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깃발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곳도 다른 법이다.
볼탄 반도 공작이 되자 예전에는 알지 못한 것이, 혹은 알아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 세세하게 보였다. 그중 하나가 포클랜드 귀족들의 아집과 횡포였다.
“왜 또 저래?”
로벨의 심정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었다.
사실, 볼탄 반도는 국왕과 포클랜드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정복왕이 말년에 정복해 자치권을 많이 부여한 이유도 있고, 기사들이 사납고 거칠어 상종을 기피한 이유도 있었다. 오늘날의 로벨 로드릭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검은 숲은 달랐다. 역사로 보나 인구로 보나 면적으로 보나 작고 만만했다. 검은 숲 해방전쟁 이후 무능력한 기사들이 다스리는 곳이란 딱지까지 생겼다.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그래도 정도가 지나쳤어.”
콧대 높은 포클랜드 기사들 사이에서 검은 숲 출신 기사들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조롱이지만, 그렇게 뿌리내린 경멸과 무시는 무의식에 스며들어 공개적인 자리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제임스 공작이 보호하는 에드워드 3세 국왕을 포클랜드 시티로 '압송'하라는 요구가 그중 하나였다.
“제임스 가문을 모욕한 거야. 제임스 깃발에 충성하는 검은 숲의 기사들을 모욕한 것이고.”
로벨은 제임스 공작이 깨트린 술병이 몇 개일지 추리했다. 포클랜드 전령한테 집어 던지고, 기사들한테 설명하다 화가 나서 집어 던지고, 잠들기 전에 생각나서 집어 던졌을 테니 최소 3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목을 축이다 울화통이 터졌으면 최대 4병이었다.
“지금 술병이 중요해요? 그리고 흑단성은 청동제 술병을 써요.”
“아, 그래?”
로벨이 찌그러진 술병으로 바꾸다가 그만두었다. 아야와 이야카를 등받이 삼아 땅바닥에 앉은 마녀 키르케가 졸린 표정으로 말했다.
“포클랜드와 고르곤 공작님. 그리고 검은 숲과 에드워드 3세 임금님으로 나뉜 건가요?”
“응. 그럴 것 같아.”
로벨이 심각하게 대답했다. 마녀 키르케는 하품을 크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기사님은요?”
“나?”
“기사님은 누구 편이에요?”
마녀 키르케는 언제나 그랬듯 핵심을 짚었다. 로벨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자세가 조금 삐딱해졌다. 그리고 머릿속도 조금 삐딱해졌다.
“그건 두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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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가을 추수와 추경에 신경 쓰는 사이 포클랜드와 검은 숲 사이에서 복잡한 신경전이 오갔다. 바람을 타거나 바람을 가르는 짐승으로 달려도 열흘이 걸리는 머나먼 볼탄 반도까지 전해질 정도니 심각성은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 사정에 관심이 없는 볼탄 반도 주민은 다른 것에 집중했다.
“영주님! 영주님! 풍작입니다요! 풍작이에요!”
찰드 촌장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귀족에게, 그것도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작에게 하는 말본새치고 경박했다. 권위의식이 골수까지 차있는 기사라면 채찍으로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은 무심하게 쳐다보고 말았다.
“응! 방앗간이 바쁘겠어! 촌장이 잘 좀 살펴봐!”
로벨은 웃으며 마주 소리쳤다. 늑대성의 주인이 이러니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고지식한 기사들은 천박한 무지렁이를 그리 대하면 안 된다고 불평하지만, 젊은 기사들은 약자를 보살피는 참된 기사의 모습이라고 칭송했다.
“늙은 기사들의 말도 일리 있어요. 인간이란 짐승은 강자한테 비굴하고 약자한테 잔인해서 얕잡아 보이면 집어삼키려고 들어요. 영주님이 만만해지면 세금을 안 내고 몰래 사냥도 할 거예요.”
어린 집사가 모닝스타 옆에 붙으며 말했다. 로벨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따라오는 기사들을 힐끔 보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렇다고 항상 무섭게 굴 필요는 없잖아? 범죄를 저지르면 그때 엄하게 처벌하면 돼.”
어린 집사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리가 자리라 깊이 따지지 않았다.
로벨은 볼탄 반도 각지에서 올라온 로드릭 가문 기사들과 함께 로드릭 시티를 순회했다. 로드릭 시티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 겸 볼탄 반도의 위용을 자랑하는 축제였다.
“이처럼 훌륭한 도시를 세우다니, 공작의 위명은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오.”
“이런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어 영광이오. 나의 주인을 대신해 감사드리오.”
국왕 폐하의 사절과 잉그비아 왕국 영사가 조심스럽게 축하했다. 로벨은 퍼레이드를 따라오는 꼬마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대답했다.
“추수제를 겸해서 3일간 마상시합과 사냥대회를 개최할 것이오. 두 분도 편히 즐겨주시오.”
기사를 소집하고, 용병을 행진시키는 것은 오직 두 사람 때문이었다.
로벨은 로드릭 가문의 힘과 볼탄 반도의 저력을 과시했다. 국왕 폐하의 사절과 잉그비아 왕국 영사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성 한 채 무게를 내는 기사와 용병이 행진했다.
늑대성의 재정은 어느 때보다 풍족했다. 로벨이 털어온 해적의 보물, 잉그비아 왕국 기사의 몸값, 볼탄 반도 곳곳에서 올라온 세금, 그리고 예년 같지 않은 풍작으로 어린 집사가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추수제를 가장한 제2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도 개최할 수 있었다.
포클랜드와 잉그비아 왕국 대표들은 거들먹거릴 줄만 아는 흔해빠진 기사가 아니었다. 로벨이 왜 자신들을 초대했는지 120% 짐작하고 있었다.
‘섣부른 짓 하지 말라는 건가?’
로벨이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과 절친한 사이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로벨은 검은 숲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임스 공작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싸울 때 만사 제쳐두고 달려왔다. 이 정도면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었다.
‘검은 숲을 위협하면, 이 군세를 몰아 포클랜드와 잉그비아를 치겠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 20%가 초과 되었다. 그렇게 오해해주면 좋지만.
두 귀빈의 근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가을축제가 시작되었다. 유흥거리가 거의 없는 농민들에게 추수제와 토너먼트는 최고의 축제였다. 술과 고기가 무제한으로 제공되니 웃고 마시고 싸우고 사랑하기 좋았다.
“왜 초가을 출생자가 많은 줄 아시오?”
“...알고 싶지 않으니까 닥쳐라.”
울프 용병단 소속 초병이 올 초에 완공된 성벽 위에서 중얼거렸다. 시장 전체가 떠들썩한 가운데 시가지에서 떨어진 곳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안 그래도 재미없는 초소근무가 평소보다 재미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교대나 했으면 좋겠소.”
“그래도 못 논다. 3일간 비상근무야.”
“거 몰래 나가면 되지. 술 좀 마신다고 죽나.”
“외팔이 소대장한테 걸리면 진짜 죽어.”
울프 용병단에 입단한지 3년 차가 된 나름 고참 용병이 노을 진 서녘을 향해 하품하다가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 저거 뭐지?”
그 말에 올해 새로 온 신참 용병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호기심보다 심심함이 더 컸다.
“사람... 말...?”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로드릭 시티를 향해 손짓하는 듯하더니 위로 길쭉해졌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커다란 말을 탄 기사였다. 신참 용병이 불안한 듯 속삭였다.
“종을 쳐야 하오?”
“기다려.”
마상시합에 참가하러 온 떠돌이 기사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일로 소란을 피우면 책임은 둘째 치고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참병의 조심성은 옳았다. 정체 모를 기사는 제자리에서 서너 바퀴 돌더니 태양을 따라 떠났다.
“뭐지? 정말 떠돌이인가?”
멀리서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곳은 떨떠름하고 찝찝했다. 용병들은 고민하다가 고민을 떠넘기기로 결정했다.
“펄프 대장한테 말하자.”
“흠. 급료 많이 받는 사람이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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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2회 연속 로드릭 시티 챔피언’이란 야무진 꿈은 어린 집사의 감시와 호른 경의 비협조 속에서 무산되었다.
여러 국왕의 손님을 초대해놓고 호스트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이유로 충성스러운 호른 경조차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로벨의 비밀 출정을 로드릭 시티의 깜짝 이벤트로 여기는 로드릭 시민들은 이름이 생소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 기사를 지목하며 저들 중에 우리 공작님이 있을 거라 상상했다.
“시합이 끝나면 실망하겠는데요.”
“그럼 좋죠. 그래야 3회째 영주님이 출정하면 깜짝 놀라죠.”
마녀 키르케가 마녀처럼 눈을 뜨고 말했다.
“헤... 기사님이 출정하는 거 반대하는 게 아니군요?”
“가만 생각하니까 나쁠 거 없더라고요. 기사들도 좋아하고, 시민들도 좋아하고, 상금도 안 나가고...”
“마지막 이유가 진짜 이유 아니오?”
펄프 대장이 피식-피식- 웃으며 늑대성으로 들어왔다. 어린 집사는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돌아봤다가 관뒀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늙어 보이는 펄프 대장인데, 오늘은 5년 정도는 더 늙어 보였다.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두드러졌다.
“울프 용병단은 어때요?”
“불만이 많소.”
울프 용병단은 축제에 참가하지 못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도시 외곽에 경계를 세우거나 치안유지에 투입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작년까지는 영지민과 울프 용병단을 화합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했다.
“이제 시골 추수제가 아니니까요. 오늘 방문한 외지인이 2천 명이에요. 누군가 통제해야죠.”
“300명 전부 굴릴 필요는 없잖소.”
“올해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내년 추수제에는 교대로 근무하게 해줄게요.”
펄프 대장은 벽난로 앞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뻐근한 왼쪽 다리에 불을 쬐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어린 집사의 판단이 옳았소.”
“제 판단은 항상 옳지만, 새삼스럽게 인정한 이유가 궁금한데요?”
“성 밖을 돌아다니는 불순한 무리가 있소.”
어린 집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포클랜드? 장미성? 강철성? 아니면 잉그비아 왕국인가요?”
“...그렇게 열거하니까 적이 참 많소.”
펄프 대장은 긴장감 없이 웃었다.
“무슨 적? 펄프 대장, 사이좋게 좀 지내.”
그때, 로벨이 하품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주인이 등장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펄프 대장은 앉은 채로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했고, 어린 집사는 잠자기 전에 머리를 말리라고 잔소리했다. 마녀 키르케가 아야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펄프 대장이 아니라 기사님 적이래요.”
“내 적? 누군데?”
펄프 대장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손을 저었다.
“적이 아닙니다. 그냥 불순한 무리지요.”
“그게 그거잖아요. 지금 장난해요?”
어린 집사가 기어이 한마디 쏘았다. 로벨은 소수 의자를 끌어와 펄프 대장 옆에 앉았다. 벽난로의 열기로 머리카락을 말릴 생각이었다.
‘음... 좋은 냄새...’
얼결에 로벨 옆자리를 차지한 펄프 대장은 코를 벌렁거렸다. 귀족은 역시 냄새부터 다른 듯했다.
“어디서 봤어? 숫자는? 위험해?”
펄프 대장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고했다.
“개울 건너 1.2마일 떨어진 곳입니다. 숫자는 30에서 40명인데, 깃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벨은 깃발이란 말에 힐끔 돌아보았다. 용병 무리나 도적떼가 아니었다.
“어느 가문이야?”
펄프 대장은 근 30년 경력의 베테랑 용병이었다. 시골 기사의 깃발까지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어지간히 규모 있는 기사 가문은 쉽게 알아보았다.
“에드워드 가문의 깃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