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해자
로벨, 어린 집사, 펄프 대장, 호른 경 등은 무장을 풀기도 전에 강철성에서 온 기사와 마주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잘한 행동이었다. 핏자국이 남아있는 칼과 갑옷은 대단한 위압감을 주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들었소.”
도반 도트넘 백작이 직접 기사로 임명한, 그래서 충성심이 유난히 깊은 돌프 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적무패의 기사...’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기사. 자서전을 쓰면 위인전으로 출간될 영웅. 하루가 멀다 하고 전설을 늘려가는 군주. 승전 기록이 너무 많아 세 자릿수 이하 전쟁은 대수롭지 않게 생략해야 할 것이다. 주군의 가문과 척을 진 원수만 아니면 이런 식으로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돌프 경은 심호흡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방문목적을 밝혔다.
“우선 승전을 축하드리오. 나의 주인 또한 공작의 업적에 감탄을 금치 못했소.”
그 주인이 누군지 알기에 좋아하지 않았다. 돌프 경 역시 비슷한 이유로 길게 끌지 않았다.
“본인이 찾아온 것은 늑대성 소속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 때문이오.”
어린 집사가 먹잇감을 포착한 솔개처럼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중요한 문제니까 똑바로 짚고 가요! 더스틴 폴라 경은 우리 영주님께 충성한 기사가 아니에요. 잠시 손님으로 머문 것뿐이죠.”
리암 수사, 페리 피터 행정관, 그람 형제 징수관 등등 늑대성의 행정관리가 수차례 증언한 것이라 진위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의심하는 척은 할 수 있었다.
“봉토와 재화가 아니어도 우정으로 함께 할 수 있소. 더스틴 폴라 경은 공작을 따라 수차례 종군했다고 들었소. 그 관계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오.”
‘수차례 아니고 두 번인데... 그리고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중얼거렸지만 의미 없었다.
“그래서, 도반 도트넘 백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의 폼멜을 쓸어 만졌다. 로벨을 오랫동안 모셔온 측근들은 위험신호임을 알아챘다. 겁 없는 돌프 경에게 얼굴 근육을 총동원하여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돌프 경이 별안간 오크 흉내 내는 늑대성 식구들을 괴상하게 보고 계속 말했다.
“강철성의 적법하고 명예로운 주인을 비열하게 기습한 더스틴 폴라 경을 체포하여 옛 신의 이름으로 책임을 물을 것이오. 이에 늑대성의 협력을 요청하오.”
“협력?”
“늑대성을 비롯한 로드릭 가문의 모든 영지에서 자유로이 수색할 것을 허락하고, 더스틴 폴라 경의 신변이 확인되는 즉시 체포할 것을 약속해주시오.”
여기서 잠깐 기사와 기사가 아닌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은 금전적인 요구가 아니라 만족했지만, 로벨과 호른 경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요구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거요?”
앞서 말하였듯 돌프 경은 무적무패의 기사를 존중했다. 눈을 내리깔고 바로 양해를 구했다.
“무리한 요구란 것을 잘 아오. 허나, 백작을 암살하고자 한 무도한 자요. 그냥 넘어갈 수 없소. 로드릭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며, 만약 피해가 발생하면 강철성의 이름으로 보상할 것이오.”
로벨은 돌프 경의 요구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첫째, 이번 일은 도반 도트넘 백작이 의도한 게 아니다. 둘째, 더스틴 폴라 경이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다. 셋째, 그런 폴라 경을 찾지 못하고 있다.
로벨은 외지인이 영지 일에 관여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서로의 약점을 쥔 상황에서 먼저 선을 넘은 것은 로벨이었다.
“내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시오.”
돌프 경은 기꺼운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
강철성의 일이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밀밭처럼 따스한 평화가 찾아왔다.
“세수 확인, 예산 확인, 민원 확인, 송사 처리...”
로벨의 전쟁은 끝났지만, 어린 집사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동안 밀린 행정 업무가 산더미였다. 리암 수사나 페리 행정관이 일을 처리해도 최종 결정은 -로벨이 위임한- 어린 집사였기에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영지 돌아가는 사정을 A부터 Z까지 모두 꿰고 있어야 안심하는 편집증적인 성격 탓도 있었다.
반면, 병사와 무기 숫자만 아니면 두 자릿수쯤 틀려도 개의치 않는 로벨은 오랜만에 아야와 이야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언덕을 내려가 8할 정도 완공된 도시 외벽을 따라갔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성곽 탓인지, 빗물에 씻기지 않은 하얀 돌가루 탓인지, 조상 대대로 물려온 땅이 조금 낯설었다.
“컹! 컹!”
“크르르릉-!”
아야와 이야카가 성벽 위를 돌아다니는 인부를 향해 짖었다.
송아지만한 늑대들이 쫓아다니면 무서울 법도 한데, 공사 인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로벨이 늑대성을 비운 동안 아야와 이야카의 주된 일과가 인부들을 쫓아다니며 짖어대는 것이었다. 사람 손을 탔어도 늑대는 늑대라 영역 개념이 투철했다.
로벨은 털갈이가 끝나서 복슬복슬한 아야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이야카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난 안 만져줘?’ 로벨은 이야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성벽을 따라 걸었다.
개울이 굽이져서 꺾이는 곳에 아치형 배수구가 뚫려있었다. 우기 때를 대비해 큼직하게 만들었는데, 너무 커서 수비가 걱정되었다.
“쇠창살을 이중으로... 아니야. 수문을 만들자.”
어린 집사와 건축가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탄생했다. 이런 것 외에도 건축가에게 시련을 안겨 주는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남쪽 성문이었다.
“다리가 왜 다리입니까? 다리니까 다리 아닙니까? 그런데 다리가 아닌 곳에 다리를 왜 만듭니까?”
참 난해한 화법이었다. 로벨은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모처럼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단서가 주어졌다.
“저 개울을 끌어와서 해자로 삼는다지 않은가! 내가 책임지고 물을 끌어올 테니까, 자네들은 도개교를 만드시게!”
“아니, 공사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해자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야 만들지요! 다짜고짜 다리부터 만들라고 하면 어쩝니까?”
로벨은 주춧돌 위로 아귀를 맞추며 올라가는 성문을 보았다. 성벽과 달리 복잡한 기술과 디자인이 필요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곳은 사람을 들이면 안 되는 전쟁에서 가장 취약한 장소였다. 상공업이 기반인 도시의 성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과 물자가 원활히 오고가려면 크고 넓고 높아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그런데 그 접근성은 앙심을 품은 적에게도 적용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렇게 탄생한 최첨단 건축&공학기술이 도개교였다. 평시에는 다리로 사용하다가 전시에는 위로 끌어올려 ‘문’ 자체를 없앴다.
이론적으로 간단하지만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벼우면서 튼튼한 나무와 작은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도르래와 신뢰할 수 있는 고정 장치가 필요했다.
포비아 왕국 전체를 통 털어도 도개교가 갖춰진 도시는 한 손에 꼽혔다. 그러다 보니 설계자와 기술자 사이에서 이런 말썽이 생겼다. 로벨은 땅의 주인 자격으로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해자부터 만들어.”
건축과 토목 분야에서 내놓으라 하는 실력자들은 젊고 낭랑한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금방 표정이 풀렸다.
“앗! 공작 나리! 이런 곳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로벨과 안면이 있는 노스폴드 시티 출신 건축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꼭 안면이 없어도 로벨이 늑대성 공작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늑대성에서 어느 누가 늑대를 데리고 산책할까.
자유도시의 자유민으로 나름 명망이 있는 건축가는 모자를 벗고 묵례했지만, 신분이 낮은 농민들은 고귀한 공작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냅다 무릎을 꿇었다. 로드릭 시민은 아니지만, 넓게 보면 로드릭 령(領)에 속한 사람들이라 이상할 것은 없었다.
“성문 앞에 해자를 만들어. 물은 나중에 끌어오고. 그럼 되잖아?”
언쟁을 벌이던 두 사람이 서로를 힐끔거리며 고자질했다.
“아까부터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멍청한 녀석들이...”
“개울의 방향을 트는 것이라 쉽지 않습니다. 수량(水量)을 알 수 없으니까 강폭도 가늠할 수 없고, 다리 길이도 알 수 없죠. 애초에 가능한지도 모르겠고요.”
“그 말은 내 실력을 못 믿는다는 거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아, 그거구나?”
로벨은 비로소 요지를 파악했다. 성문 앞으로 개울이 흐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로벨은 오직 로벨만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도시 전체에 해자를 만들자.”
“...예?”
“전부 파네. 그리고 상류에서 물을 받으면 쉽잖아.”
쉬우면서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그럴만한 페닝이 있다면 말이다.
@
“해자까지 만들어요?!”
어린 집사가 괭한 눈으로 소리쳤다. 현기증이 도는지 이마를 짚고 휘청거렸다. 로벨이 깜짝 놀라 부축하자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도시에 해자를 만들자고요?”
“응.”
로벨은 해자가 있으면 방어할 때 좋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해맑게 긍정했다. 실행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랐다.
“공사비용과 유지비용은 어쩌고요?”
“땅만 파면되는데, 얼마나 들겠어?”
“마을 배수로 파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사람과 말이 빠질 정도로 깊게 파야 하잖아요. 기초공사도 다시 해야 하고. 그럼 공사기간이 수십 일 늘어나요. 페닝이 얼마나 나갈지 생각해보세요.”
“마, 많이 나갈까?”
“엄청 많이 나가죠! 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싸는 양 만해도 어지간한 용병단 수준이라고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왕과 제후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예산이었다.
“결국 돈이 필요하네...”
잉그비아 왕국과 전쟁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을 텐데, 살짝 아쉬웠다.
“사채업자한테 빌릴까?”
“저 숨넘어가는 꼴 보고 싶으면 그리 하세요.”
로벨은 돈 나올 곳을 찾아 고민했다. 세금 늘리는 것도 안 되고, 사채 빌리는 것도 안 되면 씀씀이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줄일 수 있나?’
사치와 향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기사답지 않은 삶이었다. 정말 수도사가 되었어도 잘 살았을 것이다.
‘울프 용병단 결원 보충을 내년으로 미룰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벨의 가장 큰 힘이 정예화된 사설 용병단이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나 류트 프란시스 공자를 생각하면 숫자를 줄일 수 없었다
“헨리 상회장한테 물어보자.”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를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성문을 나서기 전에 다른 전문가가 마주쳤다.
“보물섬?”
마녀 키르케가 헥헥! 거리는 아야와 이야카를 씻기며 말했다.
“바다사자 남작님이 말해줬어요. 해적이 숨긴 보물섬이 있다고요.”
로벨은 설마 하면서도 솔깃했다.
“해적이 왜 보물을 숨겨?”
“해적이니까요!”
어린아이 같은 논리인데 반박할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럴듯하기도 했다.
교역선 하나 털면 금화와 은화는 물론, 부르는 것이 값인 후추와 비단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을 어찌 관리할까.
해적이 상회나 조합에 재산을 맡길 리 없었다.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해적선에 계속 싣고 다닐 수도 없었다. 여기서 그럴 듯한 가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섬에 숨겨두는 것이었다.
‘재미있으라고 그냥 들려준 이야기 아닐까?’
로벨은 마지막으로 의심했다. 쥬드 맥켈런 남작은 보기보다 자상했다. 마녀 키르케가 시집 못 간 딸아이 같아서 아무 이야기나 들려준 건지도 모른다.
“여기 지도도 받았어요.”
“지도?”
“에헴! 보물지도에요.”
로벨은 맥켈런 남작의 넷째 수양딸이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