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4화 (284/605)

284화. 천재

볼탄 반도에서 데려온 병사와 까마귀 성에서 인수한 병사와 제임스 공작이 거느린 병사를 합치자 총 1,355명이 되었다.

잉그비아 왕국군과 수차례 전투를 치른 베테랑 병사들이었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의 기사, 폭풍성의 정복자, 옛 신의 전천사(戰天使) 등으로 불리는 로벨 로드릭이 네 자릿수의 정예 부대를 지휘하니 기사나 병사나 승리는 따놓은 단상이라 생각했다. 당사자만 빼고 말이다.

“적은 4천 5백 명이오. 매우 힘든 싸움이오.”

당연한 말이지만, 로벨이 이길 거란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어제도 이기고, 오늘도 이겨도, 내일은 질 수 있었다. 천 번을 이겨도 한 번은 패할 수 있으며, 그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지금은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 열세였다.

“그런 말씀은 사기를 생각해서 참아주십시오.”

호른 경이 포도주를 가득 따라주며 조언했다.

전장에서 무슨 술이냐고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만한 상식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기사나 용병이나 술기운으로 싸우는 것이 전쟁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당사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로벨은 입술만 살짝 적시고 술잔은 내려놓았다.

“4,500명이라고 하지만 병력 손실이 꽤 있어서 실제로는 4천이 조금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충분히 많소.”

“보급사정을 노려볼 만합니다. 현지조달이 듣기는 좋지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징발로 해결해도, 휘두르는 것과 쏘는 것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화살의 경우 소모가 심했다.

크로스보우 위주의 포비아 왕국군과 롱보우 위주의 잉그비아 왕국군은 열심히 화살을 교류해도 회수할 것이 많지 않았다. 너무 짧거나, 너무 가늘었다.

“블랙우드 시티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있으니, 지리에 밝은 검은 숲 기사들을 적의 뒤로 보내고 본대로 발을 잡으면 됩니다. 두세 번 무력시위하고 총력전으로 전환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호른 경의 작전에 술기운이 오른 뭇 기사들이 박수를 쳤다. 대학가의 참새는 라틴어로 지저귄다고 로벨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하지만 스승만큼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쪼개자는 것이오?”

“허, 허나, 주군께서는 해내지 않았습니까?”

“성과 숲에서 자체 방어가 가능하니 할 수 있었소. 야전에서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자충수요. 내가 적장이라면 바로 본진을 공격해 전쟁을 끝낼 것이오. 기사 전력이 빠진 기회를 놓치면 안 되니까.”

로벨의 일침에 무턱대고 환호한 기사들이 머쓱해 했다. 로벨이 적이었으면 연승경력을 갱신해 주었을 것이다.

“적의 지휘관은 만만한 자가 아니오. 양면공격을 포기하고 신속하게 후퇴한 것을 보아 판단이 빠르고 행동이 과감한 자요.”

일군의 지휘관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고르곤 공작이 쓸 만한 기사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검은 숲의 기사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럼 어찌 상대해야 하오?”

로벨은 자세를 고치고 회의장에 모인 기사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쇠 냄새와 땀 냄새와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기사들이었다.

‘나한테서도 냄새나나?’

로벨은 께름칙해서 자세를 다시 고쳤다. 정비를 오랫동안 못해 갑옷 사이로 천옷이 삐쭉삐쭉 나왔다.

“적의 보급을 끊을 것이오.”

호른 경이 대단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눈으로 사과하고 이어 말했다.

“단, 병력을 나누지 않고 할 것이오.”

“그 말씀은...”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기사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어떤 기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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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왕국 사람들은 로벨 로드릭을 전쟁의 천재라고 불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천재냐고 물으면 전격전의 천재라고 대답했다. 전격전이 뭐냐고 물으면 고민 끝에 설명했다.

“빈집털이의 달인!”

“에이, 그러지 마.”

로벨은 칭찬이 과분한 듯 귀밑머리를 빙글빙글 꼬며 배시시- 웃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칭찬 아닌데요.”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로벨은 세간의 평에 개의치 않았다.

“정예화된 병사, 우수한 기동력, 익숙한 지형, 그리고 적의 명확한 아킬레스건까지 알고 있는데, 수비에 치중하거나 전면전을 고수하는 것은 바보야.”

“영주님은 바보 맞잖아요.”

“내가 왜 바보야?”

“37 더하기 29가 얼마죠?”

“어, 음, 7이랑 9랑...”

로벨은 손가락으로 꼽히지 않는 단위에 쩔쩔매었다. 어린 집사가 그거 보란 듯이 ‘어흠! 어흠!’ 기침했다.

최고 지휘관과 그의 최측근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이름처럼 전격적인 공격작전이 시작되었다.

2경이 막 지나는 어둑어둑한 시간, 울프 용병단을 비롯한 볼탄 반도&검은 숲 연합군이 떡갈나무 성 북쪽으로 빠져나왔다.

로벨이 바보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해도, 잉그비아 왕국의 지휘관은 확실히 바보가 아니었다. 군대를 3마일이나 뒤로 물린 상황에서도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역시 부대를 나누는군!”

“엘리엇 경의 예상이 맞았어.”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성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잉그비아 왕국군 정찰대에게 발각되었다.

“지금 당장 본대에 소식을...”

“잠깐! 기다려봐!”

달빛마저 어두운 늦은 밤이었다. 얼굴 없는 그림자가 2열 종대가 성을 나와 걸어가는데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았다. 더욱이 공포스러운 것은...

“어, 어디가 끝이야?”

100명, 200명, 500명, 700명, 900명... 두 자릿수에 집중하다가 세 자리 숫자가 가물가물해지는 병력이었다. 즉,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었다.

“야간기습이 아니야... 후방교란도 아니고...”

“뭐? 그럼 뭐야?”

“총력전이야. 저놈들이 먼저 승부수를 띄웠어. 당장 로버트 엘리엇 경에게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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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은 대열 선두에서 후미까지 한 차례 순시한 후 로벨이 있는 중앙으로 돌아왔다.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의 주군은 당나귀를 신들린 듯이 모는 어린 집사의 구박을 견디다가 호른 경을 보고 반색했다.

“어서 오시오! 어서! 문제없소이까?”

어린 집사가 당돌하긴 해도 주군과 봉신의 대화에 끼어들 만큼 예의가 없지는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대여섯 걸음 떨어졌다. 로벨은 잔소리 차단용 바이저를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어린 집사 눈에는 아직도 내가 철부지로 보이는 모양이오.”

“그 나름대로 충성심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호른 경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는 어린 집사를 보았다. 왠지 골려주고 싶은 꼬마였다. 호른 경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속삭였다.

“지금쯤이면 잉그비아 왕국군에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속도를 높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얼결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추격을 염려하는 것이면 괜찮소. 저들은 해가 뜰 때까지 꼼짝하지 못할 것이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우선 이곳 지리를 모르기 때문이오. 낯선 곳에서 야간행군을 할 수 없소. 기습을 당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테니까.”

“기습... 하실 겁니까?”

“아니오. 방금 말했잖소? 적 지휘관은 해가 뜰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인데, 적 지휘관은 의심이 많소. 우리는 저들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동안 거리를 벌리면 되오.”

적과 가까운 북문으로 당당하게 출발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로벨에게 한 차례 당해서 조심성이 많아진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은 필히 유인책이라 생각할 것이다. 최소한 의심은 할 것이다. 로벨은 그 사실을 예견하고 마음 편히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찌하면 적의 행동을 속속히 알 수 있습니까?”

“흐음.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할 거 같고, 저렇게 하면 이렇게 할 거 같고, 그냥 보이지 않소?”

“...안 보입니다.”

호른 경은 한숨을 쉬었다. 검술, 창술, 전략·전술이 우수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적의 심리를 꿰뚫어보는데 귀신이었다.

“주군께서는 천 년에 한번 나올 천재가 분명합니다.”

맥이 빠진 탓에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우리 영주님이 천재라고요?”

로벨이 활짝 웃으며 어린 집사를 보았다.

“봐봐! 호른 경이 인정했잖아? 난 역시 천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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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예견은 예언처럼 정확했다. 달이 지고, 동이 트고, 해가 정상에 이를 때까지 잉그비아 왕국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한 것이 의심스러워 몇몇 기사는 자진해서 정찰을 나가기도 했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로벨은 보고를 받기도 전에 30마일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을 봐. 화창하잖아. 4천 명이 먹고 마시는 양이 좀 많겠어? 우리가 가는 길로 못 따라와.”

잉그비아 왕국군은 최선을 다해서 추격하고 있었다. 떡갈나무 성은 더 이상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블랙우드 시티를 빼앗기면 내륙에 고립되었다. 혹시 몰라 100여 명의 수비병력을 남겨두었지만, 포비아 왕국이 자랑하는 명장 로벨 로드릭 앞에서 몇 시간이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도착하진 못해도 엇비슷하게 도착해야 도시와 항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로벨의 말처럼 쉽지 않았다.

4천 명이면 중소 도시 인구였다. 더욱이 보리 수확이 끝난 한여름이고, 습도가 높은 검은 숲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탈진할 지경이라 마을의 작은 우물로는 하루 치 식수도 채우지 못했다. 무조건 강이나 개천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직선거리로 하루 걸릴 곳도 빙 돌아서 사흘에 가야 했다.

반면, 1천 명이 조금 안 되는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여유가 있었다. 검은 숲 토박이 기사들이 지리에 밝아 숨겨진 샘을 찾아 지름길로 이동할 수 있었다. 대륙성 기후에 익숙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격전 만 하루 만에 양군의 거리가 22마일로 벌어졌다. 블랙우드 시티에 도착할 때쯤이면 닷새 정도 여유를 가질 듯했다.

“기사를 먼저 보내서 우리 발목을 잡으면 될 텐데요.”

“기사 전력은 우리가 좋으니까. 도박을 하고 싶지 않을 거야.”

로벨은 수소문으로 알게 된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 로버트 엘리엇 백작을 생각했다. 재주가 좋은 기사였다. 로벨이 왕위계승전쟁을 겪기 전에 만났으면 당하는 것은 로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겼다고 할 수 없어.”

로벨은 전쟁을 장기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블랙우드 시티를 탈환해도 적의 병력이 3배 이상 많은 것은 바뀌지 않았다. 도시야 다시 뺏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잉그비아 본국에서 추가 지원군이 도착하는 것이다. 1천의 병력으로 육지와 바다를 모두 지킬 수 없었다.

‘보급이 끊긴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승부수를 띄우긴 했지만, 그리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결정타가 필요해.’

로벨의 고민은 고난과 비운의 블랙우드 시티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00여 명의 잉그비아 왕국군 수비병이 놀라서 도망치고, 무혈로 입성할 때 비로소 해답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볼프 후작에게 한 수 배운 것이 있었지?”

로벨은 북해 수비에 골치 썩고 있을 옛 숙적에게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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