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3화 (283/605)

283화. 장례식

죠드 도너반 자작의 장례식은 검은 숲의 오랜 전통대로 진행되었다.

깨끗한 무명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정교한 오동나무 관에 정자세로 입관한 후 세례를 받은 독실한 신자 8명이 정중히 받들어 계곡 끝자락 영주의 묘로 옮겨갔다.

“솔트 도너반의 장자 죠드 도너반은 옛 신의 신실한 신자였으며, 국왕과 군주의 충직한 기사였으며, 만민의 귀감이 되는 영주였으니...”

나병 환자는 오래 살지 못했다. 도너반 자작 역시 오래전에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묫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옛 신의 사제 중 가장 까탈스러운 사제가 저주받은 자는 매장할 수 없다고 웅얼거렸는데, 정말 웅얼거림이었다. 로벨이 칼자루를 쥐고 하얀 송곳니를 보이자 교리해석에 폭넓은 이해심을 가졌다.

“...이에 숭고한 사명을 다 하여 옛 신의 품으로 떠나보내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안식을 허락하노라.”

로벨은 은화 두 개를 꺼내 도너반 자작 눈두덩이에 올렸다.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성호를 긋고 묵념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어서 브릭 경,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이 차례로 송별을 고하고, 기사 종자와 시종·시녀와 영지민이 꽃을 놓아 관을 채웠다. 로벨은 추도행렬 뒤로 빠져서 어린 집사와 이야기했다.

“도너반 가문의 후계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형제도?”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10년 전에 전사했어요.”

“사촌이나 외가 쪽으로...”

“소용없어요. 저주받은 성이라고 소문이 쫙- 나서 아무도 안 와요.”

“그래도 영주인데? 까마귀 성이 작은 성도 아니고...”

“연례행사로 전쟁이 나는데 영주가 되면 뭐하겠어요. 제가 그치들이어도 싫겠네요. 일단 살고 봐야죠.”

로벨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형제도, 자식도, 배우자도 없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럴 경우 국왕이나 군주가 상속을 대신 받아 새로운 영주를 보내야 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그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계곡 사이로 저녁노을이 늘어졌다. 도너반 자작의 장례식이 마무리되었다. 추도객이 하나둘 떠나고, 외로운 묘지에 가엾은 묘비만 남았다. 왕국을 정복한 기사도, 한평생 텃밭을 일군 농민도, 마지막에는 세 걸음 남짓한 땅을 가질 뿐이었다.

“주군, 성으로 가시지요.”

호른 경이 모닝스타를 끌고 다가왔다. 하루 종일 사내들 손에 끌려다닌 모닝스타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로벨은 콧김을 뿜는 모닝스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무슨 약속을 말씀하십니까?”

로벨은 고삐를 받아 푸릉- 푸르릉-! 거리는 모닝스타를 달랬다.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즉시 성 안의 모든 기사와 지휘관을 까마귀 홀로 소집하시오. 이곳에는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기고 제임스 공작을 구원하러 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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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명확했다. 춤, 노래, 시문, 수학 등은 9살 시동도 비웃을 수준이지만, 전략, 전술, 전법, 전투 등 전(戰)자로 시작하는 일은 정복왕 샘 포클도 감탄할 정도였다. 오늘은 잘하는 것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까마귀 성에 남은 군사를 모두 모아서 휘하에 넣었다.

주인이 바뀌고 소속이 바뀌었지만 잡음이 거의 없었다. 울프 용병단이란 완편된 부대가 존재하기에 병과에 맞게 넣고 빼는 것이 수월하기도 했고,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값으로 불필요한 신경전을 줄기도 했다.

“병력이 너무 적어. 고작 922명이야. 기사들의 랜스를 제외하면 가용할 수 병력은 500명이 좀 안 돼.”

로벨이 남몰래 하소연했다. 무적무패의 기사답지 않은 약한 소리였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아쉬운 소리에 격려로 응수했다.

“에이, 900명이 적다니요? 옛날에는 30명도 안 되는 병사로 싸웠잖아요?”

“그때는 내가 대장이 아니었잖아.”

“지금도 아니에요. 제임스 공작님이 대장이거든요. 영주님은 그냥 싸우는 시늉 좀 하다가 수틀렸다 싶으면 잽싸게 튀세요. 펄프 대장한테도 그렇게 말해뒀어요.”

“그건 좀...”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쓸어내리며 잠시 솔깃한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제임스 공작이 어떤지 봐야지.”

로벨 로드릭 군은 익숙한 여우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의 모성(母城)이자 검은 숲의 마지막 보루인 떡갈나무 성이 목적지였다.

여자와 아이가 꼭꼭 숨은 마을을 두어 곳 지나고, 폐허가 된 농장과 벌목장을 하나씩 지나자 마침내 떡갈나무 성이 보였다.

“이런 곳에?”

로벨은 전황이 안 좋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임스 공작군보다 잉그비아 왕국군을 먼저 발견한 것이다.

“포비아 왕국군이다!”

1개 소대로 구성된 정찰대가 떡갈나무 숲 주위를 기웃거리다 로벨 로드릭 군을 발견하고 도주했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 명사수들이 아바레스트를 치켜들었다.

“그냥 보내줘.”

로벨이 사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제때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사수 하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팡-!

“아...”

그나마 명중이라도 하면 나았을 텐데, 아주 동떨어진 곳을 쏘았다.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저 멍청한 놈이...’, ‘저거 누가 데려왔냐?’

로벨은 혼내지도 않았다. 주먹만한 떡갈나무 성과 그 위로 가늘게 피어나는 서너 가닥의 까만 연기를 보았다.

“우리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럼 어떡해요? 성으로 못 가게 막는 거 아니에요?”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우고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온 기사들을 보았다.

“지금까지 전쟁을 치르면서 깨달은 것이 있어.”

“그게 뭔데요?”

“전략의 기본은 싸울 장소와 시간을 찾는 것이고, 전술의 기본은 적을 속여서 그곳에 데려오는 거야.”

전쟁을 잘 아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로벨을 잘 아는 사람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저렇게 어려운 말을 하다니...’

‘기사님이 기사님 같지가 않아요!’

로벨은 왠지 불쾌한 감탄을 걷어내고 알아서 찾아온 기사와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이곳에 주둔할 것이오. 숲을 경계로 수비진을 만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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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코앞에 두고 야영지를 만드는 것은 그리 권장되지 않았다. 아군의 성이 2마일 이내에 있다면 더욱 그러했다.

적의 기병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신속하게 성으로 피신하는 것이 타당했다.

울프 용병단은 떡갈나무 숲의 나무로 바리게이트를 만들면서 잉그비아 왕국군 진영을 경계했다.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서 3시간째에 이르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바보인가?”

잠깐 오해를 풀고 가자면 그 반대였다.

단시간에 블랙우드 시티를 점령한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관은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기사로 분류하기가 미안할 만큼 유능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기병이 많지 않아. 싸워봐서 알잖아.”

“그야 그렇지만, 4,500명이나 되는데 아주 없진 않잖아요?”

“그래도 모험을 할 정도는 아니야. 우리한테 이미 두 번이나 당했으니까. 적의 주특기로 싸우기보다 자신의 주특기로 싸우고 싶을 거야.”

그리고 로벨 로드릭의 명성도 한몫했다. 머리가 차가운 사람들은 ‘무적무패’의 뜻을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의 뜻으로 해석했다. 탓하기 힘든 오해였다. 로벨도 자신과 같은 전공을 세운 기사를 봤으면 그리 판단했을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기사, 4분지 1이 채 안 되는 병력, 돌격거리로 재어도 될 가까운 성 등을 고려하면 답은 하나였다.

‘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배후를 친다!’

로벨은 적 지휘관이 그리 생각할 것을 알고 여유롭게 주둔지를 건설했다.

“와아! 와! 뛰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님 위에 나는 포비아 왕국 기사님이군요? 어떻게 알았어요?”

“적 지휘관은 모르지만, 제임스 공작은 잘 아니까. 제임스 공작을 죽음으로 몰고 갈 뻔한 기사가 그냥 바보일 리 없어.”

로벨의 예상이 완전히 적중했다. 이 시각 떡갈나무 성 남쪽에 매복한 잉그비아 왕국군은 저린 발을 꼼지락거리며 심각하게 생각했다.

‘왜 안 오지? 정보가 잘못 됐나?’

‘딴 길로 간 거 아니야?’

그들이 전후 사정을 깨달은 것은 로벨 로드릭 군이 완벽한 야전 주둔지를 건설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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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의 등장은 떡갈나무 성 전투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볼탄 반도&검은 숲 연합군보다 3배 많은 병력을 가졌지만, 정반대로 포위당했다.

상황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떡갈나무 성을 공격하면 로벨 로드릭 군이 뒤통수를 후려치고, 로벨 로드릭 군을 공격하면 떡갈나무 성에서 기사들이 뛰쳐나와 발길질했다. 두 차례 출격으로 크진 않지만 그럴듯한 전공을 세운 기사들은 로벨이 무엇 때문에 주둔지를 세웠는지 깨달았다.

“과연! 과연 나의 주군이십니다!”

“적을 외통수에 밀어 넣었군요!”

잉그비아 왕국군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떡갈나무 성 북쪽 3마일 지점으로 후퇴했다. 로벨은 잉그비아 왕국군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느긋하게 떡갈나무 성에 입성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 만세! 볼탄 반도 만세!”

“로드릭 가문에 영광을! 제임스 가문에 축복을!”

떡갈나무 성 수비병도 눈과 귀가 있기에 전설적인 기사가 무슨 일을 해냈는지 잘 알았다. 구체적인 전술은 몰라도 반의반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잉그비아 왕국군을 몰아냈다는 것은 알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토너먼트에서 퍼레이드 하듯이 손을 흔들며 성내를 지나 아성으로 향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

제임스 공작이 아성 밖으로 마중 나왔다. 겨드랑이 아래로 붕대를 칭칭 감고, 오른쪽 다리에 부목을 대었다.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포부 당당하게 제임스 공작 앞으로 걸어갔다. 성 안의 모든 시선이 로벨과 제임스 공작에게 집중되었다. 폭풍 같은 환호성이 사라지고, 바위 같은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로벨은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조금 큰소리로 인사했다.

“우정에 화답하고자 찾아왔소. 너무 늦은 게 아니면 좋겠소.”

제임스 공작도 시선을 의식해 크게 대답했다.

“우정에 늦고 빠른 것이 어디 있소?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으니 그걸로 족하오.”

로벨이 웃자 제임스 공작도 따라 웃었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그 말을 깊이 새기고 반드시 보답하리다.”

두 공작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포옹했다. 지저분한 갑옷과 피에 젖은 붕대가 맞닿았다. 그리고 성벽과 성탑과 안마당을 가득 메우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로드릭 공작 만세! 제임스 공작 만세!”

“검은 숲 만세! 볼탄 반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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