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롱보우
기술이 발전하고 문화가 발달해도 인간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또 다른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어갔다. 기후와 환경이 달라도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들고, 싸우고, 사랑하며 살아갔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겉모습만 다를 뿐 속내는 거기서 거기였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잉그비아 왕국이 훼까닥 뒤집혔습니다요!”
겨울이 완전히 지나 꽃봉오리가 파릇파릇 피어날 무렵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해 건너 잉그비아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하이랜드의 고르곤 공작이 3천의 정병을 이끌고 린딘 시티를 장악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엄청난 속도였다. 잉그비아 국왕 에드워드 3세는 봉신을 소집할 겨를조차 없어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포비아 왕국의 검은 숲으로 망명했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포클랜드의 국왕과 볼탄 반도의 로벨에게 전령을 보내왔다.
어린 집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거 아니에요.”
어린 집사다운 판단이었다. 그러나 펄프 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벽을 뚫고 창칼이 날아드니까 문제 아니오.”
“벽을 단단히 만들면 되죠!”
“그럴 바에 싸움을 말리는 쪽이 싸게 먹히지 않겠소?”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끙! 소리를 내었다. 세월이 남기고 간 지혜와 연륜은 무시하지 못했다. 펄프 대장은 정치학이나 군사학을 배운 적 없음에도 잉그비아 왕국의 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에드워드 3세는 친(親)포비아 왕국파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잉그비아 국왕을 지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르곤 공작도 친 포비아 왕국파에요.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한패라서 문제죠.”
어린 집사가 반박했다. 고르곤 공작을 지원해서 빚을 씌우고, 류트 공자를 넘겨받자고 제안했다. 펄프 대장은 음흉한 듯 순진한 발상에 한숨 쉬었다.
“어중이떠중이 긁어모은 부하들을 다잡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시오?”
“뭔데요?”
“공동의 적을 만드는 거요.”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감탄했다. 외팔이 더치와 더스틴 폴라 경은 그런 로벨을 경악스럽게 보았다. ‘기사 나리가 나보다 똑똑해?’, ‘과연 공작은 다르군!’ 펄프 대장은 이해력이 부족한 친구들을 위해 좀 더 쉽게 설명했다.
“왕위를 찬탈해도 봉신들이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내전이 계속될 뿐이죠. 반란에 가담한 기사, 방관한 기사, 저항한 기사를 하나로 만들 계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동의 적이야?”
“에르나 왕국은 강하고, 네일 공국은 빈곤합니다. 두 나라와 싸워서 얻을 것이 없지요.”
“포비아 왕국은?”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만만한 상대지요. 게다가 ‘적통’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있습니다. 제가 하이랜드의 공작이라면 류트 공자의 정통성을 내세워 볼탄 반도를 공격할 겁니다.”
@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로벨에게는 익숙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 해도 확신이 없었다. 고르곤 공작이 정말 볼탄 반도를 공격할지, 공격한다면 언제일지 정보가 부족했다.
로벨이 이런저런 이유로 머뭇거리는 사이, 호른 경이 새로운 급보를 가지고 늑대성을 찾아왔다.
“잉그비아 왕국군 2,500명이 사트로 시티 서쪽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로벨은 흐룬팅을 닦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이제 막 봄농사가 시작되었다. 전쟁을 치를 시기가 아니었다.
“2,500명?”
“예. 2,500명입니다.”
에드워드 3세가 왜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상 이상으로 동작이 빨랐다. 어린 집사가 주판용 돌멩이를 와르륵- 쏟고 소리쳤다.
“말도 안 돼요! 린딘 시티를 점령한지 얼마나 됐다고요?”
호른 경은 주군과 대화에 끼어든 어린 집사를 못마땅하게 힐끔 보고 말했다.
“병력 규모를 보아 위력정찰 내지 거점 확보를 위한 선발대일 것이다. 집안정리를 하면서 반기를 든 기사와 의심스러운 기사를 계속 보내겠지.”
펄프 대장이 한 말과 비슷했다. 어린 집사는 로벨과 호른 경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기사들은... 무섭나요?”
“기사가 하는 일이 거기서 거기야, 크게 다르지 않아.”
로벨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호른 경은 아니었다.
“기사보다 까다로운 것이 요먼(yeoman)부대입니다.”
“요먼?”
“잉그비아 왕국의 자유민 계급입니다.”
로벨은 자유민이 왜 무서운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자유민(freeman)인데? 기사처럼 권리를 지키는 것도, 농민처럼 땅을 지키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이웃나라라 해도 정치와 문화가 판이게 달랐다.
“에드위드 3세가 자유민을 롱보우맨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롱보우맨이 유명하긴 하지.”
잉그비아 왕국 출신의 철사자 용병단과 싸운 적이 있었다. 그들이 쓰는 롱보우는 포비아 왕국의 롱보우보다 사거리가 길고 위력적이었다. 그런 병사가 수백, 수천 명이면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북해 해안은 사트로 가문의 영지잖소? 그쪽 반응은 어떻소?”
“엉망입니다.”
호른 경우 한마디로 설명하는 재주를 보였다. 붉은 산 전쟁에서 손실된 병력과 재화를 회복하지도 못했는데, 봉신들까지 분열되어서 엉망진창이었다.
“에이, 썩어도 준치잖아요? 검은 성과 강철성이 버텨주겠죠. 그사이 우리는 에드워드 3세를 지원하든 고르곤 공작과 협상하든...”
“아... 앗!”
로벨은 강철성이란 말을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어린 집사는 프란시스 시티 점령 후 수백 건이 넘는 계약을 담당하며 잊은 듯한데, 로벨은 잊지 않았다. 로벨이 직접 계약한 몇 안 되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영주님?”
“강철성... 북부대로... 통행세... 보호조약...”
어린 집사는 로벨의 의식을 따라가다 마침내 기억을 떠올렸다. 북부대로의 권리를 나누며 강철성 이하 북부 영주들과 약속했다. 세금의 40%를 늑대성이 가져가는 대신 유사시 군사적 협력을 아끼지 않기로 말이다.
“지금이 그 유사시잖아요!”
“도반 도트넘 백작. 그자의 짓이야.”
증거는 없지만 심증이 확실했다. 북부대로 조약, 프란시스 가문의 몰락, 잉그비아 왕국의 침략으로 이어진 역사의 흐름에 로벨은 필연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필연’이었다.
로벨의 생각을 따라잡은 어린 집사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괴물은... 그때부터 준비하고 있었군요.”
호른 경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나 설명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 바로 강철성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북부대로 장악한 외세를 무찌를 군대를 보내라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강요였다.
@
로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로벨이 지원을 거절하면 영악한 도반 도트넘 백작은 잉그비아 왕국군과 손잡고 남침할 것이다.
프란시스 가문의 정통성을 지킨다는 고르곤 공작의 명분에 로드릭 가문이 약속을 저버렸다는 강철성의 빌미가 더해지면, 붉은 산 전쟁의 울분이 가시지 않은 북부의 영주들이 기꺼이 남쪽으로 창칼을 돌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로벨이 장악한 남부의 영주 중에도 배신자가 나올 수 있었다.
“역시 악마의 계약이었어요. 하아...”
“북부대로 조약을 체결할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로벨은 볼탄 반도의 봉신들을 소집했다. 가을과 겨울에 공들인 보람이 있어서 상당수의 봉신이 소환에 응했다. 프란시스 가문의 눈치를 살피는 가문도 차마 거부할 수 없어 방패세를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모인 군대가 무려 2,800명이었다. 울프 용병단을 비롯한 전쟁 용병만 1천 명에 헤아렸다. 로벨이 직접 이끄는 군사로는 최대규모였다.
“파도성은?”
“프리랜서 220명을 보냈습니다.”
“호수성은?”
“칭병(稱病) 중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방패세를 보낼 듯합니다.”
로벨은 두 가문의 소극적인 태도가 아쉬웠지만 티 내지 않았다. 그러나 로벨을 오랫동안 따라다닌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번에 이기면 두 백작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인정 안 하면 혼쭐이 날 텐데 당연하죠.”
로벨은 기사와 용병대장을 불러 강철성으로 진군을 명령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진군로에 위치한 깁스 자작령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네 자릿수의 군대는 그냥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자연재해였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봉신들을 따라가며 식량과 자재를 징발당한 주민들을 보았다.
“좀 미안한데...”
“뭐가 미안해요? 싸가지 없는 깁스 가문 영지민인데요?”
“그래도 귀족인데 싸가지라니...”
죄 없는 영지민이 피해를 입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 몰래 차용증을 끊어 마을 촌장들에게 나눠주었다. 로벨 로드릭 군이 징발한 물자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어린 집사가 알면 게거품 물고 로벨의 정수리를 물어뜯으려 할지도 몰랐다.
호른 경은 로드릭 가문의 인장이 찍힌 차용증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들이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로벨도 10년 넘게 마을을 다스린 영주였다. 겁 많고 비굴한 농민이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기사에게 금전을 요구할 수 없었다. 늑대성의 재정상 요구해도 곤란했다.
“정말 힘들면 하지 않겠소?”
피해를 입은 모든 마을을 도울 순 없지만, 꼭 필요할 마을은 돕겠다는 뜻이었다. 푸른 피가 흐르는 기사치고 대단히 자비로웠다. 호른 경은 그 정도로 만족했다.
“과연, 나의 주군이십니다.”
@
각 지역의 군대가 강철성 북쪽 불타는 강에 집결했다. 소대 규모 군대부터 중대 규모 군대까지 제각각이었다. 로벨은 지난날의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흉내 내어 병력과 병과가 엇비슷하게 3개 대대로 재편했다.
1대대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중심이고, 2대대는 덩굴성의 에디즈 자작이 중심이며, 3대대는 바람성의 맥기 남작이 중심이었다. 물론, 편의적인 부대편성이었다. 주종관계조차 느슨한 마당에 기사들끼리 명령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각자 싸우게 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겠지.’
잉그비아 왕국군도 비슷했다. 어쩌면 로벨 로드릭 군보다 더 열악했다. 국왕파와 공작파가 나누어진 상황에서 모난 돌처럼 쳐내진 기사들이니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병력도, 지리도, 사기도 우리가 유리해. 이길 수 있어.’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로벨의 본대보다 앞서 출발한 맥기 남작의 군대가 불타는 강 상류에서 기습을 당했다. 생각 외로 피해가 막심했다.
“사상자가 200명이라고?”
“그, 그것이, 갑작스럽게 공격 당해서...”
로벨과 함께 보고를 받은 호른 경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의 전투로 200명이 손실된단 말이오?”
“강 건너에서, 강 건너편에서 활을 쏘았소. 믿기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 빠, 빨랐소. 우리군의 화살은 닿지 않는데, 저들의 화살은 쏠 때마다 아군 진형을...”
적의 주둔지인 북해 해안에서 12마일이나 떨어진 곳이라 방심한 탓도 있겠지만, 잉그비아 롱보우의 위력이 대단한 탓도 있었다.
“잉그비아의 롱보우 부대... 생각보다 까다롭군.”
로벨 로드릭 군에도 바위성 병사를 비롯한 롱보우 부대가 있지만, 그 숫자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북방계 대륙 국가가 대부분 그러하듯 크로스보우가 주력이었다. 호른 경이 음울하게 평가했다.
“사거리와 발사속도에서 롱보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어린 집사는 크로스보우맨 중심의 울프 용병단이 무쓸모란 말에 발끈했다.
“그럼요? 그럼 뭐에서 이겨요?”
“정확도와 안정성에서 유리하다. 기계만 고장 나지 않으면 100발이고 1,000발이고 꾸준히 쏠 수 있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큰 메리트가 없네요.”
마녀 키르케가 중얼거렸다. 강이라는 수평적인 장애물 때문에 크로스보우의 장점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적의 지원군이 계속 올 거야. 해안에 요새를 건설하면 전쟁이 한없이 길어져.”
로벨은 패전을 보고한 맥기 경의 기사를 물리고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해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