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점화
성벽 수비를 비울 수 없어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호른 경, 제임스 공작과 수행기사 1명만 항구로 이동했다. 조촐한 인원이지만, 성의 없다고 탓할 사람은 없었다. 두 공작이 함께 마중 나온 것은 국왕 폐하 외에 처음일 것이다.
“저게 벌써 수리됐네요?”
공작과 공작의 측근들은 고기잡이 어선 사이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밀어 넣는 범선을 보았다.
세 개나 되는 돛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었다. 거미도 울고 갈 만큼 복잡한 돛줄이 이리저리 당겨지고, 거기에 맞춰서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돛이 바람을 이리저리 비켜냈다.
선수와 선미가 지나치게 높아 도시의 빌라처럼 보이며, 노가 없는 대신 포문이 좌우로 8개씩 뚫려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제 무장 카락 ‘바다사자 호’의 모습이었다.
“...진짜로 바다사자였어요?”
“응.”
비공식 맥켈런 남작의 별명이 공식 선명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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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자 호는 매우 느리게 입항했다.
큰 범선이 작은 항구에 들어올 때는 노 젓는 보트를 견인선으로 쓰기도 하는데, 항해 솜씨를 자랑하려는 건지, 마중 나온 공작에게 잘 보이려는 건지 기어이 단독으로 정박했다.
“흠흠. 검은 숲과 볼탄 반도의 두 공작께서 이리 반겨주시니 감동입니다. 크흠.”
맥켈런 남작이 으쓱거리며 가교를 내려왔다.
‘자랑이네.’
‘자랑이야.’
로벨 이하 육지 사람들은 늙은 사자를 게슴츠레 쳐다보았다. 맥켈런 남작도 무안한지 헛기침을 조금 했다.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소만, 전황이 그리 안 좋소?”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소.”
“포클랜드의 기사들이 와주면 한결 좋았겠지만...”
“그 배부른 돼지들한테 무엇을 바라겠소.”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지방 귀족은 국왕 이하 중앙 귀족에게 쌓인 게 많았다. 외국과 트러블 일으키는 것은 국왕과 중앙 귀족인데, 외국이 쳐들어오면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은 국경의 영주들이었다.
볼탄 반도와 검은 숲과 청옥섬의 주인들은 포클랜드 귀족을 물고 뜯고 씹고 뱉은 후 이만하면 본론을 꺼내도 무례하지 않겠다 싶을 때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물음표가 붙었지만 물음이 아니다. 맥켈런 남작 성격상 불가능했으면 애초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캘버린 포 4문과 팔콘 포 12문이오. 화약과 기름을 60상자 가져왔소.”
잉그비아 왕국의 전함을 노획하면서 얻은 것도 있고, 로벨이 지원한 것도 있지만, 맥켈런 남작의 개인 지출도 상당할 것이다. 로벨은 고마움은 표시하고 기운차게 말했다.
“그럼 바로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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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성에서 온 기사와 선원들은 주인 잘못 만나 험한 일에 끼어들었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폐허가 된 집과 넝마 차림의 시민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딱히 친분은 없지만, 그래도 같은 포비아 왕국인이었다. 외국 군대에게 당한 꼴이 달갑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닦달하거나 다독이지 않아도 빠르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늘을 오른 태양이 바다를 향해 몸을 뉘일 때, 로벨이 있는 남쪽 성문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주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은 예행연습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시작도 못하고 발각될 가능성이 컸다. 제임스 공작, 맥켈런 남작, 그리고 실전경험 풍부한 용병들을 믿기로 했다.
“호른 경, 켈트 경, 동문의 수비를 강화하시오. 브릭 경, 바이란 경, 시민이 모두 대피했는지 확신하시오. 만약 남아 있는 시민이 있으면 선착장으로 보내시오. 흑단성의 성문은 이 시간 이후 열리지 않을 것이오.”
호명된 기사들은 가슴에 주먹을 부딪치고 흩어졌다. 로벨은 마지막 남은 측근에게 말했다.
“어린 집사는 키르케와 함께 바다사자 호로 가.”
“영주님 보필은 누가 하고요?”
어린 집사가 숏소드와 망고슈를 꺼내며 호기부렸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배에서 기다려. 거기가 가장 안전해.”
“영주님이 안전하지 않은데, 제가 어떻게 안전한 곳에 가요?”
“그런 말 하지 마. 키르케를 지켜줘야지.”
어린 집사는 마녀 키르케 이름에 움찔했다. 로벨은 어른 집사가 되어가는 어린 집사 모습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러나 오해였다.
“누가 누구를 지켜요? 그 마녀가 저보다 사나운데요? 이리 와서 싸우라고 하세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보다. 로벨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타일렀다.
“그런 말도 하지 마.”
“칫. 그럼 무슨 말을 해요? 마녀랑 손잡고 얌전히 빠지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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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 빠져나갔습니다!”
로벨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화살을 멍하니 보았다. 겨냥하고 쏘는 것이 아니었다. 여장(女墻) 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하게 마구잡이로 쏘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남은 화살을 몽땅 쏟아 붓는 모양이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몸을 일으켰다.
“풋맨 중대도 철수해! 이제 예비대도 필요 없어!”
로벨은 성벽을 꾸역꾸역 기어 올라온 잉그비아 왕국군 얼굴을 주먹을 후려치고 급조한 사다리를 밀었다.
사다리 끝에는 성벽에 걸리게 갈고리를 달아 두었는데, 재료가 안 좋은지, 아니면 솜씨가 부족한지 휘어진 부분이 뚝! 부러져 있었다.
“으헉! 으허억-!”
눈탱이가 나가서 보이는 게 없는 병사는 필사적으로 사다리에 매달렸고, 로벨은 병사의 체중을 추로 삼아 반대쪽으로 넘겼다.
“어, 어어, 어! 넘어간다!”
“이 개자식들아!”
사다리에 매달린 병사들이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로벨에게 얻어맞은 병사와 중간쯤 올라온 병사는 몸 성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로벨의 억센 팔뚝이 국지적인 승리를 일궜지만, 전체적으로 패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적이 성벽 위로 올라와 칼부림이 벌어진 곳이 여럿이었다.
사정이 안 좋은 것은 성벽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앗! 잉그비아 놈들이 들어온다!”
“기사 나리! 성문이 뚫렸습니다요!”
예상보다 빨랐다. 버팀목을 전부 뺀 것이 잘못이었다. 빗장을 하나 더 뺀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흑단성으로 철수한다! 흑단성으로 철수한다!”
로벨은 눈에 잘 띄는 아론다이트를 휘두르며 성벽 위의 병사를 지휘했다. 아군의 눈에 잘 띄면 적군의 눈에도 잘 띄는 법이라 성벽 아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명성 자자한 잉그비아 왕국 롱보우맨이라 정확도가 대단했다.
“아얏!”
화살 한 대가 폴드런을 스치고 튕겨나갔다. 화살이 빗겨가라고 물결처럼 파놓은 홈이 제 역할을 다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아팠다.
로벨은 사격각이 안 나오는 도시 쪽으로 몸을 피해서 계속 명령했다.
“펄프 대장! 부상병을 수습해! 크로스보우 1, 3소대는 성문 쪽으로 집중 사격해! 애꾸눈! 애꾸눈은 이쪽을 맡아! 외팔... 외팔이 어디 갔어?”
“아래쪽 녀석들 챙기러 갔습니다요.”
“자리 지키고 있으라니까!”
로벨은 혀를 차고 몸을 일으켰다. 성벽 위로 화살을 나르는 보충병이 줄행랑 치고, 사다리를 밀어내는 장창병도 장대를 버리고 후퇴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성문이 뚫리자 무리해서 사다리를 타지 않고 성문으로 몰려왔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성벽 위의 병력을 손실 없이 빼낼 수 있었다.
남은 부대는 악착같이 바리게이트를 지키는 울프 용병단 맨앳암즈 1, 2소대와 그들을 지원하는 울프 용병단 크로스보우 1, 3소대였다.
“내가 내려가면 바로 전부 철수해!”
“아, 앗! 기사 나리! 잠깐요!”
허풍쟁이가 손을 내밀었지만 한발 늦었다. 로벨은 19피트 높이 성벽에서 겁 없이 뛰어내렸다. 두 자루 칼과 갑옷 무게를 생각하면 자살행위였다.
“꺄앗!”
로벨도 막상 뛰고 나니까 너무 높아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죽을 생각은 없었다. 성문 옆에는 임시로 만든 마구간과 화재에 대비한 모래더미가 있었다. 건초 지붕을 뚫고 모래산 위에 내려앉았다.
쿵-!
완충재가 있어도 몸무게 + 갑옷무게를 더한 낙하충격이 대단했다. 흙먼지와 지푸라기가 시야를 가렸다. 단어 그대로 박 터지게 싸우던 병사들이 동작을 멈췄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정적이 생겼다.
“...뭐야?”
‘싸움개’ 닥스가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도끼가 날아들었고, 쇠와 쇠가 부딪쳤다. 피 말리는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조금 달랐다. 조금 많이 달랐다. 엉덩이뼈로 전해지는 충격을 간신히 삼킨 로벨이 흙먼지를 뚫고 뛰쳐나왔다. 설마하니 사람이 떨어졌다고 생각 못한, 혹은 사람이면 무사할 리 없다고 생각한 잉그비아 왕국군은 무방비하게 옆구리를 내줬다.
“하앗!”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당기고, 오른발에 체중에 실어 깊게 찔렀다. 무게감이 있는 찌르기였고, 어설프게 만든 가죽갑옷으로 막을 수 없는 찌르기였다.
푹-!
아론다이트의 새하얀 칼날이 언더랜드 출신의 이름 모를 병사 갈비뼈 사이로 파고들었다. 폐가 상했는지 핏물이 한 움큼 쏟아졌다.
로벨은 어깨로 병사를 밀어내고 투구를 잃은 병사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시선은 머리를 향했지만 칼은 다리를 향했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한 병사는 무릎이 작살나는 고통 속에서 사기꾼을 외쳤다.
로벨의 활약은 무시무시했다. 사냥개 무리를 때려잡는 회색 곰 같았다. 포효 한번 할 때마다 두세 마리씩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거친 곰도 지치면 당하는 법이다. 적은 성문 밖에서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크로스보우맨이 저지하지 않았으면 칼 맞기 전에 밟혀서 압사 당했을 것이다.
로벨은 적이 질려서 한 걸음 물러나자 그 틈에 바리게이트를 넘었다. ‘싸움개’ 닥스가 숨을 차서 헐떡였다.
“기사 나으리! 여기 어떻게...!”
“예정대로야. 걱정할 것 없어.”
애꾸눈 볼포스와 크로스보우 1, 3소대는 로벨이 맨앳암즈 중대에 합류하자 바로 무기를 챙겨 튀었다. 동문쪽은 아직 건재하니 그쪽으로 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로벨은 그럴 수 없었다. 등 뒤의 텅 빈 시가지를 보았다. 파나케아 투구의 신묘한 힘으로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로벨은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아론다이트를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내가 바로 로벨 로드릭이다! 잉그비아 왕국의 겁쟁이들은 모두 덤벼라!”
그 호통에 주된 반응은 세 가지였다. 겁먹고 물러나는 병사, 노성을 지르며 분노하는 기사, 탐욕에 젖어 눈알을 굴리는 용병이었다. 셋 중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로벨은 용감한 대사와 달리 몸을 돌려 도주했기 때문이다. 언행불일치의 참된 표본이었다. ‘싸움개’ 닥스가 당황해서 따졌다.
“아닛! 기사 나리! 다 덤비라면서요?”
“...상대해준다곤 안 했잖아.”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오나 보다. 맨앳암즈들은 얼빠진 잉그비아 왕국군을 향해 시원하게 웃어주고 고용주를 따라 달렸다. 중장비 탓에 철컥! 철컥! 소리가 요란했다.
“뭐, 뭣하냐! 포비아 왕국 총사령관이 도망친다!”
“잡아! 저놈만 잡으면 승리한다!”
외성을 뚫었으면 최대한 빨리 내성을 공격하는 것이 전쟁 상식이었다. 적이 후퇴한 병사를 수습하고 방어시설을 가동하는 것을 막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 지휘관이 눈앞에 있으면 사정이 달랐다. 전공과 포상에 눈이 먼 기사와 병사들은 로벨을 쫓아 엄한 시내로 달려갔다.
멀리서 지켜보던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 로버트 엘리엇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누가 봐도 수상하고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쫓지 마! 쫓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전해!”
전령이 아무리 빨라도 이미 도시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보다 빠를 수 없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시가지 깊숙한 곳으로 숨었다. 치밀하게 계획한 도주로라 막힘이 없었다. 반면, 시내 지리를 모르고 무작정 앞사람만 쫓아 달리던 잉그비아 왕국군은 건물 사이에 갇혀버렸다. 눈치 빠른 병사가 괴이함을 깨달았다.
“왜 이리 조용해?”
전쟁 중에도 시민은 집을 비우진 않는다. 대문과 창문을 꽁꽁 걸어 잠그긴 하지만 도망치진 않았다. 시골이면 아성으로 피신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딱히 피할 곳도 없었다. 그런데 도시 외곽도 아니고 번화가 한복판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가만, 이거 무슨 소리야?”
사람 소리는 없는데, 기이한 쇳소리가 울렸다. 호기심이 불안감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3층짜리 다세대 빌라 지붕 위로 쇳덩이가 나타났다. 불안감이 공포심으로 바뀌는 것도 금방이었다.
“저, 저거... 대포잖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오른쪽 옥상에서 하나. 왼쪽 테라스에서 하나. 뒤쪽 발코니에서 하나... 이글거리는 횃불과 시꺼먼 포구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암시했다.
“함정이다! 도망쳐!”
“비켜! 비켜! 비키라고!”
상황판단이 끝난 병사들은 무기를 팽개치고 뒤돌았지만 이미 늦었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후속부대와 패닉을 일으킨 옆 전우 탓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무심히 지켜본 북해의 사자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