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95화 (295/605)

295화. 화살

호른 경 저택에는 120년의 전통이 묻어있었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120년이었다.

지붕을 받치는 대들보에는 말린 사슴 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횃불걸이가 걸린 기둥에는 그을림과 기름때가 곰팡이처럼 번져있으며, 낡은 마루에서는 오래된 나무집 특유의 냄새가 났다. 시간을 거슬러 머나먼 과거 어느 놀드 족장의 집에 온 느낌이었다.

“정겨운 느낌이오.”

로벨의 뿌리는 엄밀히 따져 겔몬 족이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샘 포클 시대 이전에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부모, 형제, 친구와 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기사가 커다란 성에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역사였다.

호른 경은 몇 안 되는 사용인을 불러서 메인 홀 겸 응접실 겸 주방을 깨끗이 치웠다. 거추장스러운 짚더미와 나무 상자와 곡물 자루와 술통 등을 모두 치우고 기다란 식탁을 두 줄로 놓았다. 조금 비좁지만 로벨 일행과 호른 가문 식구가 모여 앉을 수 있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오? 이만하면 훌륭하오.”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진심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호른 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래전에 로벨을 초대한 적 있으나, 그때와 사정이 달랐다. 그 시절 로벨은 프란시스 가문 휘하의 지방 관리인(=남작)이었다. 볼탄 반도를 지배하는 군주(=공작)와 급이 달랐다. 그리고 약간의 오해도 있었다. 로벨이 남자 중의 남자라 믿어서 거친 놀드 족 풍습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습지만...’

호른 경은 사슴 뒷다리를 우적우적 뜯어먹는 로벨을 보았다. 흐뭇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호른 가문의 모두가 좋지는 않았다.

자작나무 저택의 집사 겸 목수 겸 정원사인 ‘도끼잡이’ 숀이 노안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요즘 자작나무 숲이 심상치 않습니다.”

호른 경은 몰골이 안 좋은 하인들을 힐끔 보았다. 조금 전 환영인사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적인가?”

도끼잡이가 침울하게 끄덕였다. 기사 가문이 도적 때문에 고충을 겪는 것은 자랑이 아니었다.

“도련님이 떠나신 뒤로...”

도끼잡이는 말을 흐리다가 슬그머니 정정했다.

“당주님이 떠나신 뒤로 자작나무 숲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밀렵이나 하는 수준이었는데, 이것들이 점점 숫자가 늘어나면서 간이 배 밖에 나와...”

“몇이나 되는가?”

“제 눈으로 확인한 놈들만 서른입니다.”

호른 경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도끼잡이를 보았다. 성실하고 충직하지만 눈은 영 믿지 못했다. 호른 경이 침묵하자 도끼잡이가 변명을 덧붙였다.

“애송이 욘도 함께 봤습니다.”

“그럼 그렇겠지.”

도적이 30명이면 상당한 규모였다. 건장한 사내들이라 하루에 먹어치우는 곡물만 한 자루였다. 농사짓지 않는 자작나무 숲에서 그만한 식량을 충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만두면 제풀에 지쳐 흩어질 거 같은데...”

“저도 그리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뭔 일인지 숫자가 자꾸 불어나고 있습니다.”

호른 경은 잠깐 고민 후에 뭔 일을 깨달았다. 동부평야 반란군의 잔당이었다.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군.”

늑대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호른 경은 눈 사이에 주름을 그리는 도끼잡이를 안심시켰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주군과 상의 후 해결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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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그늘에 3일간 숙성시키고 3가지 허브를 넣어 3시간 동안 푹 삶은 사슴 뒷다리 고기’를 깨끗이 발라낸 후 뼈다귀를 한곳에 모았다. 비록 로벨이 사냥한 사슴은 아니지만, 아야와 이야카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기름 묻은 손가락을 할짝거리며 말했다.

“이 숲에는 사슴이 많나 봐요. 좋겠다.”

영주의 숲에서 가장 사랑받는 짐승이 사슴이었다. 늑대처럼 위험하지도 않고, 여우처럼 영악하지도 않고, 덩치가 커서 먹을 것도 많았다.

“맛있기도 하고...”

로벨은 마녀를 따라 손가락을 쪽 빨았다. 어린 집사가 보면 품위 없다고 뭐라 하겠지만, 기사와 마녀한테 품위 찾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때, 호른 경이 로벨의 얼굴을 살피며 다가왔다.

“주군, 입에 맞으셨습니까?”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가 맛없기도 힘들지만, 요즘은 특히 그러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슴고기를 먹어 좋았소. 경도 그렇겠지만... 물고기는 이제 질렸소.”

바닷가가 아니면 육고기보다 물고기가 더 귀했다. 청어절임이나 훈제연어처럼 가공하면 모를까, 생물은 하루 이상 보관할 수 없었다. 한여름에는 반나절 만에 부패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물고기를 먹어 본 적 없는 호른 가문 사용인들은 ‘과연 주인님의 주인님!’, ‘공작 나리쯤 되면 물고기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구나!’ 식으로 감탄했다.

로벨은 본의 아니게 가문의 위상을 높인 후 말을 이어갔다.

“내일 사냥터로 안내해 줄 수 있소? 근사한 사슴을 잡아 보답하리다.”

호른 경의 사슴을 울프 용병단이 사냥해 대접하지만, 귀족 마인드로 보면 보답이었다. 호른 경이 난감한 듯 말꼬리를 흘렸다.

“이곳까지 모시고 이런 말씀드리기가 송구하지만, 내일은 조금 곤란합니다.”

어느 지방 풍습으로 봐도 무례한 처사였다. 하지만 로벨은 화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소?”

로벨이 걱정스럽게 묻자 호른 경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큰일은 아니지만 도적떼가 나타나 제 땅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주군을 모시고 불미스러운 사건을 거론하니 부끄럽습니다.”

로벨은 겉보기와 달리 영리했다. 전쟁·전투와 관련된 일이면 특히 그러했다. 호른 경이 짐작한 것은 로벨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는 날카로운 칼과 충성스러운 용병이 있소. 내가 경을 돕도록 하겠소.”

호른 경은 미소 지었다. 정말 한결같은 주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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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사냥이 도적사냥으로 바뀌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고기와 가죽보다 쇠붙이가 더 값지니 도리어 좋아하는 용병이 많았다. 하지만 기대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 숲의 도적떼는 로벨과 호른 경이 모두 짐작했듯 동부평야의 반란군 잔당이었다. 그 증거로 로드릭 깃발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도주했다.

“어어? 이 자식들아! 왜 도망가? 돈 되는 거 내놓고 가!”

그리고 지루한 수색이 이어졌다.

자작나무 숲은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라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하얀 껍질을 가진 나무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보면 이 숲에서 나고 자란 호른 경조차 방향을 잃곤 했다.

“이쪽이 북쪽이라니까? 병든 토끼도 아는 방향을 왜 모르니?”

“그야 토끼가 아니니까?”

“그럼 토끼보다 못한 거네! 멍청해! 멍청해!”

숲 속 깊은 곳에 들어왔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숲의 가호를 받는 드루이드와 숲의 정령인 요정이 함께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진짜 멍청한 것은 도적놈들이지. 이렇게 도망가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우리를 괴롭힐 생각이면 똑똑한 거지.”

물론, 걱정이 없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한탕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용병들도 한나절이 지나자 지루해했다.

“기사 나리, 그냥 돌아가시지요. 도적놈들은 길 잃고 헤매다 굶어 죽을 겁니다요.”

“그건 알 수 없어. 이대로 놔주면 또 모여서 작당할 거야.”

“그건 그곳 영주가 신경 쓸 일이죠.”

“그곳 영주가 내 봉신이야.”

“어, 음, 그렇군요.”

허풍쟁이는 뺨을 긁적였다. 로벨이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대영주란 사실을 깜박했다. 공작이란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앳된 탓일까, 아니면 세습 기사 시절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탓일까.

해가 지고 나무 그림자가 땅을 뒤덮었다.

로벨에게 길들여진 울프 용병단은 꿋꿋하게 행군했지만, 노스폴드 시티 용병들은 강행군에 불만을 드러냈다. 상대가 로벨이라 불만으로 끝났을 뿐, 웨던 남작이 지휘관이었으면 엉덩이 깔고 주저앉아 못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조금 쉬는 게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용병들의 불온한 기운을 눈치채고 건의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긁다가 나직이 말했다.

“경, 눈치 채지 못했소?”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호른 경은 덩달아 목소리를 죽였다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짐승을 보았소?”

로벨은 사람을 소름 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가끔은 나쁜 쪽으로 말이다.

사람 손이 거의 안 닿은 자연 그대로 숲과 여름내 살찌우고 겨울을 대비해 몸을 추스른 계절에 흔하디흔한 노루 한 마리 보지 못했다.

“조금 전 새 울음소리가 사라졌소.”

호른 경은 워 해머의 머리를 꽉 쥐었다. 쇠뭉치가 뽑히기 전 로벨이 제지했다.

“기다리시오.”

이만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존재라면 필히 몬스터일 것이다. ‘인지의 존재...’ 마녀 키르케가 말한 대로였다. 요정이 버젓이 날아다닐 때 조심했어야 했다.

“우리 중 말을 가진 것은 나와 경뿐이오. 후미로 가서 경계하시오.”

호른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머리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행렬 제일 끝의 노스폴드 시티 용병이 픽-하고 쓰러졌다. 육중한 바디슈가 나무뿌리를 찍고, 둥그런 바이킹 헬멧이 흙바닥을 굴렀다.

“이봐! 조심해!”

몇 걸음 앞서 가던 동료 용병이 소리쳤다. 하지만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용병도 말을 끝맺기 무섭게 나자빠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누구야!”

아론다이트를 뽑으며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때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천생 기사였다. 바보 같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아군이 놀라면 적도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로벨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정체 모를 습격자가 꼬리를 드러냈다.

아름드리 자작나무 그림자 밖으로 삐쩍 골은 팔과 앙상한 손가락이 보였다. 모닝스타가 머리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히히히힝-!”

로벨은 나무 그림자로 아론다이트를 찔러 넣었다. 거리도, 속도도 완벽했다. 그러나 칼날이 때린 것은 하얀 나무껍질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의를 담은 무언가가 나뭇가지 타고 뱀처럼 뻗어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비를 당기며 몸을 뒤로 눕혔다. 서늘한 기운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법?’

로벨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상대를 찾았다. 칼끝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흔들리는 잎사귀 하나하나를 감지했다. 바람보다 한 박자 빠르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하앗!”

로벨은 반사적으로 칼날을 세웠다. 수풀을 요란하게 한 바퀴 돈 습격자가 로벨의 목덜미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핏자국이 가득한 대거가 순백의 아론다이트와 엇갈렸다.

“괴물...!”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악취가 났다. 아니, 시취(屍臭)였다. 로벨은 왼손으로 흐룬팅을 뽑아 괴물의 허리를 베었다. 그러나 괴물은 믿기지 않는 몸놀림으로 멀어졌다.

괴물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막을 줄 몰랐다. 게다가 가진 무구도 심상치 않았다. 저 칼에 닿으면 베이기 전에 부서질 것 같았다.

괴물은 갈등하다가 표적을 바꿨다. 먹잇감은 많았다. 크고 위험한 먹이에 집착할 필요 없었다.

“쏴라!”

애꾸눈 볼포스 명령에 쿼럴이 쏟아졌다. 그러나 괴물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자리를 피해버렸다. 애꾸눈은 하나뿐인 눈을 빛내며 두 박자 늦게 방아쇠를 당겼다. 팡-!

애꾸눈의 쿼럴은 괴물이 달리는 곳을 선점했다. 최고의 실력에 행운이 깃든 예측샷이었다. 그러나 괴물은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애꾸눈의 쿼럴마저 피해냈다.

“뭐, 저런...”

괴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한 발이 더 남아있었다. 울프 용병단이 쓰는 짧고 두툼한 쿼럴이 아니라 기다란 롱보우 화살이었다.

화살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공중에 뛰어오른 괴물 몸뚱이를 완전히 관통했을 때였다. 푹-! 새처럼 날아오른 괴물이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타이밍이지만, 울프 용병단 눈에는 화살에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로벨은 괴물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화살의 주인을 찾았다. 새로운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로벨 공작,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소.”

동방인 특유의 억센 발음 때문일까,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지만 낯설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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