?”

“쥬드 맥켈런 남작에게 전함을 맡기고 대포와 화약을 모으셨지요.”

“포클랜드와 싸울 생각이면 훈련된 말을 준비했을 테지요.”

“영주님 성품상 검은 숲 공작 부탁이라 해도 국왕 폐하에게 칼을 겨누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로벨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속마음이 낱낱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어린 집사가 어이없어서 따져 물었다.

“그럼 검은 숲은? 제임스 공작은 어쩌고요?”

로벨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포클랜드의 겁쟁이들 발목을 잡아줄 거야.”

“아... 아앗...!”

“브릭 자작에게 충분한 용병을 보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로벨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고르곤 공작을 끌어내리고, 에드워드 3세가 왕권을 잡으면 포클랜드와 검은 숲의 갈등도 끝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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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겨울은 겨울 같지가 않았다.

열흘에 한 번꼴로 눈이 내렸지만 생각만큼 많이 쌓이지 않았다. 개울과 해자도 잠깐 어는 듯하더니 며칠 안 가 졸졸 소리 내며 녹아내렸다.

봄이 찾아왔으나 감흥이 없었다. 농사짓는 사람보다 장사하는 사람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전쟁의 불안감이 컸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서 싸우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래?”

그리고 따가운 눈총에 화급히 도망갔다.

로벨은 모두가 좋아하는 영주님이고, 로벨이 거느린 울프 용병단은 정다운 이웃이고 오래된 친구였다. 실제로 몇몇 용병은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기도 했다.

“잉그비아 왕국이면, 거시기, 바다 건너의 야만족 나라 아닌감?”

“그런 곳까지 가서 싸워야 하나... 좀 너무하네...”

“어허! 우리 영주님이 죽을 뻔했다잖은가! 그걸 그냥 두면! 어엉? 다음에 또 그 지랄을 할 텐데! 지금 우리 영주님 보고 죽으란 게냐!”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로드릭 시티가 다른 영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징집이나 징발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간의 징세는 하겠지만, 생활에 어려움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이상한 쪽으로 걱정이 치우쳤다.

“우리 영주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하는데...”

“옛 신이시여, 우리 나으리를 지켜주소서.”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가로저었다.

걱정이 많은 영지민과 달리, 울프 용병단과 볼탄 반도 기사들은 한껏 달아올랐다. 전쟁이 항상 그렇지만, 전공을 세우고 재산을 불릴 기회였다.

“외국이니까 약탈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그런 못된 생각을 하다니! 나랑 통하는 걸?”

옛 신의 사제가 좋아하지 않을 기회였다.

전쟁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로벨의 전함과 쥬드 맥켈런 남작의 전함이 사트로 항구에 소리 없이 모였다. 무장카락 1척과 갤리어스 7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었다. 선원 숫자만 300여 명이었으니 포비아 왕국 기준으로 대형선단이었다.

“그래봤자 오베리아 갤리선 한 척 수준이잖아요.”

어린 집사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에르나 왕국의 막강한 해군전력과 비교하면 우스웠다.

“괜찮아. 상륙만 하면 되니까.”

해상전력은 다소 빈약해도, 육상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작군 2,280명, 에드워드 3세 병력 112명, 쥬드 맥켈런 남작군 255명,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하인즈 가문 등에서도 병력과 병참을 지원하여 총 3,888명이었다.

과거 아이언베어 요새 전투 때 8천 명이 동원된 적 있으나, 그것은 왕국 전체에서 소집한 경우고, 제후 한 명이 단독으로 일으킨 군사규모로는 유례없었다.

“고르곤 공작의 병력은 5천이 채 안 될 겁니다.”

“그것 밖에 안 돼요?”

“그것도 많이 남은 거지.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은 제외한 거니까.”

로벨의 말대로 상륙만하면 승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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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로, 동부대로, 늑대도로를 통해 볼탄 반도의 군대가 속속 북해안에 집결했다. 이쯤되자 더 이상 숨길 것도, 속일 것도 없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잉그비아 왕국으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유라피아 대륙 전역에 퍼져나갔다. 전쟁의 목적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가 합류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이랜드 고르곤 공작, 혹은 잉그비아 국왕 존 2세의 척살이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의 암살미수건도 슬쩍 붙었다.

겨울의 자취가 남아있는 북해는 거칠고 매서웠다. 파도가 4, 5피트 높이로 치며 얼음 같은 물방울을 뿌렸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이 있다면, 수영을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계절에 바다에 빠지면 익사하지 않아도 동사했다.

“...이걸 건너간다고?”

북해안에 모인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장엄했다.

200여 개의 깃발이 북풍에 휘날리는 가운데, 고딕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들이 늠름한 전투마를 타고 일렬로 도열하고, 장창과 쇠뇌로 무장한 병사들이 자로 잰 듯 질서정연하게 사열했다. 무기의 종류와 갑옷의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거리’와 ‘방향’을 통일한 것만으로 일체감이 있었다. 이 광경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고참 용병과 기사 종자의 목이 쉬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아무튼, 볼만한 광경이었다. 멀리서 훔쳐보고 있을 포클랜드와 잉그비아 왕국의 첩자는 기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벨 로드릭 연합군도 신나지는 않았다. 막상 북해의 거친 파도를 마주하니 겁이 났다. 바람이 잔잔한 날인데 이 정도면, 평소에는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얌마! 우리 선조들은 조막만한 배를 타고 수시로 넘나들었어! 뭔 놈의 걱정이 그리 많아?”

“청옥성의 해적놈들이 배를 몰 거다. 게네는 눈 감고도 돛을 다루는 바다 귀신들이다. 안심해라. 물에 빠질 일 없다.”

“고작 이틀이야. 이틀만 눈 딱 감고 있으면 황금과 미인이 가득한 잉그비아 왕국이야. 포기할 거야? 포기하면 사형인데?”

베테랑 용병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기를 고취시켰다. 효과가 있었다. 로벨이 승선을 명령할 때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타고 부대를 앞뒤로 시찰했다. 로벨이 준비한 8척의 배로 4,000명 가까운 인원을 전부 태울 수 없었다. 불가피하게 2천 명씩 나눠서 가야 했다.

‘지금이 최대의 위기야.’

고르곤 공작이 희대의 바보가 아닌 이상 각개격파를 시도할 것이다. 2천 병력으로 함대가 왕복하는 4일을 버텨야 했다.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아.’

로벨은 무장카락 ‘바다사자’ 호에 오르는 흑태자를 보았다. 거점도 없고, 지형도 모르지만, 잉그비아 왕국의 명장 흑태자 에드워드가 있으니 해볼 만했다.

‘웨스텅의 백작이라니까. 그쪽에 성 하나쯤 있겠지.’

미리 말하자면,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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