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9화 (289/605)

289화. 보물섬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에 반드시 꼽힐 측근 중의 측근을 불러모았다.

가장 먼저 꼽히지만, 가장 길이가 짧은 ‘엄지’ 어린 집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보물섬이요? 무슨 동화도 아니고? 딱 봐도 장난이잖아요.”

가장 활달해서 가장 많이 사고치는 ‘검지’ 마녀 키르케가 발끈해서 반박했다.

“아네요! 바다사자님이 주신 거라고요! 어린 집사가 봐도 그럴듯하잖아요!”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나, 속된 의미로 자주 쓰이는 ‘중지’ 펄프 대장이 중재했다.

“거, 애들처럼 땍땍거리지 좀 마쇼. 진짜인지 가짜인지 조사해보면 될 일 아니오.”

가장 존재감이 없지만, 사랑과 우정을 증명하는데 유난히 적극적인 ‘약지’ 호른 경이 동조했다.

“맥켈런 남작에게 진짜 보물지도인지, 진짜라면 어디서 찾았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귓구멍이나 콧구멍을 파는데 좋은 허풍쟁이 ‘새끼’ 제이콥이 따졌다.

“저기, 저기요? 다 좋은뎁쇼, 저는 왜 부른 겁니까요?”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호른 경이 일제히 허풍쟁이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쌓은 직위와 명성이 있어 볼탄 반도 어딜 가나 대접받을 인사들이었다. 친분이 있다고 하나 일개 소대장인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너도 가야 하니까.”

“저, 저도 말입니까요?”

“응. 네가 책임자야.”

여기서 ‘책임자’의 뜻은 길잡이 겸 말구종 겸 요리사 겸 짐꾼이었다. 재미있거나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기사 나리,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아니, 정말 가시게요? 농담이 아니고요?”

어린 집사가 짜증을 담아 소리쳤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콧김을 조그맣게 뿜었다.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예! 아주 많이 봤죠!”

“...이번에는 아니야.”

로벨과 어린 집사가 말다툼하자 허풍쟁이의 항의는 자연히 잊혀졌다.

“고르곤 공작에 류트 공자에 강철성까지 사방이 뒤숭숭한데, 영주님이 자리를 비우면 어째요!”

“걱정하지 마. 몇 명만 데려갈 거야.”

“몇 명이 아니라 영주님이 가니까 문제라구요!”

“그것은 진짜입니다.”

마지막 말은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호른 경이 어린 집사 편을 든 줄 알고 상처받았다. 하지만 호른 경의 관심은 보물지도에 쏠려 있었다.

“방수 처리된 양피지에 고급 잉크로 그림을 새겨 넣었습니다.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정성이 대단합니다.”

“그, 그럼 진짜 보물지도?”

호른 경이 보물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마녀 키르케에게 물었다.

“북해의 사자 맥켈런 남작이 주었다고?”

“예! 그래요!”

“그럼 이상하군요.”

“무엇이? 무엇이 말이오?”

“이곳은 남해입니다.”

호른 경의 단언에 로벨 일동은 입을 다물었다. 호른 경은 남해를 야만의 땅 남쪽 바다로 오해했나 생각하고 정정했다.

“볼탄 반도 남쪽 인어의 바다 말입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어어? 해도를 볼 줄 아시오?”

로벨의 눈이 반짝이자 호른 경은 뿌듯함과 쑥스러움을 동시에 받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해안선을 따라 살펴봤을 뿐입니다.”

“해안선?”

“해 그림을 볼 때 북쪽이 땅이고 남쪽이 바다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쪽을 보면 작은 섬이 아주 많습니다. 제가 알기로 북해에는 이런 곳이 없습니다.”

로벨은 호른 경이 대견해서 엄숙하게 선언했다.

“경을 나의 수행기사로 임명하오.”

“영광입니다.”

이렇게 되자 어린 집사도 말릴 수 없었다.

영지 경영은 어린 집사가 책임지고, 울프 용병단은 펄프 대장이 책임지니까, 로벨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별 탈 없었다.

“잠시에요. 잠시라고요. 영주님이 자리를 지켜야 영지가 우리 영지일 수 있어요.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응.”

로벨은 기쁘게 대답했다. 어린 집사는 하고 싶은 백 마디 말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이안 선장을 불러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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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의 항해 일정은 수년째 비슷했다. 봄이 오면 겨울에 가공한 가죽, 모피, 공예품 따위를 남쪽 나라로 가져가고, 여름이 되면 비단, 도자기, 향신료 등을 싣고 돌아왔다. 로드릭 항에서 늦가을까지 쉬었다가 양젖이 발효되고 양털을 풍성해지면 다시 짐을 한가득 싣고 남쪽으로 떠나갔다.

지금은 여름의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초가을이었다. 시기가 딱 좋았다. 이안 선장과 항해사는 할 일 없이 맥주나 축내고 있었다. 겨울 항해를 대비한 휴식이지만, 그래도 역시 심심해 보였다.

“보물찾기입니까?”

이안 선장의 흉터투성이 얼굴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교역선 푸른고래 호 선장이지만, 전직은 바텐더였고, 전전직은 해적 두목이었다.

“동종업계에 종사했으니까 좀 알지?”

이안 선장의 흉터가 으쓱였다.

“저야 뭐, 하루 털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마시는 삼류 해적이라 보물 같은 것은 만져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보물섬의 소문은 익히 들었지요.”

“그래?”

로벨 이하 자칭 보물탐험대가 활짝 웃었다. 이안 선장은 부담스러워서 눈길을 살짝 피했다.

“해적질로 얻는 것은 화폐보다 화물이 많습니다. 상인이야 뭐라도 가져오면 다 돈이 되니까요.”

“응. 응. 그래서?”

“그러다 보니 화물의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후추, 비단, 상아, 진주 같은 고가품도 있고, 치즈, 소시지, 기름, 양모, 같은 생필품도 있고, 유리와 도자기 같은 취급주의 화물도 있습니다.”

“조금 빨리 말해봐.”

로벨이 감질나서 재촉했다. 이안 선장은 웃음을 참고 명령에 따랐다.

“시장성이 있고 운반이 쉬운 것은 곧장 처리하지만, 지나치게 고가의 상품이나 장거리 운송이 힘든 상품은 바로 팔지 않고 은신처에 보관합니다.”

“왜요? 안 팔려서요?”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호른 경이 대답했다.

“꼬리가 잡힐까 봐.”

“꼬리요?”

“최고급 동방 비단이나 값비싼 귀금속을 취급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왕과 제후들이었다. 왕의 보물, 공후작의 재산을 건드리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보물지도는...?”

“해적의 은신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해적의 보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마녀 키르케는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테이블이 쪼개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딘지 알겠어? 자세히 봐봐. 호른 경은 인어의 바다 어디라는데?”

이안 선장은 인어의 바다에서 평생을 보내온 해적이자 상인이었다.

“발레아 제도 북쪽이군요. 자세한 위치는 직접 가서 눈으로 봐야겠지만,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진짜?”

“큰 배가 지나가기 힘들고, 작은 섬이 곳곳에 있어서 해적들이 은신처로 자주 사용하는 곳입니다.”

“그럼 그냥 해적 소굴 아닙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보물에 눈이 먼 기사와 모험에 환장한 마녀와 심심해서 몸부림치는 선장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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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 숨겨놓은 보물인지, 아니면 그냥 해적 소굴인지 모르지만 단서가 생겼다. 이안 선장은 로벨의 특명으로 선원을 모집했다.

여름이 막 끝난 시기라 출항하는 배가 많지 않았다. 급전이 필요한 선원, 도망갈 곳이 필요한 선원, 그리고 호기심 많은 선원이 찾아왔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전설의 보물을 찾으러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술과 약과 꿈에 취한 선원은 공작나리가 보물을 찾으면 금화 한 자루씩 나눠줄 거라 믿었다. 스스로 냉정하다 생각하는 선원은 보물찾기를 가장한 해적소탕이라 확신했다. 전투수당과 나포 포상금을 바라며 무기를 챙겼다.

해적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란 소식을 접한 어린 집사는 짜증을 내면서도 울프 용병단을 차출했다. 애꾸눈 볼포스, 싸움개 닥스, 겁쟁이 데비 등 실력 좋은 고참 용병이 대거 합류했다. 그래서 허풍쟁이 제이콥이 무척 좋아했다. 어린 집사 귀에 바람을 넣은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가장 게으른 매미도 숨을 죽이고 운명에 순응할 시절, 기사 2명과 용병 22명과 선원 36명을 태운 푸른고래 호가 닻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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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고래 호는 좋은 갤리선이었다.

중형선치고 선실 공간이 넓고, 항해속도가 빠르며, 잘 건조된 떡갈나무로 보강하여 튼튼했다. 그런 장점이 아니더라도, 처음 가진 배라 애착이 있었다.

“바람이 좋아요! 날아갈 것 같아!”

마녀 키르케가 뱃머리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려 발그레한 목덜미가 보이고, 꼬뜨 자락이 펄럭여서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이성에게 내성이 없는 어린 견습 선원이 얼굴을 붉히고 힐끔거렸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 생각했다.

‘노잡이 노예가 죽어나겠어.’

상쾌한 바람의 7할은 노잡이의 피와 땀과 비명이었다. 발밑에서 채찍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말하지 말자.’

로벨은 친구의 행복을 위해 현실을 외면했다. 그래도 다행히 노잡이의 고통은 길지 않았다. 인어의 바다 북쪽을 크게 휘감아 도는 북방 해류에 오르자 노를 젓지 않아도 순항이 가능했다. 노예장이 피에 젖은 가죽 채찍을 둘둘 말며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갑판장이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이제 갑판 선원이 일할 시간이었다.

“이 게으름뱅이들아! 각자 위치로! 돛을 펴고! 항해사님 지시를 받아!”

갤리선의 선원은 해적과 어부의 중간쯤 위치한 거친 사내들이었다. 노잡이 노예만큼은 아니지만 수시로 몽둥이질을 당했다. 때리는 갑판장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원이 반란을 일으키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이 갑판장이었다. 상식적으로 선장을 두드려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만만한 갑판장만 희생되었다. 배 위에서 선장의 권위는 임금과 비슷해서 어지간히 눈이 뒤집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해가 지면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런 선장도 조심스러울 때가 있으니, 선장 자리를 꽉 틀어진 개인 선주였다. 이안 선장이 조심스럽게 입실을 권했다.

로벨은 노을이 지는 서쪽 수평선에서 별이 떠오르는 동쪽 수평선까지 쭉 둘러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바람 따라 물길 따라 항해하는 선장에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지금 속도로 가면 이틀이지만, 날씨에 따라 최대 닷새까지 길어질 수 있습니다.”

로벨은 종잡을 수 없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육지에서 나고 자란 탓에 바다는 항상 신기했다. 저 많은 물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수평선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땅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가 끝나는 곳에는 땅이 있겠지.’

로벨은 명암이 짙어진 하늘을 보았다.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하늘을 보면 세상이 둥글게 보였다.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포클랜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땅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역시 나오길 잘한 것 같아.”

“예? 무슨 말씀인지...?”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본받아 이틀간의 항해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뱃멀미만 하지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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