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73화 (273/605)

273화. 불로불사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고, 영광과 좌절이 교차하는 가운데, 달갑지 않은 숙취와 새로운 인연이 남은 그럭저럭 성공적인 토너먼트였다.

사소한 해프닝이라면, 12번의 압도적인 승리로 우승을 차지한 ‘페티 하트 경’이 로벨 로드릭 공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로벨의 명성은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작위와 명성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출전한 명예로운 기사가 되었다.

“볼탄 반도 남동쪽에 기름지고 광활한 동부평야가 있소.”

또 다른 해프닝이라면,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진 않은 스카우트 제의였다.

“경이 원하면 로드릭 가문의 기사로 맞아 기름진 땅과 건강한 말을 선물하겠소.”

로벨을 오랫동안 따른 측근들은 깜짝 놀랐다. 로벨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는 수없이 많지만, 로벨이 먼저 충성을 요구한 기사는 처음이었다. 호른 경을 비롯한 젊은 기사들은 시기심 비슷한 감정을 보였다.

“제안은 감사하오나, 본인은 해야 할 일이 있소.”

떠돌이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은 로벨의 유례없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질투가 분노가 되었다.

“네 이놈! 감히 공작님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일개 편력 기사 주제 볼탄 반도의 주인을 모욕하는가!”

로벨은 황당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보았다. 화를 내도 내가 내지 왜 니들이 난리냐는 표정이었다.

“경들은 왜 아직도 남아 있소?”

“저희는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저 무례한 자를...!”

집에 가라니까 아직도 안 가고 뭉그적거리는 기사들이었다. 좋게 말하면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고, 나쁘게 말하면 시키지 않은 일로 사고치는 자들이었다.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더스틴 폴라 경과 대화를 뒤를 미뤘다.

“강요하진 않겠으나 잠시 머물다 가시오. 본인의 식솔 중에 재주 많은 마법사가 있으니, 경이 찾고자 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마법사란 말에 화색을 띠었다. 그가 찾는 것은 신비의 영역에 있는 물건이라 기사나 상인보다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호의에 감사드리오. 그럼 며칠만 신세 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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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어린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사 흉내를 내며 놀았고, 머리가 굵은 청년들은 쇠와 말로 그려진 풍운을 꿈꿨고, 어른들은 그런 자식을 후드려잡느라 바빴다.

지미와 루시 여관에 장기투숙하게 된 더스틴 폴라 경은 등짝을 맞으며 쫓겨나는 청년과 귓불이 잡혀서 끌려가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며 소감을 밝혔다.

“좋은 영지로군.”

술 마시러 온 이웃들이 어이없어했지만,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100년 전에도 그랬고, 100년 후에도 그렇겠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는 유라피아 대륙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지방을 돌아다녀도 로드릭 영지처럼 평화로운 곳은 찾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가 실종되고, 큰아들이 세금을 못 내 한쪽 팔이 잘리고, 막내딸이 새끼 양 한 마리 가격에 도시로 팔려가는 광경을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처럼 용맹하고, 여우처럼 영악하며, 사슴처럼 자애롭고, 늑대처럼 외로운 기사라...’

로벨이 들어도 갸우뚱하고, 짐승들이 들어도 무슨 헛소리냐고 따질 이야기였다.

“어이쿠! 영주님! 이 누추한 곳에 무슨 일이십니까요?”

“어어억? 영주님이다! 영주님이 오셨다!”

악마도 제 말하면 찾아오는 법이라, 기가 막히게 로벨이 나타났다. 여관주인 지미가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굽신거렸다. 술 취한 손님들도 허둥지둥 일어나 머리 조아렸다.

로벨은 지미를 일으켜 옷을 털어주었다.

“내 손님이 있어서 왔어. 신경 쓰지 마.”

어느 손님인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여관 안의 시선이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떠돌이 기사를 향했다.

“이야기 좀 나눠도 되겠소?”

로벨은 더스틴 폴라 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합석했다. 로벨을 따라온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가 재빨리 맥주를 주문했다. 공짜 술은 나이 든 용병과 장난꾸러기 마녀를 행복하게 했다.

“돈 내고 마셔.”

“이이잉! 기사님이 사주시는 거 아니에요?”

“난 안 마실 건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린 집사가 용돈을 줄였어. 지출이 많아서 힘들대.”

“...공작쯤 되셨으면, 용돈은 그만 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더스틴 폴라 경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용병 대장과 하녀를 대하는 모습에서 로벨 로드릭이란 인물됨이 보였다. 영지민과 용병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다.

로벨은 손님을 앞에 두고 너무 떠들었음을 깨달았다.

“어떻소? 지내기 불편하지 않소?”

“공작의 배려로 편히 쉬고 있소.”

자존심 강한 기사라면 성에 초대하지 않고 여관에 머물게 한 것을 서운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개척이 덜 된 동방에서 온 더스틴 폴라 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바깥출입을 할 수 있어 좋아했다.

로벨은 더스틴 폴라 경의 온화한 표정을 보고 덩달아 환해졌다.

“이 두 사람은 내 오랜 벗이오. 이쪽은 유라피아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닌 경험 많은 용병이고, 이쪽은 하얀 숲에서 가르침을 받은 드루이드요. 경에게 도움이 될 듯해서 함께 왔소.”

“늙은 용병과 정통 마녀라. 좋군요.”

펄프 대장은 가볍게 목례했고, 마녀 키르케는 수줍게 웃었다. 로벨이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한 듯 자연스럽게 불로불사의 약이 거론되었다.

“신들이 마시는 ‘넥타르’를 말씀하시는 거죠?”

“신들? 신은 하나잖아?”

로벨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마녀 키르케가 ‘에헤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옛 신의 교단에선 그리 말하죠. 하지만 옛 신 말고도 전쟁신, 바다신, 번개신, 사랑신 등등 수많은 신이 있어요.”

“그거... 좀 위험한 발언이야.”

“저러니까 이단심문관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로벨 일행이 또다시 잡담하자 더스틴 폴라 경이 초조한 듯 헛기침했다.

“지금 넥타르라고 했소?”

“예? 예, 예! 신들이 마시는 술 넥타르요. 인간이 마시면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어요.”

마녀 키르케가 연극배우처럼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이 매번 그러하듯, 더스틴 폴라 경도 마녀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어디요?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소?”

더스틴 폴라 경이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로벨과 펄프 대장도 덩달아 귀를 쫑긋 세웠다. 마녀 키르케는 마상시합 챔피언과 사냥 대회 챔피언이 동시에 관심 보이자 ‘이히힛!’ 웃었다.

“에이, 그냥 전설이에요. 그런 거 없어요.”

로벨은 맥이 풀린 듯 한숨 쉬었다.

“전설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며? 그리고 실재하지 않아도 인지의 세계에서 찾으면 되지 않을까?”

“기사님도 참! 인지의 세계가 서랍장도 아닌데 찾는다고 찾아지나요? 그리고 몇 백 년 전이나, 몇 백 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안 돼요.”

“왜?”

“기사님이 말했잖아요? 신은 하나라고요. 지금의 사람들은 신들의 세계도, 신들이 마시는 불로불사의 술도 알지 못해요. 넥타르를 알지 못하는데, 넥타르가 어떻게 존재하겠어요?”

마녀와 어울리며 알게 모르게 마도학(?)을 배운 로벨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책을 말똥 보듯이 한 더스틴 폴라 경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돌연 화를 냈다.

“그래서 뭐요? 넥타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오? 아니면 없다는 것이오?”

“없다는 뜻이오.”

“없다니까요.”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대답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흥분했군... 하얀 숲의 드루이드도 모른다면, 북해 건너 잉그비아 왕국이나, 인어의 바다 남쪽으로 가야겠소.”

로벨은 여기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런데 왜 불로불사의 약을 찾는 것이오?”

더스틴 폴라 경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 대답했다.

“불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소?”

“인생을 낭비하며 찾는 사람도 없소.”

“...그렇게 말하면 본인이 뭐가 되오?”

“앗, 미안하오. 그런 뜻은 아니오.”

펄프 대장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기사의 환상에 빠진 철부지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아랫입술을 당기며 말했다.

“진짜 불로불사는 아니지만, 비슷한 종족이 있어요.”

“종족?”

“음... 종족이 아닌가? 인지의 존재라 종(種)으로 분류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인지인지 나발인지 관심 없소. 그것이 무엇이오?”

더스틴 폴라 경이 까칠하게 물었다. 마녀 키르케는 기분이 상해서 빙- 돌려 말했다

“동방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지 않나요? 처녀의 피를 마시며 영원을 살아가는 괴물 이야기요.”

“...피라고?”

“편식이 심해서 마늘을 안 먹고, 공수증이 심해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피부가 예민해서 해님하고 사이가 안 좋은 괴물 이야기요.”

전설이나 동화에 무지한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뱀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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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활동하는 뱀파이어를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뱀파이어가 아니라 ‘뱀파이어의 군주’였다.

마음 같아서는 뱀파이어 군주의 정체를 밝히고, 재주껏 잡아먹으라고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자의 재주를 보면 잡아먹으려다 잡아먹힐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정체를 밝히는 행위 자체가 위험했다. 로벨이 뱀파이어 군주의 비밀을 알듯, 뱀파이어 군주도 로벨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볼프 후작도 모르는 것을 보면 내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 내가 먼저 밝힐 수 없잖아.’

결국, 로벨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볼탄 반도에 뱀파이어가 숨어있다는 두루뭉술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떠돌이 기사에게 충분한 정보였다.

“이 땅에 죽지 않는 괴물이 있단 말이군!”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죽을 텐데...”

“심장에 말뚝 박으면 누구나 죽소!”

“그야 그렇지만... 가만, 익숙한 대화인데?”

로벨은 기억을 더듬다가 그것도 뱀파이어 군주와 관련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청동사자 호 사건도 마무리 못했지.’

로벨은 진지하게 마도의 수호자를 생각했다. 늑대의 왕이 패배하고, 볼프 사트로 후작이 물러났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악마추종자와 마도의 수호자가 남아 있었다. 당장 위협이 되는 것은 북쪽 숲 너머의 강철성이었다. 저돌적인 늑대의 왕과 달리 음흉하고 음험한 상대였다.

‘청동사자 호를 구울 소굴로 만든 것은 뱀파이어 군주 소행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왜?’였다.

‘에릭 공작을 몰락시켜서 무슨 이득이 있지?’

로벨은 청동사자 호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을 정리해보았다. 어린 집사가 밝힌 촛불이 촛농 무더기에서 꺼질 무렵, 한 가지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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