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80화 (280/605)

280화. 들불

기사로 살아온 햇수가 전쟁을 치러온 횟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로벨을 오랫동안 따른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도 마찬가지였다.

“반란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동부평야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있어 피해가 심각합니다. 속히 진압해야 합니다.”

“검은 숲의 병력으로 30일 이상 버티지 못합니다. 블랙우드 시티를 잃으면 지난 왕위계승전쟁이 반복됩니다.”

“지금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프란시스 가문의 옛 봉신들이 계속해 가담할 겁니다. 주군,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영지가 넓어지고, 봉신이 많아졌는데, 정통성이 부족했다. 짧게는 2, 30년에서 길게는 2, 300년을 이어온 주종관계가 일 년 만에 끊어질 리 없으니, 동부평야의 반란은 필연적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로벨은 볼멘 소리를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증거는 없지만, 검은 숲을 침공한 잉그비아 왕국군과 동부평야에서 봉기한 반란군은 한통속이었다. 과거 아만다 남작 때처럼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된 바에 군사를 나눠서...’

어려운 일이었다. 로벨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3천 명이 안 되는데, 검은 숲의 적은 4천 5백 명이고, 동부평야의 적은 1천 명이었다. 그리고 북해안도 비울 수 없었다. 볼탄 반도의 반쪽짜리 지배자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적이었다.

“검은 숲 공작님은 포클랜드 국왕님한테 부탁하고, 기사님은 치사한 남쪽 기사님을 혼내주는 게 맞아요.”

마녀 키르케가 회의장을 침묵시켰다. 강철로 포장된 근육질 기사들이 한 주먹감도 안 되는 당돌한 소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요. 바닷물은 많이 짜요.’ 같은 태도라 즉시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성격이 까칠하고 매사에 의심이 많으며 이론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뿐이었다.

“포클랜드의 겁쟁이들이 과연 움직일까요?”

“움직이게 해야죠. 그러려고 금화를 나눠준 거 아니에요?”

“금화는 많은 것을 도와주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아요.”

어린 집사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의 주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어요? 기사님이 두 곳에, 아니, 세 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으음... 지금 당장은 없지만...”

“저번에도 말했지만, 기사님 혼자 싸울 필요는 없어요. 포클랜드, 검은 숲, 검은 성, 하얀 숲, 어디든 좋으니까 도움을 청하세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순순히 인정했다. 적은 크고 강하니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없었다.

“검은 숲의 지원은 포클랜드 시티의 자비에 후작에게, 북해안 수비는 검은 성의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부탁하겠소. 우리는 신속하게 동부평야 반란군을 소탕하고, 이후 검은 숲과 북해를 지킬 것이오.”

로벨의 결정이 떨어졌다.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흉갑에 주먹을 붙였다.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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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의 봉신들이 소집되었다. 초봄에 이어 두 번째 소집이지만 반발은 거의 없었다. 외적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종 계약상 불응할 수도 없지만, 괜히 몸 사리다가 반란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가난한 기사에게 기회이기도 했다. 전공을 세우면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의 땅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가 합쳐지자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소환에 응했다.

“3천 3백명?”

고작 1천 명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3천 명의 정예병이 모였다.

“잉그비아 왕국하고 싸울 때 이렇게 동조해주지!”

“걔네하고 싸우는 것은 돈이 안 되니까요.”

“반란진압은 쉽겠는데... 다른 문제가 있네요.”

군대가 커지면 보급이 문제였다. 지휘관에 따라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1/3은 거점에서 운반하고, 1/3은 종군상인에게 구매하며, 1/3은 현지에서 요령껏 징발했다. 쉽게 말해 오만가지 방법으로 식량을 충당했다.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은 순무의 계절이야.”

작년 가을에 수확한 식량이 바닥을 보이는데, 봄 작물을 수확하려면 두 달이 남았다. 일 년 중 가장 고단한 시기였다. 보리수확을 기다린다고 보릿고개라 부르기도 하고, 순무로 겨우 배를 채운다고 순무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늑대성에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 연거푸 전쟁을 치른 남쪽은 사정이 안 좋을 거예요.”

“3천 명이면 작은 도시 인구인데, 지나가는 마을마다 초토화되겠죠.”

로벨은 정석적인 해결책을 떠올렸다. 보리수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도시를 약탈해서 식량과 재화를 마련하는 방법이 있었다.

“도시?”

로벨은 볼탄 반도 남부의 도시를 쭉 떠올렸다. 노스폴드 시티처럼 작은 자유도시도 있지만, 인구가 1만이 넘는 대도시도 있었다.

“기왕 3천 명이나 모였으니까...”

로벨은 대도시를 쭉 이으며 미소 지었다. 평소와 달리 음험하고 음흉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기겁해서 속삭였다.

“우리 영주님이 이상해졌어요!”

“집사님한테 몹쓸 것을 배웠나 봐요!”

로벨은 두 친구의 험담을 못 들은 척하고 발코니로 나갔다. 늑대성 남쪽에 집결한 3천 대군을 굽어보았다.

잡초가 파릇파릇 자란 휴경지에 수십에서 수백 단위로 뭉친 군대가 흩어져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들과 중장비를 옮기는 용병들과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장관이었다.

“오랜만에 바다 구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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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귀족들은 난감했다.

에드워드 3세와 고르곤 공작 중 어느 쪽을 지지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볼탄 반도 공작의 전령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검은 숲으로 군사를 보내면 잉그비아 왕국과 전면전이 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소! 더 이상 공작들의 싸움이 아니란 말이오!”

가진 것이 많은 자는 싸움을 싫어하는 법이다. 포클랜드 시티의 기사들은 전쟁으로 공을 세우고 출세하는 구닥다리 기사가 아니었다.

“잉그비아 왕국과 전쟁이라니...”

“이제 선택해야 하오.”

볼탄 반도의 공작을 도와 함께 싸울지, 아니면 잉그비아 왕국의 고르곤 공작과 협상할지 결정해야 했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생기면 고민할 것 없이 볼탄 반도 공작을 돕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조금 이른 개념이었다.

“서두를 필요 없지 않소? 우선 고르곤 공작에게 사신을 보내 원하는 것을 알아봅시다.”

“그, 그게 좋겠소! 에르나 왕국이 호시탐탐 우리 왕국을 노리는데 싸워서 이득 볼 게 뭐 있소? 고르곤 공작도 이해할 것이오!”

자비에 후작은 자기 보신에 치우친 대신들을 보며 인내했다. 예전처럼 권력을 가졌으면 저 배부른 돼지들을 쫓아내고 제대로 된 기사들을 소집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아이언베어 요새로 출병할 때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비에 후작은 지금쯤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로벨 로드릭 공작을 생각했다.

‘본인을 이 꼴로 만든 것은 당신이오. 그러니 너무 타박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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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난감함은 더욱 심했다.

하이랜드 공작이 쳐들어왔을 때도, 옛 프란시스 가문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다. 너무 잘나서 걱정하는 게 우스운 로벨 로드릭 공작이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전쟁은 흔히 불로 비유되었다. 무섭고, 파괴적이고, 걷잡을 수 없으며, 어디로 튈지 몰랐다. 페르젠 백작은 페르젠 시티를 둘러싼 3천 3백 명의 군대를 보면서 전쟁의 정의를 새로 내렸다.

‘왜 불똥이 이리로 튀냐고!’

로벨 로드릭 군은 자비에 후작의 예상과 달리 동쪽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엉뚱하게 남쪽으로 내려와 페르젠 시티를 포위했다.

페르젠 백작은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용병을 닥치는 대로 고용해 성벽으로 올렸다. 그래 봐야 구색 맞추기였다. 로벨 로드릭 공작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포비아 왕국 최강의 기사였다. 그런 기사가 3천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승산이 없었다.

‘왜지? 대체 왜? 충성맹세를 하지 않아서? 잉그비아 왕국과 싸울 때 용병만 보내서? 프리랜서 220명이면 충분히 성의 표시했잖아!’

영주의 자존심으로 근엄하게 성탑 아래를 굽어보았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도시를 포위한 깃발 중 하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숲 밖에서는 나무를 하나하나 구분할 수 없지만, 한 그루씩 떨어져 나오면 쉽게 관찰이 가능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

로벨이 호위병 셋만 데리고 성 아래로 다가왔다. 그러나 거목은 무리 짓지 않아도 거목이었다. 로벨의 무명을 익히 아는 기사와 용병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페르젠 백작 역시 긴장을 풀지 못했다. 싸우는 것은 소용없었다. 항복하라고 하면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하면 맹세할 작정이었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

“무, 무슨 일이오! 로벨 로드릭 공작!”

로벨은 성벽 위에 긴장한 병사들을 쭉 둘러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등 뒤의 군세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돌격을 명할 것 같았다.

로벨이 다시 입술을 떼었을 때, 도시를 지키는 300명의 기사와 병사가 손에 땀을 쥐었다.

“빵 좀 주시오.”

“...뭐라고?”

긴장한 것에 비해 매우 허무했다.

“반란을 토벌하러 가는 중이나 군량이 부족하오. 경의 영지를 약탈하게 둘 수 없으니 도시의 곡식과 고기를 내어주시오.”

“그게... 전부요?”

야밤에 도적떼가 침실까지 쳐들어와서 마당에 계란 좀 가져가도 되겠냐고 묻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도적은 도적이었다.

“값은 치를 것이오. 단, 본인은 정당한 권리로 세금이 면제되니 시중가 그대로 구매할 것이오. 백작은 거절할 수 없소.”

딱히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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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볼탄 반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우회했다. 페르젠 시티와 프란시스 시티만 봐도 알 수 있듯 바다를 낀 도시들은 대부분 크고 부유했다.

로벨은 창칼을 앞세운 ‘정중한’ 무력시위로 3천 3백 명이 30일 동안 먹고 마실 식량을 장만했다. 덤으로 도시민의 충성을 약속받고, 도시가 반란에 가담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열흘 걸릴 행군이 열여드레로 늘어났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린 집사는 기왕 모은 군대를 알뜰하게 써먹었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도착한 도시는 ‘폭풍의 도시’라 불리기도 하고, ‘호수의 도시’라 불리기도 하는 버팅거 시티였다.

“주군!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눈알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폭풍성의 조단 랭스터 경이 완전무장한 채 마중 나왔다. 거짓말을 모르는 기사라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 그 말은 동부평야의 전황이 대단히 안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마녀 키르케에게 주었다.

“적의 규모는 1천 정도라 들었소.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폭풍성의 주인이 호들갑 떨 정도도 아니잖소.”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영지에 속박된 농민을 회유하여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오늘 보고된 바로 2,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숫자가 늘어나는 중입니다.”

전쟁은 역시 불이었다. 들판에 불을 피우니 들불이 되어 걷잡을 수 없었다.

“기사가 농민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사자가 사슴을 이끌고 사냥에 나가도 이보다 웃기지 않을 것이다.

“누가 꾸민 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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