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94화 (294/605)

294화. 자작나무

로드릭 시티 외곽 공사에 탄력이 붙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여유 자금이 생긴 만큼 인부와 수레를 2배로 늘리고 수로 기술자를 새로 고용했다. 성벽 아래 폭 15피트, 깊이 11.5피트 해자를 파고, 개울물로 바닥을 채웠다. 성문 좌우에 3층 구조로 12개 총안을 가진 보루를 세우고, 꼭대기에 12파운드 캘버린 포를 2문씩 배치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로드릭 시티에 들어오려면 최소 세 자릿수 병력을 희생해야 할 것이다.

“도시 외곽을 뚫어도 늑대성 언덕을 오르려면... 아우... 안 싸우고 말지...”

“기사 나리 취향이 100% 반영되었으니까.”

볼탄 반도에 전쟁이 잦다고 해도 이 정도 방어시설을 갖춘 영주는 드물었다. 공사비용도 비용이지만, 유지비용이 더 문제였다. 포탄, 화약, 용병, 시설보수 등등을 생각하면 차라리 항복하는 게 싸게 먹힐지도 몰랐다.

12만 8천 페닝 중 5만 5천 페닝이 추가로 지불되었다. 어차피 나갈 돈이 나간 것이라 아쉬워하지 않았다. 물론, 어린 집사의 올챙이 눈알만한 마음을 달래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깨끗하고 가벼운 알루미늄 덩어리였다.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마이 프레셔스...”

소유주를 엄밀히 따지면 로벨이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지적하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알루미늄 덩어리를 양쪽 뺨에 비비다가 흠칫해서 두리번거렸다. 로벨과 늑대성 식구들도 덩달아 흠칫해서 딴청을 피웠다. ‘울프 용병단 결원을 보충하고자...’, ‘가을 추수가 가까우니 제분소와...’ 어린 집사는 기사와 행정관을 의심스럽게 보다가 알루미늄을 품 안에 숨겼다. 로벨 등은 곁눈질하며 미소 지었다.

“더스틴 폴라 경의 일이 남아있습니다.”

호른 경이 아직 아물지 않는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최근에 생긴 골칫거리라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차라리 체포를 했으면 쉬울 텐데, 고지식한 에디즈 자작은 강철성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싫어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다. 사트로 가문 일파에 쌓인 게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좋겠소?”

로벨이 심각하게 물었다. 로드릭 가문의 자존심, 에디즈 가문의 체면, 도트넘 가문의 명예, 그리고 더스틴 폴라 경의 우정이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로벨이 선뜻 결정을 못하자 호른 경이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쉬운 것부터 말하시오.”

“첫 번째는 강철성에 연락해 알아서 잡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에디즈 자작에게는 포상을 내려 달래줘야겠지요.”

“그건 좀... 계속 말하시오.”

“두 번째는 강철성이 아니라 폴라 경에게 전하는 겁니다. 도트넘 가문의 기사가 쫓고 있으니 서둘러 피하라고 말입니다.”

로벨은 손가락을 깍지 끼고 고민했다. 친구를 배신하는 것도, 약속을 저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만한 이유로 강철성하고 전쟁할 수 없었다.

“세 번째는?”

“그냥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가을이 깊었으니 사냥을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열흘 정도가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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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나가냐고 화를 냈다. 펄프 대장이 놀기 좋아하는 남편을 둔 새댁 같다고 웃다가 고용불안과 임금삭감의 위협을 느꼈다.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진짜야.”

로벨은 사냥의 목적을 설명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강철성에서 사람이 왔을 때 한 치의 거짓 없이 ‘그런 일이 있었어요? 영주님은 사냥 가서 모를 걸요?’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로벨이 막무가내로 우기자 어린 집사도 어쩌지 못했다. 잘못된 비유가 아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주종관계보다 부녀나 남매에 가까웠다.

사냥 인원은 총 30명이었다. 울프 용병단에서 자발적인 참가자를 받았는데, 100명이 넘게 자원해 사냥 경력과 무장 수준으로 추려야 했다.

“기사 나리를 따라가면 페닝이 저절로 굴러온다는 소문이 나서... 하핫!”

가을 사냥인 만큼 수익이 보장되긴 했다.

애꾸눈 볼포스와 호른 경이 상의 끝에 결론지었다.

“북쪽 숲은 너무 가깝고... 거인의 발자국 쪽으로 가시지요.”

“노스폴드 시티 자치구역 아니오?”

“뭐, 가서 양해를 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주군께 항의하겠습니까.”

로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승락했다. 자유민의 도시는 기사가 다스리는 장원과 달라서 숲을 따로 관리하지 않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맹수를 처리하고 가죽과 고기를 판매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아니, 좋아했을 것이다.

노스폴드 시장 마이클 웨던 남작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 전에 사냥꾼을 구해서 싹 잡았습니다.”

“벌써?”

“공작님께서 힘 써주신 덕분에 우리 도시도 규모가 커지지 않았습니까. 왕래하는 상인이 많은데, 혹여나 늑대 때문에 피해를 볼까 일찍 손을 썼습니다.”

비록 초대한 적은 없지만, 공작쯤 되는 사람을 헛걸음하게 한 것이 미안해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내어주었다. 덕분에 저녁은 배불리 먹고 편히 쉬었는데, 내일이 고민이었다.

호른 경이 반년 묵어서 살짝 쉰 냄새나는 맥주를 치우고 말했다.

“제 고향으로 가시겠습니까?”

로벨은 가리는 것이 없어 자유도시의 악명 높은 맥주도 잘 마셨다. 조끼를 깨끗이 비우고 작게 트림까지 했다.

“경의 고향이면, 자작나무 숲 말이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정이 관리하는 숲이라 사나운 맹수도 없지요.”

요정이란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가 휙휙-돌아갔다.

“요정! 요정이 진짜 있습니까요?”

“그거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거 아니야?”

“고블린도 있고! 오우거도 있는데! 요정이 왜 없냐!”

술기운이 살짝 오른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호른경 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만 가면 보기 힘들다. 낯을 많이 가려서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그럼 기사 나리가 가면 다릅니까요?”

“그야 물론이다. 주군처럼 고귀하고 고결한 영혼은 요정이 좋아하니까.”

“오오! 역시 우리 기사 나리!”

로벨은 난데없는 찬양에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호른 경의 등을 꾹 찌르고 물었다.

“그 말 진짜예요?”

“무슨 말 말이냐?”

호른 경이 당당히 대꾸하지 마녀는 우물쭈물하며 묻지 않았다.

호른 경이 아는 요정은 자작나무의 요정 소피뿐이었고, 소피는 로벨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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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일정이 길어지고, 규모도 커졌다.

하루나 이틀 거리로 상정한 곳이 닷새로 멀어지고, 용병과 수레도 크게 늘어났다. 노스폴드 시장 웨던 남작이 붙여준 용병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강철성에서 암살미수범을 잡겠다고 기사와 용병을 보냈다. 강철성과 늑대성이 원수란 것은 7살 꼬마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늑대성의 주인 로벨 로드릭 공작은 노스폴드 시티에서 가장 큰 손님이자 소중한 은인이었다.

로벨이 로드릭 시장과 늑대도로를 건설한 이후 볼탄 반도 북서쪽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볼탄 반도의 행상인뿐만 아니라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상인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과 공사가 매년 시행되어 일자리가 많아졌다.

전쟁은 기사와 용병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제공하는 대장장이부터 향락을 채워주는 창부까지 많은 사람을 살찌웠다. 아니, 지금 당장 진행 중인 로드릭 시티 외곽 공사만 해도 노스폴드 시티 소속 기술자가 대량 고용되었다. 쉽게 말해, 노스폴드 시티는 로벨이 아낌없이 뿌리는 페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런 로벨이 자신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사냥터 문제로 책임을 묻기는 힘들겠지만- 시민들의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용병과 물자를 ‘선의’로 제공했는데, 그 자태가 조금 이상했다.

‘역시 울프 용병단! 저 갑옷 좀 봐봐!’

‘사냥 가는데 기본 장비가 아바레스트야?’

노스폴드 시티의 용병도 나름대로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용병이지만, 울프 용병단에 비하면 전부 풋내기였다. 볼탄 반도에서, 나아가 유라피아 대륙 전체에서 울프 용병단만큼 실전을 많이 겪은 용병단은 없었다. 전사자를 제외하면 멤버 교체가 거의 없었으니, 고참병은 하나하나가 최정예 용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명성의 효과도 있었다. 별것 아닌 농담과 행동도 괜히 멋있어 보였다. 아직 어린 프리랜서들은 의식적으로 울프 용병단의 고참병을 흉내 내었다. 로벨을 보호하라고 붙여주었더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증인은 많을수록 좋으니 잘 된 일입니다.”

호른 경은 쫄래쫄래 따라오는 떨거지 용병들을 내심 반겼다. 게다가 저들도 용병이니 전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작나무 숲은 볼탄 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자연림이었다.

야인처럼 살아가는 자유민이 조금 있을 뿐 제대로 된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땅이 그러하듯 주인이 없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작나무 숲=호른 가문의 땅으로 여겨졌고, 그 사실에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 영주들은 오랜 시간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120년 전입니다. 주군의 가문에 비하면 짧고 보잘것없는 역사지요.”

로벨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로드릭 가문의 역사도 그리 대단치 않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 호른 가문의 성이 더 대단치 않기 때문이다.

‘저걸 성이라고 불러야 하나?’

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부실한데, 오두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웅장했다.

나무가 넘쳐나는 만큼 외벽과 바닥을 모두 목재로 깔고 지붕만 짚으로 덮었다. 4, 5피트 남짓한 높이의 담벼락을 둘렀지만, 군사적 목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호른 가문 집’이란 경계표시 정도였다.

“와아! 노릭스 후작님하고 비슷해요!”

구조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얀 숲의 오두막은 전형적인 겔몬 족의 오두막이지만, 이곳은 북방계 놀드 족의 오두막이었다. 지붕을 밧줄로 동여매고, 창문이 작거나 아예 없는 것이 그러했다. 하지만 숲의 분위기 때문이지 느낌이 비슷했다. 마녀 키르케는 직업상 그 부분을 강하게 캐치했다.

“인지의 힘이 강하게 스며있어요. 요정이 산다는 것이 진짜인가 봐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두리번거리며 성-혹은 오두막-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환영 인사에 쓰기에 과격한 벌목용 도끼, 낫, 대형가위 따위를 들고 있었다.

“이 도적놈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찾아왔느냐! 모두 조져버리...!”

로벨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성질 급한 용병들은 바로 무기를 뽑았다. 사냥용으로 가져왔지만 전쟁용이 분명한 아바레스트도 일제히 정면으로 향했다.

“그만, 그만, 내 얼굴을 벌써 잊은 것인가?”

호른 경이 전투마를 몰아 앞을 가로막았다. 도끼를 쥔 거구의 노인이 눈을 깜박였다.

“패티? 패티 도련님이십니까?”

시력이 안 좋은 나무꾼 노인을 위해 출생을 증명할 필요 없었다. 노인의 수염 속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쪼르르 날아올랐다.

“으앙! 으앙! 패티! 왔구나! 이제야 왔어!”

도끼와 낫에도 당황하지 않던 용병들이 기겁해서 우르르 물러났다. 겁이 많다고 질책할 수 없었다. 겁을 낼 만큼 무섭지 않았으니까. 육식요정 소피였다. 호른 경은 얼굴로 날아드는 친구를 손바닥으로 막고 부드럽게 눈을 마주했다.

“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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