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밀림
발레아 제도(諸島).
인어의 바다 북서쪽 공해상에 위치한 30여 개 섬을 가리킨다. 숫자가 두리뭉실한 것은 섬으로 봐야 할지 암초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호른 경이 건틀렛을 벗어 수염을 만졌다.
“그 말을 풀이하면 암초가 아주 많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에르나 왕국 해군도 어지간해서는 이쪽으로 오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배에서 깔끔하게 면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 듬성듬성 잔털이 남아 있었다. 아침마다 목에 칼을 대고 묘기를 부릴 필요 없는 로벨이 새삼 부러웠다. 그러나 정작 로벨은 다른 이유로 고통 받았다.
“으으... 오랜만이야.”
“오오! 이곳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뱃멀미 말이야.”
요 며칠 바람이 거셌다. 풍랑까지는 아니지만, 밤잠을 깨우기는 충분했다. 어제는 생각 없이 주워 먹은 정어리 구이가 얹혀서 속이 매스꺼웠다. 뱃멀미가 더해져 여러 번 속을 비웠다. 그리고 오늘은 예정에 없는 마법이 시작되었다. 지난달보다 사흘이나 빨랐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데, 한꺼번에 몰아치자 천하의 로벨도 기진맥진해졌다.
로벨이 테이블 위에 축 처지자 호른 경이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해적이고 나발이고 당장 상륙하시오! 주군께서 휴식이 필요하오!”
이안 선장은 숫제 뱃사람이라 기사 무서운 줄 몰랐다. 그 유명한 호른 경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이곳은 정상항로가 아니라 상륙할 수 없습니다. 반나절 정도 들어가면 '원숭이 꼬리'라 불리는 작은 만이 있는데, 우선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벨은 그렇게 하라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로벨이 거느린 수많은 기사와 용병과 행정관을 다 불러도 이안 선장만큼 바다를 잘 알지 못했다.
이안 선장은 사람 부릴 줄 아는 고용주의 태도에 만족했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곧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대사는 악당이 마무리할 때 하는 건데요?”
마녀 키르케가 눈치 없이 까불거렸다. 로벨은 웃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2시간 정도 기절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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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의 말대로 정상항로가 아니었다. 그 말은 전함이나 무장상선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란 뜻이고, 법과 정의의 잣대 앞에서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해적과 밀수꾼의 천국이란 뜻이다.
“저 배들은 뭐야?”
‘원숭이 꼬리’란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 뾰족뾰족한 바위섬 사이로 완만하게 S자로 휘어진 모래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큰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섬이었다. 그러다 보니 먼저 와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딱 보니 밀수업자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밀수업자? 그럼 범죄자 아니야?”
“어느 나라, 어느 제후법을 따르느냐에 다릅니다. 이곳은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니 항구에 들어갈 때까지 처벌할 수 없습니다.”
세금을 안 내고 물건을 몰래 들이는 것이 밀수인데, 세금의 명목이 지역마다 달라 처벌이 어려웠다. 이런 주인 없는 땅에서 거래하면 더욱 그러했다.
“서너 명이 모여서 한탕하고 흩어지는 조무래기입니다. 선주님의 깃발을 보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겁니다.”
로벨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어모아 말꼬리처럼 묶었다.
“그럼 신경 써야 할 것이 뭐야?”
“당연히 해적입니다.”
이안 선장에게 미안하지만, 로벨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호른 경은 작게 하품했으며, 허풍쟁이 제이콥, 싸움개 닥스, 심지어 겁쟁이 데비조차 실소했다.
아무리 사납고 잔인해도 헐벗은 해적이었다. 저스티스 기사단처럼 중장갑을 갖춘 것도, 잉그비아 왕국군처럼 롱보우를 기가 막히게 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배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알잖아?”
그렉 페럿 경과 함께 단둘이서 나포했다. 갑옷도 입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풀 플레이트 차림의 기사와 22명의 정예 울프 용병단이 함께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슬라임도 자기 동굴에서는 영주 노릇을 한다지요.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안 선장의 걱정이 싫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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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문가의 말은 귀담아듣는 것이 좋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옆으로 뿌리며 예민하게 소리쳤다.
“이쪽이 아니야! 조심해!”
핏물이 반달모양으로 뿌려지며 땅을 적셨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셋을 죽이고 하나를 제압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여름내 몸집을 불린 활엽수 사이로 쿼럴이 날아왔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눈구멍을 보호했다. 깡! 깡-!
가슴에 하나. 허벅지에 하나. 충격에 몸이 잠시 굳었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이놈들이...”
로벨치고 꽤 험한 말이었다. 몸 상태도 안 좋은데 강제로 술래잡기하니까 그럴 만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어이구! 기사 나으리!”
호른 경과 싸움개 닥스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 쿵쾅쿵쾅거렸다. 쇳덩이와 쇠사슬을 칭칭 감은 기사와 용병은 작은 전차였다. 발에 밟히는 것 중 절반은 으스러졌다.
‘저 괴물들은 뭐야?’
‘어디서 저런 것들이 와서...’
사실 진짜 괴로운 것은 해적이었다.
눈 감고 봐도 기사와 용병으로 보이는 것들이 며칠째 섬을 헤집고 있었다. 처음에는 멍청하게 물길을 잘못 잡아서 흘러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도를 들고 여기저기 들쑤시며 다니는 것이 금방 떠날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쫓아내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루한 술래잡기였다. 섬 지리에 익숙한 해적들은 크로스보우와 재블린(Javelin)을 가지고 수시로 습격했다.
용병 셋을 처치하는 쾌거를 올리는 동안 해적 열일곱 명이 살해되었다. 그 많은 피를 지불하고 얻은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깡통갑옷이 무시무시한 전쟁무기란 깨달음이었다.
육지의 형제들이 왜 기사라면 치를 떠는지 알 것 같았다. 저런 괴물종자들과 드잡이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산적과 마적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포라도 가져와야 하나?’
‘미쳤냐? 차라리 불을 피우자고 해라!’
해적은 수풀 속에서 서로를 윽박질렀다. 기회가 있을까 엿봤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사와 용병들이 몰려왔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며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질 것이다.
‘두목을 잡아서 바치고 살려달라고 빌어볼까?’
대포보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로벨은 해적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바이저를 올렸다. 파나케아 투구의 신묘한 힘도 이런 밀림에서는 큰 쓸모가 없었다. 쿼럴이 날아온 방향을 알아내는 게 고작인데, 그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또 미끼입니까?”
“...그렇소.”
해적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첫 전투에서 로벨과 호른 경에게 학살당한 후 작전을 바꿨다. 히트 앤드 런... 이라고 하면 그럴듯하지만, 그것보다 좀 치졸한 수법이었다. 어리고 힘없는 해적을 먼저 보내서 기사들을 유인하고, 안전한 곳에서 화살을 쏜 후 도망쳤다.
로벨은 애꾸눈이 건네준 손수건에 칼날을 대충 닦고 칼집에 밀어 넣었다. 핏자국의 주인 중 하나가 하얗게 질려서 엉금엉금 기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두목이 시켜서 한 거예요!”
17살? 18살? 어린 집사 또래의 해적이었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옆 동네 기사의 기사 종자가 되어 검술과 창술을 배우고 있을 나이고,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대학에 보내져 수학과 산문을 익히고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하여 해적이 되었다.
“너희 소굴이 어디야?”
“저, 저도 몰라요. 억지로 끌려온 거예요. 정말이에요! 바, 바다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끌고 왔어요. 길을 몰라요!”
당연한 말이었다. 섬 지리를 잘 아는 놈을 미끼로 쓰지 않을 것이다. 로벨이 착잡한 표정을 짓자 허풍쟁이가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봐줄 것 없습니다요. 이놈 손에 죽은 선원이 못해도 셋은 될 겁니다요.”
“아, 아니에요! 사람을 죽인 적 없어요!”
“이야, 거짓부렁 보쇼? 살인한 적 없는 놈을 해적이 받아줬다고?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로벨은 진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이지는 마. 푸른고래 호 노잡이로 쓸 거야.”
전우를 잃은 용병들은 못마땅했지만, 로벨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잡이 노예의 실상을 아는 만큼 오래 살지 못할 거란 기대도 있었다.
로벨은 질질 끌려가는 어린 해적을 못 본 척하고 마녀 키르케를 찾아갔다.
“괜찮아?”
“후... 후하...! 물론 괜찮아요!”
마녀가 짐짓 기운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얼굴은 격전을 치른 로벨보다 안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잦은 기습에 혹여나 다칠까 갑옷을 있는 대로 입혀놓았다.
쇠사슬을 덧댄 아밍 더블릿에 쇠가죽을 비늘처럼 박은 브리간딘을 입히고 콧등까지 내려오는 바이킹 투구를 씌웠다. 열 걸음 정도 떨어져서 보면 영락없는 꼬마 용병이었다.
“용병 중에도 이만한 장비를 갖춘 용병은 드뭅니다요.”
겁쟁이 데비가 왜인지 뿌듯해 했다. 마녀에게 쌓인 게 많거나, 아니면 남몰래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 다음 보물지도가 무사한지도 확인했다. 이리저리 돌려보느라 지저분해진 것 빼고 멀쩡했다. 마녀가 자꾸 흘러내리는 바이킹 투구를 붙잡고 말했다.
“이 섬이 아닌 게 아닐까요?”
로벨은 어지러운 지도를 치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라피아 대륙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수목이 우거진 숲이었다.
볼탄 반도에서 숲이라 하면 늑대성 북쪽 숲처럼 길쭉길쭉한 나무가 두 팔 간격으로 듬성듬성 늘어선 곳인데, 이곳의 숲은 사람 머리통만한 잎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숙련된 방패병처럼 밀집해있었다. 사람 열 정도 숨겨놔도 티가 안 날 우거진 밀림이었다.
“해적이 자꾸 습격하는 거 보면 여기가 맞아.”
지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 발레아 제도 한 곳에 동그랗게 원을 그려놨는데, 실제 거리로 측정하면 로드릭 영지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더욱이 3야드 앞이 안 보이는 숲 속이라 보물찾기는 고사하고 미아가 될 판이었다.
“바다사자님이 그냥 준 이유가 있네요.”
모두가 긍정했다. 보물찾기가 쉬웠으면 직접 왔을 것이다.
그때, 호른 경이 워 해머에 눌러 붙은 핏덩이를 긁어내며 다가왔다. 머리카락이 남아있는 살점이라 조금 끔찍했다.
“거기서 말하세요! 거기서!”
마녀 키르케가 기겁해서 제지했다. 호른 경은 기사답게 무시했다.
“보물보다 해적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해적을? 어째서?”
“이처럼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을 보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듯했다. 게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보물보다 찾기도 쉬웠다.
“에이, 해적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뎁쇼.”
“앗! 아니죠!”
마녀 키르케가 손뼉을 쳤다. 그 때문에 투구가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마녀는 허둥지둥 투구를 끌어올리고 턱 끈을 쪼였다.
“좋은 방법이 있어?”
“해적은 못 찾아도 해적선은 찾을 수 있잖아요? 바다에 묶여 있을 테니까요!”
해적의 보물을 찾기 위해 해적을 찾아야 하고, 해적을 찾기 위해 해적선을 나포해야 했다. 로벨과 호른 경은 서로를 보았다.
“그럴싸한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모험과 낭만보다 사람 때려잡기를 편히 여기는 것이 역시 기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