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77화 (277/605)

277화. 방풍림

로벨 로드릭 공작군은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화급히 물러났다. 솜씨나 보자고 가볍게 건드렸다가 말 그대로 피를 보았다.

숲으로 머리를 감싸고, 전함으로 옆구리를 막은 채 200야드 밖에서 3.5피트짜리 소나기를 쏟아 부으니 천하의 로벨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장기전으로 갑시다! 저것들이 남의 땅에서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그것도 불가능했다. 첫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수평선 저편에서 범선 한 척이 유유히 나타나 식량과 화살을 뿌리고 돌아갔다. 용맹무쌍한 볼탄 반도의 기사도 바다 위를 달릴 재주는 없기에 멍하니 지켜보아야 했다.

“에, 에에잇!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아닙니까! 그냥 돌격하시지요!”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들이 유서 깊은 전술 ‘닥치고 일단 돌격’을 주장했다. 로벨은 전투의 패배를 전쟁의 패배로 연장하고 싶지 않았기에 깨끗이 무시했다.

“골치 아파.”

저런 병사를 키워낸 잉그비아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세상 얄미웠다. 정작 자신은 써먹지도 못하고 정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니 가장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것은 에드워드 3세 본인일 것이다.

로벨은 도움이 안 되는 기사들을 각자 부대로 돌려보내고 적막한 지휘막사에서 고민에 잠겼다.

‘기사 나리는?’

‘혼자 계시고 싶단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로벨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죽여 속닥였다.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지 간간이 웃음도 흘러나왔다.

울프 용병단은 패전에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걱정하지 않았다. 잠깐잠깐 고전해도, 끝까지 가면 로벨이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럽네.’

로벨은 속 편한 용병들을 부럽게 내다보다가 정신을 바로 했다.

‘키르케의 말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공격해야 해. 전함을 떼어내야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어.’

로벨은 주드 맥켈런 남작을 설득하기 위해 떠난 호른 경을 생각했다. 옆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없으니까 괜히 보고 싶었다. 로벨은 왜일까 고민하다가 간단히 결론 내렸다.

‘그만한 기사도 드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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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재정비를 끝내고 다시 싸움을 걸었다. 지난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접근했다. 에디즈 자작의 2대대와 맥기 남작의 3대대를 교대로 움직여서 잉그비아 왕국군을 지치게 한 후, 롱보우의 사격이 뜸해지는 탐을 타서 울프 용병단을 비롯한 정예 용병부대를 과감하게 밀어 넣었다.

“좋아! 성공이야!”

“제1소대! 사격 준비!”

크로스보우의 사거리에 파비스를 설치하고, 마침내 반격을 하려는 찰나, 잉그비아 왕국군의 보병기사와 중장보병이 뛰쳐나와 애써 설치한 파비스를 버리고 물러났다. 계획과 달라도 예상 범위였다. 백병전이 되자 포비아 왕국군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볼탄 반도의 기백을 보여주자! 돌격 앞으로!”

로벨이 직접 기사와 기마 용병을 이끌고 돌격했다. 지휘관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쌓인 게 많아서인지 불타는 강에서 기마 돌격할 때보다 한층 빠르고 날카로웠다.

로벨은 참나무로 만든 해비 랜스를 낮게 깔았다. 그에 맞서 잉그비아 왕국의 보병 기사도 자세를 낮추고 두꺼운 카이트 실드를 앞세웠다. 방어력만 보면 필드 아머 이상의 풋 컴뱃 아머였다. 통짜 강철 갑옷에 쇠테를 두른 떡갈나무 방패를 더하자 한 덩이 바위 같았다. 물론, 성난 모닝스타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질량이 달랐다.

“푸히히히힝-!”

“커헉-!”

모닝스타는 잉그비아 왕국 기사를 썩은 고목처럼 부러트리고 달렸다. 돌격속도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선두의 말이 속력을 줄이지 않자 뒤따라가는 말들도 기를 쓰고 쫓아갔다. 말 위에 기사가 내뻗은 13.2피트짜리 뿔은 덤이었다.

“우아아악!”

“살려줘!”

첫 전투에서 잉그비아 왕국군의 장기가 빛을 발했다면, 두 번째 전투에서는 포비아 왕국군의 장기가 꽃을 피웠다. 한여름의 장미처럼 붉은 꽃이었다.

“양이랑 붙어먹는 더러운 잉그비아 놈들! 죽어랏!”

“이랴앗! 이럇!”

로벨은 어지럽게 흩어지는 잉그비아 왕국 병사 중 하나를 골라 그대로 꿰어버렸다. 창끝이 아래로 처지면서 땅에 맞닿아 요란하게 박살났다. 귀한 창으로 병사 하나를 겨우 해치웠지만, 성과가 작지는 않았다. 마상시합의 가짜 랜스가 아닌, 사람을 찢어발기는 ‘진짜’ 랜스 차칭이었다. 그 현장을 목도한 잉그비아 왕국군은 겁에 질려 와르르 무너졌다. 엎어지고, 포개지고, 구르면서 도주했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더욱 신이 나서 도망치는 적을 짓밟았다. 창칼에 찔리는 병사보다 말발굽에 찢겨나가는 병사가 더 많았으니 이처럼 정확한 묘사가 없었다.

기세를 몰아 본진까지 돌파하면 좋겠지만 지형상 그럴 수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허둥거리면서도 잽싸게 방풍림으로 숨었다. 말을 타고 달리기에 좋지 않을뿐더러 무슨 함정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은 잇소리를 내고 고삐를 옆으로 틀었다.

“우회한다! 우회하시오!”

로벨이 기사들의 대장이면, 모닝스타는 전투마의 대장이었다. 야생성이 깨어난 말들은 기수가 시키지 않아도 우두머리를 쫓아 우르르 내달렸다. 주인 입장에서 황당한 일이었다. 두두두두...

로벨은 전투지역을 이탈해 전열을 정비했다. 창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말과 주인이 낙마하여 혼자 돌아온 말과 지나치게 흥분해서 사방으로 날뛰는 말을 제외한 후 전장을 살폈다. 잉그비아 왕국군의 피해는 4, 50명 정도였다. 아군 손실의 9배였다.

‘한 번 더 돌격하면...’

로벨은 욕심을 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벨이 물러날 때까지 숲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발 빠른 풋맨을 움직여 난전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소중한 농민병을 희생시킬 만큼 메리트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오늘은 그만 물러나...”

그때, 로벨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성 마르틴의 가호 때문인지, 파나케아 투구의 신묘한 힘 때문인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다.

“...지 않겠소.”

“예?”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머리 위로 휘저으며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열을 갖추시오! 전열을! 창이 온전한 기사는 앞으로! 방패를 가진 기사는 왼쪽으로! 브릭 경! 마튼 경! 후미를 부탁하오! 켈트 경! 바이란 경! 랭스터 경! 우측으로 이동하시오!”

로벨의 지휘 아래 2차 돌격 대형을 갖추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잉그비아 왕국군 지휘부는 조롱했다.

“저 무식한 놈들! 자살할 생각인가?”

“달팽이나 처먹는 미개한 놈들이 그렇지!”

욕을 하면서도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창을 준비했다. 해안 방풍림은 좌우로 길고 앞뒤로는 좁아서 나무와 나무 사이의 좁은 공간만 막으면 장벽이 되었다. 바람도 넘지 못하는 벽이니, 아무리 대단한 포비아 왕국의 기사라도 뚫을 수 없었다.

로벨도 자신의 기사를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해안으로! 해안으로 간다! 적의 뒤를 끊는다!”

로벨의 공격 목표는 철통같이 수비하는 정면이 아니었다. 지리학적 관점에서 종이처럼 얇은 방풍림의 뒤쪽이었다. 전함의 대포를 믿고 비워둔 약점이기도 했다.

“으하하! 저놈들이 정말 미쳤군!”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껄껄 웃었다. 무지한 볼탄 반도 놈들이 대포의 위력을 모르고 사지로 뛰어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잉그비아 왕국 해군은 자랑하는 대포를 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예 뱃머리를 돌려 먼 바다로 빠져나갔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저, 저, 저, 저런...!”

신분과 출신지를 떠나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배신, 반란, 음모, 꿈, 기적... 그러나 무엇도 정답이 아니었다. 잉그비아 왕국 선원은 진작에 본, 그러나 육지에서는 이제야 겨우 보이는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

수평선 위로 돛대가 하나둘 솟아나고, 이어서 사자 모양의 선수상과 파도를 가르는 수십 개의 노가 등장했다.

“갤리선?”

“부, 북해의 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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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선은 근해에서 어떤 배보다 기동력이 좋았다. 범선처럼 많은 대포를 탑재하지는 못하지만, 피와 땀을 동력으로 삼아 바람과 해류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바다를 농락했다. 오직 바람만 이용하는 범선은 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고, 풍향을 읽어 뱃머리를 움직였다.

“청옥성의 해군입니다!”

“맥켈런 남작이 왔습니다!”

로벨의 기사들은 눈썹이 뽑히도록 달리면서도 환호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거나, 조금 늦게 도착했으면 이처럼 완벽한 기습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속도를 높였다. 간신히, 간신히 전황을 읽은 펄프 대장 이하 로벨 로드릭 군은 일제히 돌격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앞뒤로 포위되었다. 갑옷처럼 보이던 숲이 창살이 되어 병사를 가두었다.

“쏴! 쏴라! 쏴라!”

롱보우 부대가 앞뒤로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아침부터 계속된 전투로 지친 데다 포위·고립된 압박감 탓에 명중률이 엉망이었다. 그마저도 두 번 이상 쏘지 못했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이 해변을 가로질러 무방비한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쿵-! 바람막이숲이 흔들렸다.

첫 번째 돌격보다 강렬했다. 후미에 배치된 병사는 무장을 잘 갖춘 맨앳암즈가 아니라 그물치고 쟁기질하는 징집병이었다. 기사의 창과 칼에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두르다가 귀찮아져서 흐룬팅을 뽑아 쌍검으로 휘둘렀다. 생가죽 한 장 걸치지 못한 잉그비아 왕국 징집병은 칼질 한 번에 한 사람씩 쓰러졌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자신의 금쪽같은 재산이 소모되자 분노했다. 그러나 섣불리 몸을 돌릴 수 없었다. 어린 집사의 미움을 받는 울프 용병단에서도 특히나 미움 받는 맨앳암즈 중대가 우악스러운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기사 목을 따면 얼마드라?”

“갑옷이 좋은뎁쇼, 기사 나으리!”

“이 건방진 놈들이!”

육지에서 쇠가 달궈지고 핏물이 뿌려지는 동안, 바다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콰과과-앙-!

주철대포 20문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수면 위로 20개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쇠와 돌은 격렬한 비행 끝에 바다와 나무와 사람을 두드렸다.

“겁먹지 마라! 노를 저어라!”

“노예장! 노예장 뭐하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지만 꼿꼿한 허리와 우렁찬 목소리는 전성기 그대로였다. 북해의 사자는 귓가를 스치고 물보라를 일으키는 포탄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기함 옆 청새치 2호가 안 좋은 곳에 피탄 당해 롤링을 일으켰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 척쯤 내줘도 승산은 충분했다. 적은 좁은 만에 갇혀서 피할 곳이 없었다. 일단 붙기만 하면 기사와 병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아군의 승리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포연 속에서 비명 지르는 잉그비아 왕국 해군을 무시하고 육지를 보았다. 바다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은 바람막이숲이 짐승처럼 헐떡였다. 전황이 궁금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벨 로드릭 공작이 패할 것 같지 않았다.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그리고 로벨과 함께 하는 자신도 패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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