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탐색전
“주군! 대승입니다! 저희가 대승했습니다!”
폭풍성의 조단 랭스터 경이 핏물을 털어내며 소리쳤다. 헬름을 썼는데도 눈구멍과 숨구멍으로 피가 스며들어 붉게 화장됐으니, 그 아래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였다. 시체를 처리하며 집계해 봐야 알겠지만, 못해도 300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아군의 피해는?”
“올만 가문과 니콜슨 가문의 기사 3명이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고, 페르젠 가문의 프리랜서 12명이 전사했습니다.”
샘 포클의 정복전쟁 이후 최고의 승리였다. 기사들은 자신이 해치운 적의 숫자를 떠들며 의기양양했고, 용병들은 전리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주목(朱木)으로 만든 롱보우는 하자만 없으면 7, 80페닝으로 팔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잘라 보라고? 잘라 보라고 했지? 누구부터 잘라줄까!”
전리품 대신 전투수당을 받기로 한 울프 용병단은 포로를 취급했다. 그리 정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그 조막만한 칼로 어느 세월에 자르냐. 내 도끼로 그냥...”
“제, 제,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나는 로이덴 가문의 삼남이다! 살려주면 몸값을 지불하겠다!”
귀족의 자식이면 전부 귀족인 대륙 국가와 달리, 잉그비아 왕국은 장남만 귀족이고 차남 이하는 법적으로 평민이었다. 그러나 핏줄만큼 질긴 것이 없는지라 귀족과 다를 바 없이 젠틀맨으로 대우받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처럼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자유민이었다.
외팔이 더치는 도끼날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일단 자르고 생각하자.”
“우아아아악! 잠깐! 잠깐만!”
“외팔이, 멈춰.”
로벨이 다짜고짜 도끼를 휘두르는 외팔이를 제지했다. 뼛속까지 귀족이라 귀족의 피가 흐르는 포로를 해치기 껄끄러웠다.
“부상자와 함께 늑대성으로 보내. 몸값 협상 후에 어찌 처리할지 결정할 거야.”
포로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로벨의 자비로움을 찬양했고, 열심히 칼을 갈던 울프 용병단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북해 해안에 500명 이상의 잔존 병력이 남아있으며, 잉그비아 섬에서 언제든지 지원군이 넘어올 수 있었다.
“승기를 잡았을 때 확실히 끝을 내야 해.”
로벨은 피로 물든 강을 지나 북쪽을 노려보았다. 잉그비아 왕국의 고르곤 공작과 류트 프란시스 공자를 상대할 방법을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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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재정비를 마친 2,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타는 강을 건넜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인근 지역을 초토화했지만, 보급은 어렵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군의 승전소식을 접한 북부 영주들이 부랴부랴 금화를 싸들고 마중 나왔고, 돈 냄새를 맡은 종군상인이 발 빠르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따라붙었다. 전쟁에 참관하는 귀족과 귀부인까지 합류하면서 시끌벅적한 행군이 이어졌다. 그렇게 닷새를 이동해 북해의 파도가 가장 깊숙이 들이닥치는 북해 해안에 도착했다.
“숫자가 그새 늘어났어...”
로벨은 방풍림을 등지고 포진한 잉그비아 왕국군 진영을 확인했다. 불타는 강에서 2천 명을 격파했는데, 이곳에 2천 명이 더 있었다.
“그 사이 후속부대가 도착한 모양입니다.”
호른 경이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를 심문해서 정보를 빼냈다. 의사와 이발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문은 하지 않았다. 명예를 아는 기사답게 몸값 협상으로 술술 실토했다.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주인의 일이고, 몸값을 내는 것은 가문의 일이니 당연했다.
“하이랜드의 공작에게 밉보여서 쫓겨난 병사들입니다. 게다가 앞서 온 군대의 패전 소식을 접했을 테니 사기가 엉망일 겁니다.”
로벨은 더스틴 폴라 경을 흉내 내어 있지도 않은 수염을 만지는 척했다.
“문제는 지형이오.”
전쟁 경험이 풍부한 기사나 부족한 기사나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자존심 강한 기사들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숲을 등지고 있으니 기마돌격을 할 수 없소. 해안으로 우회하려고 해도 적의 전함 때문에 위험하오.”
로벨은 근해에 포진한 3척의 전함을 가리켰다. 선체가 높고 돛이 다양한 범선이었다.
“갤리선과 달리 측면에 대포를 탑재하오. 한 척당 8문에서 16문의 대포가 있으니, 가까이 가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오.”
“그럼 대포가 총... 음...”
기사들은 손가락을 꼽으면 어리벙벙했다. 세 자릿수가 되면 덧셈과 뺄셈도 못하는 사람들이라 곱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최소 24문이고, 최대 48문이요.”
“그, 그래?”
“끔찍하게 많군!”
작년 여름 스톤헤드 요새에서는 소구경 팔코넷 20문 때문에 보름을 꼼짝 못했다. 그보다 크고 많은 대포를 상대하라니 지레 겁을 먹었다.
“아니죠. 아니죠.”
마녀 키르케가 검지를 좌우로 까닥였다. 로드릭 가문에 뒤늦게 합류한 기사들은 일개 하녀가 기사들 대화에 끼어들자 화를 내... 려고 했지만, 로벨을 오랫동안 따라다닌 기사들이 재빨리 만류해서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마녀 키르케를 로벨의 정부로 알고 있었다.
로벨이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아니야?”
로벨의 애정 가득한 태도에 성급히 화를 낼 뻔한 기사들이 안도했다. 제때 말려준 전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로드릭 가문 안주인(?)에게 집중했다.
“성이 아니라 배잖아요? 대포를 오른쪽 왼쪽 양쪽에 배치하니까, 이쪽으로 쏠 수 있는 대포는 절반이죠.”
“아, 그렇구나.”
“아까의 절반이면... 에, 그러니까...”
어린 집사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12문에서 24문이요.”
“오오! 그럼 해볼 만하지!”
“작년하고 다르지 않잖소?”
기사들은 희희낙락 소리쳤다. 처음과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왠지 적의 포병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기분이었다. 로벨이 목에 힘을 주어 경고했다.
“12문이든 48문이든 위협적인 것은 똑같소.”
기껏 달아오른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여느 기사라면 겁쟁이 같은 소리라고 비웃겠지만, 실력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기사 중 으뜸인 로벨이라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마녀 키르케는 무거워진 공기에 헐떡이듯 말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거죠.”
“육지는 우리가 어찌한다 해도, 바다 위에 전함은...”
포비아 왕국은 기사의 나라였다. 어느 나라나 자기네가 기사의 나라라고 하긴 하는데, 포비아 왕국은 ‘진짜’ 기사의 나라였다.
상공업에 집중된 자유도시보다 자급자족하는 장원의 비중이 크고, 페닝을 받고 복무하는 용병보다 의무로 복무하는 기사의 역할이 컸다. 그 덕분에 국가 규모에 비해 지상 전력은 막강하지만, 큰 자본이 필요한 해군은 빈약했다. 로벨이 가진 배를 모두 동원해도 잉그비아 왕국의 무장 카락(carrack) 3척을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설령 이길 수 있어도 인어의 바다에서 북해까지 함대를 끌고 오려면 보름 이상이 걸렸다.
“아니죠. 아니죠.”
“뭐가 또 아니야?”
“기사님 혼자 싸울 필요 없잖아요? 친구 불러요. 친구요.”
“나 친구 없는데...”
로벨은 좁쌀 같은 대인관계를 고백하다가 번뜩 깨달았다. 포비아 왕국에도 해상 전력을 갖춘 세력이 있었다.
“청옥성의 맥켈런 남작?”
“맞아요! 기사님하고 친하니까 잘만 하면 도와주지 않을까요?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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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른 경과 매튜 경을 주드 맥켈런 남작의 거점인 청옥성으로 보냈다. 사트로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면 이틀이면 충분했다. 다시 말해 맥켈런 남작이 출병해도 이틀이면 북해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빨리요?”
“주드 맥켈런 남작은 유능한 기사야. 잉그비아 왕국군이 북해를 오가는데 손 놓고 구경했을 리 없어. 진작에 전쟁 준비를 마쳤을 거야.”
“그럼 영주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겠군요!”
“그건... 아직 모르겠어. 아무리 맥켈런 남작이라도 잉그비아 해군과 정면 승부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까. 우리를 얼마나 믿느냐에 달렸겠지.”
로벨은 북해를 호령하는 늙은 사자를 떠올렸다. 적이 되면 무섭지만, 아군이면 누구보다 든든했다.
“우리가 할 일부터 하자. 청옥성이 아니어도 저들은 상대해야 하니까.”
로벨은 해안 지도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붉은 돌을 내려다보았다.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정탐해 온 잉그비아 왕국군 포진이었다.
“내 땅을 허락 없이 짓밟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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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계속 피하는 것은 사기에 좋지 않았다. 특히 용기를 최고의 명예로 아는 기사들은 사흘도 참지 못했다. 적이 안 보이면 모를까, 아침저녁으로 안부인사처럼 야유를 주고받으니 참을 수 있어도 참지 않아야 참된 기사였다.
“전군 200야드 앞까지 완보로 전진.”
로벨의 명령은 발 빠른 전령과 목청 좋은 나팔수를 통해 각 부대로 전달되었다. 조금 빠른 곳과 조금 느린 곳이 있지만 제법 훌륭하게 기동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볼탄 반도 병사다웠다.
로벨은 숫자를 1에서 100까지 차분히 헤아린 후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적의 사거리까지?”
“180야드입니다.”
“크로스보우를 준비해.”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앞으로 내세우고 이어서 켈트 경과 바이란 경에게 명령했다.
“측면을 내주면 안 되오. 휘하 병사를 이끌고 외곽으로 이동하시오.”
“Yes, My Lord!”
로벨 로드릭 군의 접근을 알아챈 잉그비아 왕국군도 수비진형을 갖추었다. 통나무를 엇갈려 세운 바리게이트 뒤에 파비스를 촘촘하게 세우고 롱보우를 장전했다.
“주군! 돌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저 얄팍한 방책 따위 단숨에 뭉갤 수 있습니다!”
로벨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수비진을 뚫어도 바로 뒤가 숲이라 기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 나팔소리가 울리고 북소리가 요란하자 금세 잊어버린 모양이다. 용맹함과 무식함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경들은 결정적인 순간 적의 심장을 찔러야 하오. 좀 더 참고 기다리시오.”
로벨은 좋게좋게 타이르다가 그래도 말을 안 들어 아론다이트를 두 마디쯤 뽑았다. 마지막까지 “돌격! 돌격! 돌격 명령을!” 외치던 기사가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울프 용병단을 위시한 제1진이 잉그비아 왕국군의 사정거리로 접어들었다.
“아처-”
바다냄새가 물씬 나는 바람을 타고 메아리가 들려왔다. 뾰족한 나무 방벽 사이로 반짝이는 쇠붙이가 올라갔다. 잉그비아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숙원 사업으로 창설한 롱보우 부대였다.
“벌써?”
로벨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반격하고 싶어도 크로스보우의 사거리가 아니었다. 전장의 3요소 중 하나인 거리를 너무 쉽게 내주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옆으로 돌려 아군 진형을 따라 달렸다.
“파비스 뒤로! 파비스 뒤로! 방패를 올려라!”
“실드 월-! 실드 월-!”
한편, 객장(客將)으로 아쉬울 것이 없는 더스틴 폴라 경은 화살깃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람을 읽는군.”
그 말 그대로였다. 잉그비아 왕국의 숙련된 사수들은 방풍림 위로 부는 해양풍을 이용해 장거리 곡사 사격을 펼쳤다. 쏴아아- 점점이 솟아오른 화살이 정점을 찍고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 온다!”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