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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96화 (296/605)

296화. 기름

로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등장한 더스틴 폴라 경을 멍하니 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보다 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강철성 몰래 고이 보내주려고 피해왔는데, 하필 피한 자리에서 딱 마주쳤다.

“더, 덩굴성에 머물고 있지 않았소?”

로벨의 실수였다. 더스틴 폴라 경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본인의 거취를 어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시오?”

더스틴 폴라 경은 롱보우를 어깨에 비스듬히 걸고 안장에서 컴포짓 보우를 꺼냈다.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이 화급히 로벨 주위로 모였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아바레스터들은 시위를 장전하기 위해 생난리를 피웠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을 암살하려고 한 암살자였다. 웃으며 마주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 볼탄 반도의 주인이시니 사방에 눈과 귀가 있겠지. 이해했소.”

아쉽게도 로벨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빙그레 웃었다. 석상이 웃는 느낌이었다.

“저자를 쫓아왔소.”

뭇 시선이 화살 맞은 괴물에게 돌아갔다. 괴물은 괴로운 듯 꿈틀거렸다. 화살이 아주 안 좋은 곳에 박힌 탓이다.

“저것은... 저자는 무엇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컴포짓 보우에 화살을 걸고 괴물을 향해 쏘았다. 거리가 가까워 겨냥할 것도 없었다. 쏘는 족족 괴물 몸뚱이에 꽂혔다. 그때마다 괴물의 몸이 들썩거렸다. 인간이라면 진작 쇼크가 왔을 테지만, 괴물은 쉬이 죽지 않았다.

“강철성에서 보낸 자객이오.”

“자객? 사람이 아니잖소?”

“주인이 사람이 아니니까, 아랫것도 사람이 아니겠지.”

로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아는 것이 확실했다.

여섯 발을 쏘고 일곱 발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을 때, 마침내 괴물의 숨통이 끊어졌다.

“주인의 정체가 무엇이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컴포짓 보우의 시위를 풀며 뚱하게 대답했다.

“공작도 이미 알고 있지 않소? 뱀파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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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 제이콥이 찝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결국 뭐냐, 사슴사냥이 도적사냥이 되고, 도적사냥이 괴물사냥이 되었잖아?”

그 말에 몇몇 용병이 힐끔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로벨의 심정도 비슷했다.

‘강철성에 뭐라고 말하지?’

더스틴 폴라 경은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떠들었다.

“그자는 그냥 뱀파이어가 아니오. 뱀파이어의 두목이오. 혹시 이것을 알고 계셨소?”

“짐작은... 조금...”

로벨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서 거짓말이 많이 서툴렀다. 그러나 눈치 없는 것이 기사의 직업병인지 더스틴 폴라 경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본인이 확신을 주겠소. 그자는 괴물 중 괴물이오.”

“경은 어찌 알게 되었소?”

더스틴 폴라 경은 허리에 찬 화살깃을 쓰다듬었다.

“목과 가슴에 화살을 박아주었소.”

“응?”

“그런데 웃더이다.”

태연하게 말하지만 아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로벨은 모자란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니까 능글맞게 말했을 것이다. ‘본인이 뱀파이어요’ 길고 장황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빠르고 정확한 화살만 있을 뿐. 그러나 어디에도 피는 보이지 않는다. 화살에 꽂힌 채로 웃었을까? 십중팔구 새하얀 송곳니가 보였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당해낼 수 없었소. 몸놀림을 종잡을 수 없고, 그림자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데, 몸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소.”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반신(半神)이라 일컬어지는 마도의 수호자 앞에서 무사히 살아나온 자가 몇이나 될까.

그리 말하면 로벨은 늑대의 왕을 현세에서 추방해버렸으니 자기 자랑이 되었다.

“공작의 도움이 필요하오.”

로벨은 눈을 질근 감았다. 달빛이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그 괴물을 해치워야 하오. 이것은 비단 불로불사의 염원 때문이 아니오. 그 괴물은... 그 괴물은... 진정 위험하오.”

충격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로벨도 처음 늑대의 왕과 만났을 때 그러했었다.

“강철성은 만만한 세력이 아니오.”

“공작은 볼탄 반도의 주인이 아니시오?”

“강철성은 검은 성에 속해 있소. 자칫하면... 지난날 붉은 산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소.”

로벨은 말을 하면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 옛날 조지 도트넘 백작과 싸울 때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말한 것과 비슷했다.

‘앉은 자리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진다더니...’

로벨은 씁쓸하게 웃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그 웃음을 다르게 이해했다.

“공작은 공작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본인이 무리한 부탁을 했소. 용서하시오.”

로벨은 사과를 받지 않았다. 사과 받을 일이 아니니까. 그것보다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다.

호른 경이 제안한 ‘모른 척하기’ 작전은 실패했다. 오늘 일은 필히 도트넘 가문 귀에 들어갈 것이다. 울프 용병단의 입을 막을 수 있지만, 노스폴드 시티 소속의 용병 입은 막을 수 없었다.

‘철판 깔기 작전으로 넘어가야 하나?’

명색이 볼탄 반도 공작인데, 협조 좀 안 했다고 어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 자작나무 저택에 도착했다. 도끼잡이 숀이 뛰쳐나와 말고삐를 잡았다. 로벨은 모닝스타가 화내기 전에 호의를 물리쳤다.

“내가 할게.”

도끼잡이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귀한 분을 많이 상대한 것은 아니지만, 주인님의 주인님은 조금 특이했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으니 호른 경과 더스틴 폴라 경의 전투마를 받으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이국적인 기사도 거부했다.

“나도 되었다. 바로 떠날 것이니.”

“떠난다고?”

깜짝 놀라 되물은 것은 로벨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 말했다.

“본인이 있으면 공작이 불편하지 않소? 그 괴물과 싸울 생각이면 돕겠으나, 싸우지 않을 생각이면 떠나는 것이 좋지. 아니 그렇소?”

“그것은 맞지만...”

로벨이 순순히 긍정하자 더스틴 폴라 경은 미소 지었다.

“인간과 괴물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니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오. 그때 공작을 돕도록 하겠소.”

“왜? 왜 나를 돕겠다는 것이오?”

“신세진 것이 있으니까.”

로벨은 지미와 루시 여관 숙박비를 생각했다. 하지만 더스틴 폴라 경이 말하는 신세는 다른 것이었다.

“본인을 체포하지 않았을뿐더러 체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소. 그 우정에 감사하고 있소.”

로벨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자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눈을 치켜떴다.

“그럼 조만간 다시 봅시다.”

더스틴 폴라 경은 소리 내어 웃고 말머리를 돌렸다. 술 한잔 하지 않고 바로 떠날 모양새였다. 강철성의 암살자를 처치하고, 로벨의 대답까지 들었으니 계속 머물 이유가 없었다.

“덩굴성으로 가지 마시오! 그곳에는 이미 강철성의 기사가 와 있을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그닥- 다그닥-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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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도 자작나무 저택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도적 문제를 해결하고, 더스틴 폴라 경과 마주쳤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기까지 왜 온 거야?”

“그러게 말이다. 쳇!”

고생만 하고 땡전 한 푼 건지지 못한 용병들은 티 나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로벨의 칼솜씨를 본 뒤라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이유는 다르지만, 호른 경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왕 오셨으니 며칠 쉬시는 것도...”

“호의는 고맙지만 불가하오.”

로벨은 거절의 뜻을 밝혔다. 도끼잡이 숀이 기겁해서도 아니고, 육식요정 소피가 못마땅하게 쳐다봐서도 아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인간이 되겠다고 하였소.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소?”

호른 경은 잡생각이 많아서 로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녀 키르케가 아랫입술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뱀파이어를 암살자로 보내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죠?”

로벨은 영리한 마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도반 도트넘 백작이 할 짓이 아니야.”

뱀파이어 군주는 늑대의 왕과 달랐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인내심이 강했다. 음흉한 만큼 빈틈이 없었다. 지난날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웨일 도트넘 백작을 살해하고, 그 누명을 로벨에게 씌워 조지 도트넘 백작까지 처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공들여서 바꿔치기한 ‘도반 도트넘 백작’으로 인간사에 등장했다. 조지 도트넘 백작이 저지른 인신공양 등의 악행을 수습하여 능력 있는 기사, 자비로운 영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의 행보도 대단했다. 음지에 숨어서 볼탄 반도를 몇 번이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다. 로벨의 기적적인 승리들이 아니었으면 볼탄 반도는, 더 나아가 포비아 왕국은 마도의 수호자 손아귀에 넘어갔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그런 자가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뱀파이어 암살자를 보낼 리 없어.’

로벨이 지금껏 지켜온 뱀파이어 군주는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도트넘 백작이 아니면 대체 누가...?”

“뻔하잖아요? 악마추종자죠!”

호른 경이 불쾌한 얼굴로 따졌다.

“악마추종자가 왜 폴라 경을?”

“그건... 음... 강철성 백작님의 환심을 사려고?”

“그게 말이 되는가?”

로벨은 기사와 마녀의 말다툼을 미리 차단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악마추종자가 개입했다는 거요. 오늘 죽은 뱀파이어도 악마추종자 일원일 가능성이 높소. 이상한 마법을 사용했으니까.”

로벨의 걱정이 그것이었다. 늑대성으로 서둘러 돌아갈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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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우려가 맞아떨어졌다. 강철성보다 먼저 움직인 세력이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과 악마추종자를 대표하는 류트 프란시스 공자였다.

“포클랜드 시티에?”

로벨은 먼지투성이 망토를 바람 따라 털며 물었다. 어린 집사와 헨리 상회장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그쪽이?’, ‘그쪽이!’ 결국 처음 말을 꺼낸 헨리 상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하이랜드의 고르곤 공작, 음, 아니군요. 잉그비아 왕국의 고르곤 ‘국왕’ 사절로 포클랜드 시티에 방문했습니다.”

로벨이 남쪽 바다에서 분주한 사이 북쪽 바다가 뒤집혔다. 친(親)에드워드 세력을 모두 소탕한 고르곤 공작은 기어이 왕위에 올랐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배고픈 이야카처럼 으르렁거렸다.

“하! 아무리 그래도 감히 사절을? 봄과 여름에 죽기 살기로 쳐들어 온 게 누군데?”

“포클랜드 귀족과 싸운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거시기 뭐냐, 결국 국왕 나리하고 포클랜드 나리들은 고르곤 공작하고 손을 잡은 거요?”

애꾸눈 볼포스가 ‘고르곤 국왕’이라고 정정해주었지만 허풍쟁이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인양 꿋꿋하게 공작이라 불렀다. 로벨도 거기에 동참했다.

“에드워드 3세는?”

헨리 상회장이 눈알을 굴리며 웅얼거렸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보호 중입니다.”

정치 감각이 바닥이 기어 다니는 로벨도 불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얌전히 협조하진 않겠지?”

로벨의 불안에 어린 집사가 시큰둥하게 기름을 얹었다.

“포클랜드 귀족한테 쌓인 것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검은 숲 공작님이요? 에이, 당연하죠. 무조건 쌩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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