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70화 (270/605)

270화. 중심

가을 추수가 끝나면 기나긴 농한기에 접어든다. 새끼줄을 꼬고, 장작을 패고, 양털을 깎아 기름을 짜내는 자잘한 일을 하지만, 여름과 가을에 비하면 대단히 한가한 나날이었다.

어린 집사는 그 꼴을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일해요! 일! 놀지 말고 일하라고요!”

어린 집사는 겨울나기에 들어간 로드릭 영지민을 악착같이 끄집어냈다. 심보가 못돼서는 아니었다. 지난 수년간 벼르고 벼르던 도시 외곽 성벽을 쌓기 시작한 탓이다.

바위성 채석장에서 석재를 끌어오고, 늪지성 벌목장에서 목재를 옮겨와서 로드릭 시티 북쪽과 남쪽에 성벽을 쌓았다. 로벨에게 빚을 진 바위성, 가시성, 구릉성의 영주들이 자발적으로 수레와 가축을 보내왔으며, 에릭 프란시스 공작 편에서 창을 겨누었던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타고 로드릭 시티 외곽을 쭉 돌았다. 북쪽 숲에서 남쪽 늑대성까지 공사 면적이 상당했다. 농경지와 목초지를 제외했음에도 몇 달 안에 끝날 규모가 아니었다.

“예산이 충분해?”

로벨은 보기 드물게 재정을 걱정했다. 어린 집사가 평소와 달리 ‘와하핫!’ 웃었다.

“그럼요. 남쪽에서 보내는 세금과 북쪽에서 걷어 들이는 통행세만 해도 연 10만 페닝이에요. 내년까지 공사비 내고도 남아요.”

로벨은 모닝스타를 세우고 어린 집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서너 걸음 더 걸어간 어린 집사가 뒤늦게 돌아보았다.

“영주님? 왜 그래요?”

로벨은 턱을 괴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 변했어.”

“음? 어디가요? 키가 컸나요?”

“옛날에는 ‘이히히힛!’ 하고 웃었잖아. 그런데 요즘은 ‘우하하핫!’ 하고 웃어.”

로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어린 집사의 웃음소리를 따라했다. 어린 집사의 얼굴이 저녁노을처럼 타올랐다.

“누, 누, 누가 그렇게 웃어요? 아, 아니거든요!”

“그것만이 아니야. 최근에 신경질도 안 부리고, 고함도 안 지르고, 아야랑 이야카도 구박 안 하잖아.”

“그건 그냥, 일이 잘 풀리니까...”

“아니야. 아니야. 너 분명히 변했어. 너 혹시...”

로벨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좋아하는 여자 생겼어?”

“우와아아악! 우아아악! 참새다! 참새가 날아간다!”

어린 집사는 귀까지 빨개져서 공사장으로 뛰어갔다. 로벨은 ‘참새가 위험한 건가?’ 생각하다가 한참 뒤에 어린 집사가 도망치려고 딴소리했음을 깨달았다.

“집사? 어디가? 이리 와! 대답하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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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은 공사 감독을 핑계로 북쪽 망루에 앉아 가죽 술통을 기울였다. 적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라 전망을 즐기기에도 좋았다. 멀리멀리 뻗은 북쪽 숲과 노릇노릇 익어 가는 남쪽 들판과 그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청년 기사와 어린 종복이 아름다웠다.

“저 양반들은 왜 저런다냐?”

“그냥 두쇼. 괴짜 짓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풍쟁이 제이콥이 술통을 옆구리에 끼고 올라왔다. 펄프 대장은 당사자도 알지 못하는 유능함과 성실함을 극찬하며 술통을 강탈했다. 허풍쟁이는 헛웃음을 짓고 어른스럽게 한 모금 양보했다.

“근데 좀 의외요?”

“뭐가?”

“난 대장이 은퇴할 줄 알았거든.”

“이놈의 자식이? 오갈 곳 없는 놈 거둬서 먹이고 재워줬더니 이제 늙었다고 쫓아내려고? 괘씸하기가 아주 그냥...!”

“그런 거 아니잖소. 거 알면서 그만 좀 하쇼.”

펄프 대장은 트림을 거하게 하고 껄껄 웃었다.

“이 동네를 완전히 장악했으니까 한동안 전쟁은 없지 않겠냐? 끽해야 도적소탕이나 하겠지.”

“아, 그러니까 쫓아낼 때까지 버티면서 급료나 챙기겠다?”

“그렇지! 1년만 빌붙어도 얼마냐. 양떼 키울 돈은 나오지 않겠냐?”

허풍쟁이 제이콥은 머릿속에 ‘양치기 펄프’나 ‘목장주인 펄프’를 그려보고 파하! 웃었다.

“대장이 양을? 으하하! 어울리지 않소!”

“나라고 평생 말구종 노릇이나 하겠냐.”

“말구종이 어때서? 기사 나리 말구종이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지.”

펄프 대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술통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구수하고 쌉싸름한 리암 수사표 맥주가 목울대를 간질이며 흘러갔다.

두 사람은 거진 10년을 함께 했다. 속을 까지 않아도 속내가 보였다. 늙고 지친 몸이 쓸모없음을 알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든 용병단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평생 용병으로 살아온 늙은 사내였다. 고향에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었다. 용병 노릇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기사 나리는 쫓아내지 않을 거요.”

“그렇겠지.”

“눈먼 칼에 죽게 두지도 않을 거요”

“그럴 거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그리고 망루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에라! 나도 모르겠소! 알아서 하겠지! 에잉! 난 저렇게 몹쓸 늙은이가 되지 말아야지.”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인성이 보이네. 내가 니 친구냐?”

“난 곰팡내 나는 늙은 친구 안 사귀오.”

“넌 안 늙을 줄 아냐! 아니다! 늙기 전에 죽어라!”

“어? 어어? 왜 이러시오? 하지 마쇼! 떠, 떨어진다! 떨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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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를 데리고 때마침 산책을 나왔다. 성 안에 혼자 있기가 심심한 탓도 있지만, 그동안 관리가 안 된 아야와 이야카 탓도 있었다.

“정말! 너무하잖아요!”

“컹!”

로벨 일행이 늑대성을 비운 사이 찰드 촌장과 울프 용병단이 늑대 남매를 보살폈는데, 얼마나 잘 먹이고 잘 재웠는지 뱃살이 세 겹으로 접힐 만큼 부쩍 살이 올라 있었다.

겨울을 대비해 두툼하게 털갈이해서 망정이지, 여름이었으면 동네 꼬마들한테 돼지로 놀림 받았을 것이다.

“앗! 돼지다! 돼지야!”

“응? 벌써 놀림 받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귀여운 아야와 이야카가 꼬마들을 보고 으르릉-거렸다. 송아지만한 회색 늑대가 송곳니를 보이는 것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옹알이할 때부터 아야와 이야카를 보아온 로드릭 마을 꼬마들은 무서운 것을 몰랐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 아니야! 영주님의 회색 돼지야!”

“까르르륵-!”

꼬마들은 손가락질하며 뒤뚱뒤뚱 뛰어왔다. 아야와 이야카는 사납게 으르렁되는 것과 달리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우정 때문인지 완전히 돌아서서 도망치지 않았다. 살이 쪄서 뛰기 싫은지도 모르겠다. 결국, 동네 꼬마들한테 붙잡혔다. 여기저기 꼬집히고 문질러졌다.

“끼이잉...”

“컹!”

아야가 귀를 뒤로 젖히고 불쌍하게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그러나 마녀도 자유롭지 못했다. 로드릭 마을의 꼬마들은 늑대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만큼 마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동화 속 사악한 마녀와 영주님의 성에 사는 착한 마녀를 별개의 존재로 인식했다.

“언니, 언니, 이거 줄게요.”

이제 5살이 된 지미네 꼬마가 마녀 키르케의 손등을 톡톡 치고 뭔가를 주었다. 마녀는 뜻밖의 선물을 받고 소리쳤다.

“와아! 사탕이네요?”

“우리 아빠가요. 이~따만한 통에 가득 담아줬어요.”

“정말요? 좋겠다... 기사님이랑 집사님은 그런 거 안 해주는데...”

마녀 키르케는 무릎을 구부려 꼬마들과 장단을 맞춰 놀다가 오래 걸리지 않아 헤어졌다. 꼬마들은 손을 크게 흔들며 개울가로 고기 잡는다고 떠났다.

“정말 착한 아이들이에요. 그렇죠?”

잠깐 사이 너덜너덜해진 아야와 이야카가 개과 동물 소리인데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그러거나 말거나 사탕을 우물거리며 산책길을 걸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몸을 푸르르 털고 네 발로 못 걷는 이상한 누이의 보조를 맞춰주었다.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동구 밖 산책은 마을 남쪽 목초지에서 끝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자상한 영주님이 가장 늠름한 말을 타고 총총히 걸어가고 있었다. 마녀 키르케의 얼굴이 조금씩 환해졌다.

“기사님! 기사님! 안녕하세요!”

“아우우우-!”

마녀 키르케가 소리치며 손을 크게 흔들자 아야와 이야카도 덩달아 엉덩이를 깔고 하울링했다.

기사님이 말을 멈추고 마녀 키르케를 돌아보았다. 무어라 대답하는데 바람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고요! 나도 불러줘요!”

마녀는 깔깔 웃으며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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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의 지배자니, 늑대성의 공작이니 화려한 호칭으로 불리지만, 로벨의 일상은 세습 기사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체력단련하고, 아침으로 빵과 우유를 먹고, 오전 동안 무기와 갑옷을 살피다가, 어린 집사에게 코 꿰여서 집무실로 끌려가고, 오후 내내 소송과 청원을 처리하고, 해가 지기 전에 모닝스타를 타고 시장과 공사장을 순찰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사교 편지가 날아든다는 것과 사흘에 한 번씩 대규모 알현을 받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잠깐이지만 볼탄 반도 공작 자리가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별게 왜 아니에요...”

어린 집사가 죽상이 되어 말했다. 영지 내부의 일은 리암 수사와 페리 행정관에게 맡겼지만, 영지 바깥의 일을 어린 집사가 도맡아 처리했다.

“지방 영주들의 중재요청이 4개고, 소송이 7개에요. 그것 말고도 프란시스 시티 선주 연합의 해적소탕 요청, 버팅거 시티 상인 조합의 시장권리양도 요청...”

“아, 미안.”

로벨은 도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도왔다. 수도원 학교에서 행정관리를 여럿 고용하고, 친필로 중재 편지를 쓰고, 울프 용병단을 무력시위에 내보냈다. 거센 항의가 날아들 때도 있었지만, 적절한 대처로 항의 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실로 말하자면 항의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집사의 얼굴색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했는데, 더 큰 사건이 늑대성의 행정을 마비시켰다.

“...토너먼트를 열어달라고?”

바람성의 맥기 경과 구릉성의 마튼 경의 요청이었다. 그리 친해 보이지 않는 기사가 동시에 똑같은 요청을 보낸 것이 신기했다. 그만큼 많은 기사들이 명예와 영광에 목말라 있다는 뜻이었다. 호른 경이 볼탄 반도의 모든 기사를 대표하여 무겁게 끄덕였다.

“수도에서 그랜드 토너먼트가 열릴 겁니다. 그전에 볼탄 반도를 대표할 챔피언이 필요합니다.”

로벨이 반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 나! 내가 갈게!”

“안 돼요!”

“안 됩니다.”

“에이, 그건 안 되죠.”

로벨의 심복들이 일제히 반대서명을 내었다. 공작쯤 되어서 마상시합을 뛰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로벨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지만, 오랜 세월 단련한 늑대성의 측근들은 그 정도로 끄떡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볼탄 반도 공작의 명성과 늑대성의 위상을 높일 기회입니다.”

“그게 더 필요하오?”

로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반문이었다. 자신감과 순진함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은 드물었다. 호른 경은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사람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직도 장미성이 볼탄 반도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대한 토너먼트를 개최하여 프란시스 시티가 아니라 로드릭 시티, 장미성이 아니라 늑대성이 볼탄 반도의 중심임을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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