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5화 (285/605)

285화. 비밀

세상을 살다 보면 종종 감정이 극대화될 때가 있다. 끔찍하게 몸이 아플 때, 일확천금의 꿈을 이뤘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등등...

“동문! 동문으로 예비대를 보내! 넘어온다!”

“죽어! 죽어! 개자식들아! 죽엇!”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를 때도 그러했다. ‘살고 싶다’와 ‘죽여야 산다’는 가장 원초적인 명제만 가지고 모든 감정을 하나에 집중했다. 살의(殺意)였다.

“적들도 조급한 모양이야.”

“그렇겠죠. 벌써 3일째잖아요.”

볼탄 반도&검은 숲 연합군과 잉그비아 왕국군의 블랙우드 시티 공방전이 한창이었다. 공성과 수성에서 누가 유리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구태여 평가하자면 로벨 로드릭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이었다.

“지금이다! 부어라!”

펄프 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용병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자기 몸보다 소중히 보호한 기름 단지를-성벽 위에서 깨지면 대참사다- 여장 사이로 끌어올렸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잉그비아 사수들이 대여섯 명을 저격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액체까지 막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기름이다!”

“성벽에서 떨어져! 떨어지라고!”

싸구려 양털기름부터 최고급 고래기름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그 양이 엄청났다. 잠깐이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콸콸콸-

성벽 아래 옹기종기 모인 잉그비아 왕국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시는 기름에 패닉을 일으켰다. 미끈거리고 냄새나는 것은 부차적이었다. 기름 다음에 무엇이 날아들지는 자명했다.

“아, 안 돼...!”

전쟁에서 안 되는 일은 없었다. 대상이 적군이면 더욱 말이다.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횃불을 떨어트렸다.

“끄아아아악-!”

“불이야! 불이야!”

돌로 쌓은 성벽 앞에 불로 만든 성벽이 세워졌다. 자재는 충분했다. 인간의 몸은 의외로 잘 타는 재질이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

눈 깜짝할 사이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 로버트 엘리엇 백작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보다 끈질기군. 제법이야.”

기사들의 사기를 생각해서 허세를 섞었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벌써 3일째 소모전을 치르고 있었다. 보급이 끊긴 것은 11일이 지났다. 식량이 바닥났고, 화살도 부족했다. 말을 가진 기사들을 보내 주변 마을을 수색하고, 손재주 좋은 병사들을 모아 화살을 제작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엘리엇 백작, 철수 명령을 내리시오.”

“불이 꺼질 때까지 접근할 수 없잖소. 병사들을 쉬게 합시다.”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는 기사들이 속 편히 후퇴를 종용했다. 엘리엇 백작은 쇳덩이 휘두르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기사들이 한심하다 못해 혐오스러웠지만, 꾹꾹 눌러 티 내지 않았다.

“퇴각 나팔을 부시오. 적이 추격할지도 모르니, 경들은 무장을 갖추고 대기하시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그 유명한 로벨 로드릭 공작과 겨룬다는 말에 기사 종자를 불러 창과 방패를 챙겼다.

‘물론, 나올 리 없지.’

로벨 로드릭 공작은 저 멍청한 기사들과 달랐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전사자 교환비가 1대 7~8이었다. 퇴로가 막혀서 물러날 곳도 없었다. 버티기만 해도 승리하는데, 뭐 하러 성문을 열고 나올...

뿌우우웅-! 뿌웅-!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열렸다!”

“포비아 왕국 기사들이다!”

엘리엇 백작은 그만 당황했다.

“경이 왜 거기서 나와?”

포비아 왕국 기사들이 불타는 해자를 건너 후퇴하는 잉그비아 왕국군을 덮쳤다. 하얀 투구와 하얀 말을 가진 로벨 로드릭 공작이 선두에서 피보라를 일으켰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이 노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하...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기사로군.”

@

엘리엇 백작의 고충은 로벨의 고충이기도 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퇴각하자 볼탄 반도&검은 숲 기사들은 우르르 찾아와 모질게 배웅하자고 강력히 건의했다. 로벨은 뭇 기사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적 기병대가 요격 나오면 바로 후퇴하시오.”

기사들은 말 잘 듣는 6살 꼬마처럼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로벨은 화사한 얼굴로 ‘거짓말하지 마시오’ 핀잔주었다. 기사들은 속마음을 들켜 머쓱하게 코밑을 긁적였다.

적의 기사가 이름을 밝히고 덤비면 앞뒤 재지 않고 응수할 것이다. 로벨이라도 그럴 것이니 못났다고 타박할 수 없었다.

“적의 본대가 반전하면 후퇴해야 하오. 그것은 약속하시오.”

로벨은 두 번, 세 번, 네 번 다짐을 받은 후 모닝스타에 올랐다. 그랜드 챔피언과 함께 돌격하게 된 검은 숲 기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기사 종자를 윽박질러 무기를 가져오게 했다.

“기사님...”

“제발 몸조심하세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무기와 투구를 건넸다. 로벨은 해비 랜스를 수직으로 세우고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로벨의 뒤로 세부적인 디자인만 다르지 비슷한 모양의 풀 플레이트 기사 50명이 도열했다. 완전무장한 기사들의 행렬은 멋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로벨은 흥분한 기사와 감탄한 병사와 겁먹은 시민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

기사와 기사가 맞붙었다. 그러나 마상시합처럼 호쾌한 랜스 차칭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느린 병사와 땅바닥에 버려진 무기들 탓에 일찍이 속도를 줄이고 칼과 도끼로 싸웠다.

기마전이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말까지 보호해야 했다. 근육이 두꺼운 허벅지와 엉덩이는 어떻게 버틴다 해도, 목이나 종아리에 칼이 들어오면 큰일이었다.

‘그 점에서 내가 유리하지.’

로벨은 한방에 부러진 라이트 랜스 대신 손에 착 감기는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경이! 그 유명한!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공작!”

칼과 칼이 부딪치고, 칼과 갑옷이 부딪치고, 갑옷과 갑옷이 부딪쳤다. 그러나 데미지는 거의 없었다. 지상에서 양손으로 체중을 실어 죽어라 때려도 고작 멍 정도 드는데, 말 위에서 한 손으로 견제하듯 휘두르는 칼질이 아플 리 없었다. 간혹 겨드랑이나 무릎 뒤쪽이 찔려 비명을 지르는 기사도 있지만, 말 그대로 간혹이었다.

로벨과 맞붙은 잉그비아 왕국의 베... 무슨 가문의 장자는 숨이 가쁜 와중에도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렇게! 겨루게 되어! 영광이오! 부디! 최선을 다해...!”

“그럼 사양하지 않고.”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짧게 뻗어 견제한 뒤 재빨리 역수로 돌려 잉그비아 왕국 기사의 전투마의 옆머리를 내리쳤다. 앞서 말했듯 사람보다 말에 신경 써야 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 유일한 죄인 전투마는 앞다리가 풀려 풀썩 쓰러졌다. 모닝스타가 그것도 못 피하냐는 듯 푸르릉-! 거렸다. 말 기준에서 대단한 비웃음이었다.

“비겁하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 둘이 로벨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산양 수준인 모닝스타는 폴짝폴짝 뛰며 포위에 빠져나갔다.

“칼솜씨는 쓸만한데, 승마술이 부족하오.”

“아, 아니, 그쪽 말이 비정상...”

“패배보다 추한 것이 변명이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낮게 휘둘러 기사의 등자를 베고 역수로 돌려 기사의 목을 후려쳤다. 발 딛을 곳을 잃은 기사는 허우적거리다가 무기를 버리고 말 등에 납작 엎드렸다. 북해의 거친 파도가 길러낸 잉그비아 왕국 기사도 옛 신의 가호를 받는 기사 중의 기사, 전투마 중의 전투마는 당해내지 못했다.

로벨이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을 하나둘 제압하자,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이 수적 우위를 차지했다. 수세에 물린 잉그비아 왕국 기사가 악을 썼다.

“치사하오! 일대일로 겨룹시다!”

그 말에 흠칫한 순진한 기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코웃음을 쳤다.

“전쟁 중에 무슨 일대일이오?”

“그쪽 병력을 3천 명쯤 해산하면 생각해 보겠소.”

힘이 빠져 도망치는 기사와 몽둥이질에 낙마하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가 늘어갔다. 로벨은 더 이상 덤비는 상대가 없자 칼질을 멈추고 잉그비아 왕국 본대를 살폈다.

‘벌써 재정비가 끝났어?’

겨우 20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부상병을 교체하고 블랙우드 시티 포위망을 재구축했다. 부대 장악력이 대단했다. 혹은 말 안 듣는 기사들이 빠져서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로벨은 물러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도시 안으로! 도시 안으로!”

전공에 눈이 먼 검은 숲 기사 일부가 머뭇거렸지만, 호른 경, 브릭 경, 켈트 경 등은 두말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지치고 아프고 수치스러운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쫓지 않았다.

로벨과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은 단 1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블랙우드 시티로 복귀했다. 엘리엇 백작은 도시를 압박하는 제스처를 그만두고 기사를 불러들여 1마일 밖으로 후퇴했다.

그렇게 블랙우드 시티 공방전 3일 차가 지나갔다. 유난히 냉소적이거나 남달리 비관적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로벨 로드릭 군의 3전 3승으로 평가했다.

@

“네 번째가 마지막일 거야.”

로벨은 우물에서 막 길어낸 냉수를 정수리에 쏟아부었다. 여름용 무명옷 사이로 오밀조밀한 어깨와 소박한 가슴이 드러났다. 어린 집사는 누가 볼까봐 주위를 살피며 갑옷을 닦았다.

“오늘 온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딱 4일이잖아.”

“무슨 계산이 그래요?”

전장에 나오면 잠잘 때도 갑옷을 입고 자는 로벨이지만, 검은 숲의 무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소금이 묻어나는 바닷바람까지 더해져서 씻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바람도 봐야 하고, 물길도 살펴야 하고, 준비하는 시간도 있잖아요? 아무리 빨라도 2, 3일은 더 기다려야 해요.”

로벨은 젖은 꼬랑지 머리를 걸레 짜듯 쭉 짜내고 아야와 이야카처럼 마구 흔들었다.

“일단 갑옷 입어요. 흉갑만이라도 착용해요.”

어린 집사가 기름 수건을 빡빡 문지른 플레이트를 가져왔다. 혼자서도 착용할 수 있지만 보조해주면 훨씬 수월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몸을 맡기고 한가로이 생각했다.

“오늘 와야 해. 아니면 잉그비아 왕국 해군이 먼저 올 거야.”

“잉그비아 왕국에서요? 어떻게 알아요?”

“아까 말했잖아. 가는데 2일. 오는데 2일이라고.”

“...거리가 비슷하다고 오는 것도 비슷한게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어요. 팔 올리세요.”

로벨은 두 팔을 벌려 잠금장치를 채우게 두고 창밖을 보았다.

오른쪽 창문으로는 검은 연기가 자욱한 블랙우드 시티 성벽이 보이고, 왼쪽 창문으로는 높고 낮은 지붕들과 그 끝에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왔어.”

“뭐가 와요? 아, 자연의 소식이요? 스커트 채우면 싸기 힘드니까 지금 보세요.”

로벨은 얼굴을 붉히고 어린 집사의 머리를 쿵! 찍었다. 콩이 아니라 쿵이다. 어린 집사는 정수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거 말고. 바다사자가 왔어.”

로벨은 창가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수평선은 1피트 높아질 때마다 330야드씩 멀어진다. 사칙연산도 배운 적 없는 로벨이 지구의 곡률을 알 리 없지만, 경험적으로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로벨의 비밀을 엿본 흑단성의 오래된 성탑은 그 대가로 가장 먼 곳의 바다를 보여주었다.

“바다사자요?”

“응. 바다사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