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망치
로벨은 맥기 경, 호른 경, 더스틴 폴라 경, 과묵한 몬트 외 직속 랜스 3인방을 이끌고 전투가 벌어진 강변을 정찰했다.
맥기 경의 명예를 생각해서 ‘전투’라고 표현한 거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자갈로 된 강변에 시체 4, 50구가 너부러져 있고, 한 팔 길이의 롱보우 화살이 어지럽게 꽂혀있었다.
“시체를 왜 거두지 않았지?”
“그것이... 저쪽으로 가면 저놈들이 화살을 쏘아대서...”
로벨은 강 건너 잉그비아 왕국군을 보았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150야드? 160야드? 아바레스트처럼 강력한 쇠뇌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어렵소.”
더스틴 폴라 경이 수염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어째서 말이오?”
“바람이 안 좋소.”
겨울이 막 지난 시기였다.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강한 북서풍이 불었다. 로벨은 컨틀렛을 벗고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그리고 달인의 말을 받아들였다.
‘정면대결은 어렵겠어.’
로벨의 불편한 심기를 아는 듯, 강 건너 잉그비아 왕국군이 검지와 중지로 브이(V)를 그리며 야유했다.
에르나 왕국과 포비아 왕국은 적국 포로를 잡으면 무기를 못 쓰게 검지와 중지를 잘랐는데, 거기에 한이 맺힌 잉그비아 왕국군은 ‘이 손가락도 잘라보시지!’ 라며 도발했다. 유치한 짓이지만, 전쟁이란 것이 유치함의 결정체 같은 거라 매우 효과적이었다.
“저 시브랄탱탱 섬촌놈들이! 그 빌어먹을 손가락을 뽑아다 똥구멍에 박아줄까!”
“저놈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썰어다가 저놈들이 좋아하는 라임에 절여 애새끼한테 먹여주마!”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벌이 길길이 날뛰었다. 용병의 날것 그대로 쌍욕을 들은 로벨 이하 기사들은 속이 안 좋았다.
“그만해. 어차피 저쪽에 들리지도 않아.”
로벨이 한마디 하자 두 용병은 쒸익- 쒸익- 거리며 분을 삼켰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은 용병만이 아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이 늙은 말을 앞으로 몰았다.
“허나, 저 천박한 것의 무례를 그냥 넘길 순 없소.”
더스틴 폴라 경은 어깨에 멘 롱보우를 풀었다. 그의 활솜씨를 잘 아는 로벨 일행이 반색했다.
“저들을 혼내줄 수 있소?”
“그건 좀 어렵소.”
더스틴 폴라 경은 허리에 찬 화살을 쓸어 만졌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골라 롱보우 시위에 걸었다.
“죽은 자는 혼날 수 없으니.”
활을 올리고, 시위를 당기고, 구름을 향해 쏘았다. 기다란 화살이 햇살 사이로 사라졌다. 엉뚱한 곳에 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무렵, 강 건너 잉그비아 왕국군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헤드샷!”
충분히 기대했음에도 기대 이상이었다. 강변의 강한 역풍을 뚫고, 150야드 밖 머리통을 정확히 맞혔으니 놀랍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와우... 우리 기사 나리만 괴물이 아니구만?”
“누가 괴물이야?”
로벨은 넋이 나간 발가락에게 핀잔을 주고 적진을 살폈다. 한방 먹은 잉그비아 왕국군은 허둥지둥 강가에서 떨어져 파비스 뒤에 숨었다.
맥기 경과 울프 용병단은 껄껄 웃었다. 과묵한 몬트조차 고개를 돌리고 미소 지었다.
“그런데 저쪽은...?”
로벨은 소란스러운 잉그비아 왕국군 진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사들이 풋 컴뱃 아머(foot-combat-armor: 도보용 판금 갑옷. 말을 타지 않아 창받침이 없고,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판금으로 덮여있다)를 입고 있었다. 실제로도 전투마가 몇 필 되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은 말을 싫어하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배로 급히 건너오다 보니 말을 놓고 온 것 같습니다.”
“기사란 작자들이 천것처럼 걸어 다니다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양이군.”
더스틴 폴라 경이 롱보우를 어깨에 걸며 쓴소리했다. 떠돌이 기사도 기사였다. 아니, 가진 것이 기사의 자존심뿐인 편력기사이기에 영지와 재산을 가진 기사보다 기사답게 행동했다. 반면, 가진 것이 많은 로벨은 추상적인 자존심보다 현실적인 전투력에 집중했다.
‘기병이 없단 말이지...?’
로벨의 심중을 읽은 것은 과묵한 몬트뿐이었다.
“강을 건너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도하할 곳이 여기뿐이야?”
로벨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앞서 정찰을 마친 호른 경이 보고했다.
“상류로 올라가면 강철산의 협곡이 나오고, 하류로 내려가면 뗏목을 쓸 수 없을 만큼 수심이 깊습니다.”
결국 3천에 가까운 군대가 갈 수 있는 길은 이곳뿐이었다.
“그럼 됐어.”
“됐다니요?”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틀어 아군 진형으로 향했다.
“우리가 못 건너면 저들도 못 건널 거야. 그렇지?”
이번에는 과묵한 몬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
로벨은 다음날 전군의 기사와 기마 용병을 모두 소집했다. 로벨의 랜스를 포함해 총 217명이었다. 흩어져 있을 때는 몰랐지만, 한곳에 모아두니 중장기병의 위용이 대단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로벨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솔을 두고 모인 기사들은 젊은 공작이 공명심에 눈이 멀어 수마(水馬)를 명령할까 덜컥 겁이 났다. 공작의 괴물 같은 말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의 소중한 전투마는 안 되었다.
“천 개의 창도, 만 개의 화살도 두렵지 않으나, 맨몸으로 강을 건널 순 없습니다.”
로벨은 오해를 오래 두지 않았다.
“강을 건널 필요 없소.”
그리고 안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동쪽으로 하루를 달려가서, 하루를 쉬고, 다시 하루 안에 돌아오시오.”
기사 눈높이에 맞춘 간단한 명령이었다. 이행하는 것은 쉽지만,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루를 달려서... 어디를 다녀오라는 겁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오. 본인이 한 말을 그대로 수행하면 되오.”
로벨은 말을 타지 못하는 어린 기사 종자와 수행원은 놓고, 무기와 식량을 넉넉히 챙겨 가라고 당부한 후 내보냈다. 그리고 펄프 대장 이하 각 군의 지휘관을 불러 모았다.
“기사들이 진영을 떠나면 즉시 행군을 준비하시오.”
로벨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기사들만이 아니었다. 최선의 질문이 고작 이것이었다.
“저희도 동쪽으로 갑니까?”
“아니오. 서쪽으로 갈 것이오.”
로벨의 엉뚱한 명령에 파도성에서 온 용병 대장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곳은 협곡이라... 부대를 두기가 어렵습니다. 약탈도, 아니, 보급도 어렵고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3일치 식량만 준비하시오. 우리는 3일 후 불타는 강을 건너 북진할 것이오.”
@
로벨 로드릭 군 병사들이 부대 이동으로 부산을 떠는 가운데, 마녀 키르케가 주둔지를 둘러보고 로벨의 육각막사를 찾아왔다.
“기만책이죠?”
“응.”
로벨을 닮아서 평소에는 맹한데 가끔씩 날카로웠다. 로벨의 강압에 꾸역꾸역 짐을 싸던 어린 집사가 깜짝 놀랐다.
“기만책이요?!”
“쉿.”
로벨이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2,500명의 병사는 계곡을 통해 불타는 강을 넘어간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알아야 했다. 어린 집사가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강을 건너는 게 아니에요?”
마녀 키르케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어린 집사가 잉그비아 왕국의 지휘관이라 생각해보세요. 적의 기사가 강 하류로, 적의 본대가 계곡으로 이동하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어... 양동작전?”
“맞아요! 우리 집사님 정말 똑똑해!”
어린 집사는 칭찬에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왜 3일이에요?”
“그건... 음...”
로벨은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는 두 사람이 재미있어서 하하, 웃고 말했다.
“하루는 의심하고, 하루는 조심할 테니까. 하지만 기마 전력이 거의 없으니 3일 이상 고민하지 않을 거야. 우리쪽 기사들이 강을 건너면 평지에서 수비할 수 없잖아.”
어린 집사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간단히 속을까요?”
“기만술을 알아채고 강을 지키면 실패, 우리가 우회해서 올 거라 생각하고 주둔지를 옮기면 절반의 성공이야.”
“절반이요? 그럼 완전한 성공은 뭐에요?”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들이 강을 건너오는 거야.”
@
로벨은 잉그비아 왕국군의 지휘관 역량을 시험했다. 아주 유능하거나 아주 무능하다면 지금 자리를 계속 지킬 것이고, 의심이 많거나 조심성이 강하면 제2방어선으로 후퇴할 것이고, 전공에 욕심이 많으면 둘로 나눠진 로벨 로드릭 군을 격파하기 위해 공세로 나올 것이다.
로벨은 세 번째 가능성에 배팅했다. 고르곤 공작이 장악한 잉그비아 왕국에서 쫓겨나듯 북해를 건너온 기사들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마가 없는 것이 증거였다. 그런 처지라면 필히 전공이 고플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사를 떼어냈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거야.”
로벨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로벨이 이끄는 2,500명의 본대가 강철산 계곡으로 접어들 무렵, 잉그비아 왕국군이 불타는 강을 건너 로벨의 후미를 점거했다.
그러나 로벨은 계곡 입구에 방어진을 세우고 있었다. 한 팔 간격으로 촘촘히 설치된 파비스와 고지대를 점령한 크로스보우가 작은 요새 수준이었다.
고지대 농성은 잉그비아 왕국군이 에르나 왕국군을 상대로 즐겨 사용한 전술이었다. 그렇기에 고지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장갑의 기사들과 숙달된 롱보우 사수가 있어도 로벨 로드릭 군의 수비를 뚫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동쪽으로 떠난 볼탄 반도 기사들이 느닷없이 뒤에서 들이닥쳤다. 200여 기의 중장 기병에 거리와 속도가 더해지자 2,000명 이상의 전투력이 발휘되었다. 옛 신의 철퇴처럼 잉그비아 왕국군을 때렸다.
보병이 적의 기동을 저지하고, 기병이 적의 후방에서 두드리는 것을 흔히 ‘모루와 망치’라고 한다. 수많은 전쟁 전문가가 가장 이상적인 포위공격으로 손꼽은 전술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다 그렇듯, 이론적으로 완벽한 것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았다.
사람의 시야는 생각하는 것보다 좁고 낮아서 300야드만 떨어져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한 번 부대를 나누면 아군의 전령도 아군의 위치를 찾지 못해 수 시간 동안 헤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 진데, 수 마일에 이르는 전장에서 부대와 부대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적을 포위한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각개격파 당하거나, 겁먹은 지휘관이 전장을 이탈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러 지휘관이 망치와 모루 전술을 몰라서 밀집대형으로 전면전을 고집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냈네요!”
“에헴.”
잉그비아 왕국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루에 몸을 올리고 망치질을 감내했다. 잔혹한 일이었다. 기마전력이 없는 잉그비아 왕국군은 강철을 두른 볼탄 반도 기사 발아래 처절하게 갈려나갔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오른쪽은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이고, 왼쪽은 숨을 곳이 하나도 없는 끔찍한 평야이며, 뒤쪽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쇠뇌병과 장창병이 살기를 띠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 섬나라 잡놈을 죽여라!”
“이히럇! 히럇!”
세 차례 돌격이 끝나자 잉그비아 왕국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일부는 항복하였고, 일부는 계곡물에 몸을 던졌다. 북해 해안까지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두 자릿수에 불과했다.
포비아 왕국 대 잉그비아 왕국의 첫 전투는 로벨 로드릭 공작의 지휘하는 포비아 왕국의 대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