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7화 (287/605)

287화. 암살

잉그비아 왕국과의 전쟁이 끝났다.

시가지에서 포격을 받은 잉그비아 왕국군 2,000여 명은 괴멸되었다. 포탄에 맞아 죽은 병사는 30명이 안 되는데, 서로 짓밟고 뭉개며 300명 이상이 압사했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이 동문의 부대를 이끌고 왔을 때는 전의를 잃은 패잔병뿐이었다.

총 병력의 절반을 잃은 로버트 엘리엇 백작은 협상을 요청했다. 검은 숲 침략에 대한 전쟁배상, 포비아 왕국 포로 해방, 잉그비아 왕국 포로의 몸값 지불, 향후 불가침조약 등등으로 말이 좋아 협상이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꽤 아슬아슬한 전개였다. 엘리엇 백작의 항복 직후 북쪽 바다에서 잉그비아 왕국의 함대가 나타났다. 카락 2척에 갤리선 2척으로 최소 800명의 전력이었다.

로벨의 작전이 하루만 늦었어도, 혹은 잉그비아 왕국 함대가 하루만 일찍 왔어도 항복문서에 도장 찍는 것은 로벨과 제임스 공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에 만약은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 함대는 화살 한 번 쏴보지 못하고 엘리엇 백작과 병사들을 태워 돌아갔다.

올해에는, 어쩌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도 잉그비아 왕국의 침공은 없을 것이다. 볼탄 반도에서 2천 명, 검은 숲에서 2천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니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꼬시다고 할 수 없었다. 고르곤 공작이 의도한 결말이기 때문이다.

고르곤 공작은 즉위에 반대하는 기사들을 모조리 쳐내고, 약화될 때로 약화된 왕실을 손쉽게 장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드워드 3세인데...”

잉그비아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평가가 극과 극이었다. 왕국의 안위를 책임진 성군이란 칭송과 귀족을 업신여기고 자유민을 억압하는 폭군이란 비난이었다. 어느 쪽이 맞는지 궁금해서 어린 집사에게 물으니 싱겁게 대답했다.

“둘 다 맞겠죠.”

“어떻게?”

“귀족과 부르주아는 욕하고, 농민과 가난한 노동자는 좋아하니까요.”

“아하?”

“멍청한 사람이에요. 세상은 결국 권력과 재물로 움직이는데, 가난뱅이한테 칭찬받아서 뭐해요? 그러니까 왕좌에서 쫓겨나죠.”

어린 집사 말이라면 사과나무에서 포도가 나온다 해도 믿어줄 로벨이지만, 이번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농민을 우습게 여기면 안 돼.”

로벨이 정색하자 어린 집사는 찔끔해서 변명했다.

“우스운 게 아니라, 그냥 힘이 없으니까요. 글도 모르고, 싸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고...”

귀족과 부르주아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아니, 농민들도 그리 생각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어. 농민이 일을 안 하면, 그러니까 전염병이 돌아서 영지를 떠나거나 귀족의 권리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가치가 없어져.”

“그런 겁 많고 소심한 인간들이 그럴 리가요.”

“얼마 안 됐잖아. 농민이 반란을 일으킨 지.”

빌터 런치 경이 주도한 프란시스 가문 복권 운동이지만, 주축이 된 것은 분명 농민이었다.

“영주님이 가볍게 제압했잖아? 그때 자른 손가락이 작은 동산인데요.”

“응.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로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동부평야 밖에 농민이 동조했으면 고르곤 공작이나 류트 공자와 비교할 수 없는 위협이 되었을 거야. 당장 먹을 것이 줄어들잖아?”

어린 집사는 먹을 것 타령이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었다. 하지만 로벨은 진지했다.

“네 말이 맞으면 에드워드 3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거야. 칼을 차고 금화를 쌓는 것은 귀족과 부르주아지만, 그 기반을 일구는 것은 농민이니까.”

“칫. 결과적으로 칼과 금화에 쫓겨났잖아요.”

“지금은 그래.”

“지금이요?”

“응. 지금만.”

로벨은 근 10년 동안 영지를 다스리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기사도 사람이라 언제까지 칼을 빼 들고 있을 수 없어. 밥을 먹고 잠을 자려면 칼을 치워야 해. 그때 시작될 거야.”

그 칼이 진짜 칼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보았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전쟁비용이 많이 나갔으니 한 자루 팔자고 할까봐 걱정되었다. 어린 집사를 너무 옹졸하게 본 생각이었다. 지금의 로드릭 가문은 먹고살 만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쏭달쏭한데... 뭐, 두고 보면 알겠죠.”

로벨도 그리 생각했다. 귀족과 부르주아가 고르곤 공작에게 넘어가도, 농민과 노동자가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하면 왕위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 국왕 폐하가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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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승리하고, 블랙우드 시티를 완전히 되찾은 제임스 공작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좋아했다. 승전의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두 발로 다니지 않는 것도 기꺼이 맞이할 정도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불참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청옥성이 걱정되어 보급을 마치자마자 떠났다. 해적하고 별 차이 없는 잉그비아 왕국 해군이 북해를 장악하고 있으니 불안할 만했다.

로벨 역시 회군을 서둘렀다. 영주가 영지를 오래 비우면 필히 말썽이 생겼다. 보통은 영지민의 이탈이나 징수관의 착복이나 재무관의 비리지만, 드물게 군사적 마찰이나 와이프의 바람 같은 말썽도 있었다.

‘나하고 상관없나?’

로벨은 괜찮아도 로벨을 따라 종군한 봉신들은 달랐다. 까마귀 성의 새 주인도 찾아야 했다.

로벨이 작별을 고하자 제임스 공작이 격하게 아쉬워했다.

“로드릭 공작! 공작을 만난 것은 나와 내 가문의 행운이오!”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최고의 찬사였다. 로벨은 기사답게 겸양했지만, 어린 집사는 주판알을 위아래로 튕기며 소모된 비용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되는 만큼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네 자릿수로 오르고 내리는 비용에 질겁해서 아쉬움을 치웠다.

“도시도 재건해야 하고, 용병 임금도 줘야하고, 또 뭐냐...”

“...그런 분이 축하연회를 왜 그리 화려하게 열어요?”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며 주판알을 집어넣었다. 공작쯤 되면 빚을 내서라도 위신을 세워야 하니 이해했다. 로벨처럼 소탈한 게 이상한 것이다.

아무튼, 로벨과 로벨 로드릭 군은 짐을 꾸려서 남쪽으로 출발했다. 먼 길을 돌아가게 되었지만, 승리 후 개선이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용병은 전쟁수당을 챙길 수 있어 기쁘고, 농민병은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아 기뻤다. 무엇보다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했다.

검은 숲의 주민들은 또다시 나타난 군대에 기겁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도 약탈하긴 마찬가지니까.”

“약탈이 아니라 징발! 기사 나리가 서운해 하신다.”

로벨은 딱히 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쓰이기는 했다.

‘예전에 차용증을 주고 지나간 마을이 이 근방 아니었나?’

왕위계승전쟁 당시 식량을 징발한 곳이었다. 로벨은 안장주머니를 뒤적였다. 숫돌, 부싯돌, 부싯깃, 수통, 기름통 등등이 가득한데, 페닝은 은화 부스러기 몇 개가 전부였다. 보리빵에 맥주 한잔 하면 끝날 금액이었다.

‘성을 가지고 용병단을 이끌면 뭐해...’

유라피아 대륙에서 이렇게 가난한 공작은 또 없을 것이다.

로벨은 재산을 꽉 쥐고 있는 어린 집사를 불렀다. 검은 숲은 자주 오기 힘드니 기왕 온 김에 빚을 갚자고 말했다. 어린 집사가 펄쩍 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차분했다.

“저쪽은 갚을 거라 기대도 안 할 텐데요?”

“그러니까 더욱 갚아야지.”

“세상에 어느 기사가 그래요?”

아이러니한 말이었다. 기사는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지만, 그 명예의 대상은 귀족과 귀부인 한정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소와 돼지를 마구 대한다고 비난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갚으면 기뻐할 거야. 그러면 다음에 왔을 때 기꺼이 우리를 돕겠지. 아니, 최소한 숨거나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어린 집사는 ‘지 까짓것들이 도망가 봤자지!’ 라고 생각했지만, 로벨의 초롱초롱한 눈 탓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로드릭 시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까짓! 갚을 수 있는 만큼 갚고 가죠!”

그 결정은 좋은 결정이었다. 빚을 열심히 갚자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평소에도 평판이 좋았기에 로벨 로드릭 군이라 하면 안심하고 받아주는 마을이 생겼다. 아직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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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로벨 로드릭 군은 까마귀 계곡을 지나 북부대로를 따라가다가 늑대도로로 남하했다. 개천을 서너 개 건너고, 언덕을 대여섯 개 넘자 로드릭 시티의 성벽이 반겨주었다.

마녀 키르케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도시 성벽에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멋있어요!”

북쪽 숲 바로 아래에서 개울을 넘어 쭉 내려오다가 늑대성 언덕을 휘감아 돌며 동쪽으로 뻗은 커다란 외성이었다. 실용과 위용 모두 블랙 우드 시티 성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을 몽땅 때려 박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어린 집사가 애증 어린 눈으로 로드릭 시티 성벽을 보았다. 로드릭 가문이 공작 가문이 되어도 가난한 원흉이었다.

“오! 영주님이 오셨다!”

추경지에서 허리 굽혀 일하던 농부들이 로벨과 로벨을 따라 의기양양하게 행군하는 울프 용병단을 보고 일손을 멈췄다.

“이번에는 어디를 다녀왔지?”

“검은 숲이라더구만.”

“검은 숲? 그런 곳이 있는가?”

“그게 뭐 중요한가?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지.”

“거, 용병 총각들 표정 봐서 이기셨나 보오.”

“암! 당연하지! 우리 나리님이 질 리 없잖은가!”

젊은 영주님을 싫어하는 영지민은 없었다. 유난히 충성심이 강한 영지민은 일손을 팽개치고 길가로 나가 ‘로벨 로드릭 공작님 만세!’를 외쳤다. 로벨은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린 처녀들이 자지러졌다. 드물지만 어린 총각도 헐떡거렸다. 호른 경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개선식은 생략되었다. 기운 넘치는 젊은 용병들은 아쉬워했지만, 푹 쉬고 싶은 고참 용병들은 좋아했다. 용병들의 실질적인 리더 펄프 대장은 당연 후자였다. 그러나 별명에서 직책이 되어버린 ‘대장’이란 단어가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고!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리암 수사가 수사복을 펄럭이며 뛰어왔다. 여름에 그다지 권장하지 않는 복장이라 땀투성이였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대신해서-결코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지 경영을 책임진 리암 수사의 공로를 고려해 모닝스타에서 내려 맞이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호른 경이 질투할 만큼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옛 신의 품에 귀의한 리암 수사는 인간의 시기, 질투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잘 지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주님이 손님으로 모신 동방의 더스틴 폴라 경 말입니다! 그자가 사고를 쳤습니다!”

로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검은 숲으로 떠나기 전부터 마음에 걸린 일이었다.

“강철성?”

“예? 그걸 어떻게...”

로벨은 계속 말하라고 눈짓했다. 리암 수사는 한결 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예예. 강철성입니다. 더스틴 폴라 경이 강철성의 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을 기습했습니다. 그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는데, 강철성에서 사람이 와서 영주님과 폴라 경의 관련성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영주님이 떠돌이 기사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어린 집사가 화를 냈다. 리암 수사는 “그야 당연히...” 하고 말을 꺼내다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그, 그것이, 영주님이 사주해서 암살기도 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합니다.”

로벨이 어리둥절해하자 리암 수사가 불편한 얼굴로 설명했다.

“강철성하고 사이가 안 좋으니까요. 게다가... 웨일 도트넘 백작을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으니까요. 전 당연히 누명이라 생각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도 많아서... 영주님? 영주님?”

미간의 주름이 콧등까지 내려왔다. 로벨은 칼자루를 잡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로벨의 진짜 적은 고르곤 공작도, 잉그비아 왕국군도 아니었다. 악마추종자와 악마추종자가 불러낸 마도의 수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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