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69화 (269/605)

269화. 개선식

백상아리 호 외 2척의 갤리선이 볼탄 반도 해안을 따라 노를 저었다. 올 때보다 먼 거리였다. 동남풍이 강한 계절이라 먼 바다로 나가지 못했다. 낮에는 노잡이 노예가 바람을 대신하고, 밤에는 해륙풍을 이용해 항해했다.

로벨은 로드릭 항구에서 늑대성으로 곧장 가고 싶어 했지만, 어린 집사가 극구 만류하여 프란시스 항구까지 남하했다. 포클랜드 항구를 떠난 지 아흐레 되는 날이었다.

“영주님이 볼탄 반도의 공작이 되었음을 널리 알려야죠. 그래야 봉신들의 뒷말을 막을 수 있어요.”

어린 집사는 자유도시와 봉신들에게 편지를 살포했다. 관용적인 문장과 수사적인 표현을 제거하면 ‘국왕 폐하가 인정했으니 닥치고 따르라!’ 내용이었다.

실질적인 영향력은 거의 없는 머나먼 지역의 국왕이지만, 그래도 왕은 왕이었다. 로벨을 향한 충성심이 한층 견고해졌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절정에 이르렀다.

포클랜드를 다녀오면 한가로울 거란 거짓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볼탄 반도의 새 주인이 확정되자 볼탄 반도 외 지역에서도 사람이 찾아왔다. 에르나 왕국의 사절단, 아이란드 왕국의 외교관, 자유도시연맹의 대리인 등등. 그중에는 잉그비아 왕국의 공사(公使)도 있었다.

“호오오... 이제 프란시스 시티가 아니라 로드릭 시티로 옮겨야겠군요.”

“그렇소.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주겠소.”

유라피아 대륙 국가 중 사이가 좋은 나라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포비아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은 무난한 편이었다. 북해 건너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도 있고, 에르나 왕국이란 공공의 적과 네일 공국이란 골칫거리를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은 별개였다.

“잉그비아 국왕이 사람을 보낼 줄 몰랐네요. 그쪽은 사트로 가문하고 친하잖아요?”

어린 집사가 직설적으로 쏘았다. 다소 무례하지만, 볼탄 반도를 장악한 늑대성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볼탄 반도에서 북해 유통망을 끊으면 바다 건너 외딴 섬인 잉그비아 왕국은 막대한 경제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풍성한 콧수염이 매력적인 잉그비아 왕국 공사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외교에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허허허! 혹여 왕위계승전쟁 당시 자국의 용병단이 귀국의 무도한 폐왕(廢王)을 도운 일이라면, 우리 에드워드 3세 폐하와 무관한 일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눈빛을 교환했다. 그 말로 잉그비아 왕국 입장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잉그비아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신왕과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봉기를 단순 반란으로 여기고 구왕과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혹은 정통성을 가진 일국의 왕으로서 보다 정통성이 있는 구왕 쪽에 배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신왕파가 승리하여 왕정이 바뀌고 권력이 뒤집혔다.

잉그비아 왕국 입장에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오랜 세월 친목을 다져온 자비에 후작, 사트로 후작 등이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뜬금없이 로벨 로드릭이란 실세가 나타난 것이다. 허겁지겁 공사를 파견해 아부하는 이유가 있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을 한번 보고 말했다.

“본인은 잉그비아 왕국과 척을 질 생각은 없소.”

“오오. 소문대로 현명하고 자애로우시군요. 나의 왕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로벨은 잉그비아 왕국 공사의 입 바른 아부를 적당히 들어주다가 포클랜드에서부터 고민해온 질문을 던졌다.

“공사에게 개인적인 질문이 있소.”

“편히 질문하시지요.”

“다른 것이 아니라... 오래전 귀국으로 망명간 볼탄 반도의 반역자는 어찌 지내고 있소?”

잉그비아 왕국 공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북해를 건너오기 전부터 예상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긍정적일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는... 고르곤 공작의 손님으로 지내고 계십니다.”

“고르곤 공작?”

로벨은 호른 경을 힐끔 보았다. 호른 경이 한 걸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잉그비아 왕국 북부의 대영주입니다.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처남이기도 하지요.”

지역과 신분만 들어도 대충 짐작이 갔다. 포비아 왕국의 지방 제후들처럼 잉그비아 국왕이 손댈 수 없는 지방 권력자였다.

공사의 표정을 보아 저쪽에서도 류트 공자의 처분을 논의한 모양인데, 잘 포장해서 데려오지 않은 것을 보면 국왕과 공작이 대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로벨은 잠재적 적대세력에 고르곤 공작이란 이름을 새겨 넣으며 공사를 위로했다.

“북해의 왕께서도 머리가 아프시겠소.”

로벨의 한마디에 공사는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감탄했다. 부끄러운 것은 빈약한 왕의 힘이고, 감탄한 것은 잉그비아 왕국의 정세를 꿰뚫어 본 로벨의 식견이었다.

‘무식한 무투파라고 들었는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나 보군.’

로벨은 공사의 무례한 생각을 알지 못했지만, 설령 알았어도 깔깔! 웃어넘겼을 것이다. 기사에게 ‘무식하다’는 그리 큰 모욕이 아니었다. ‘나약하다’나 ‘비겁하다’가 정말 심각한 모욕이었다. 그럴 진데, 영리한 무투파라 호칭했으니 기사 중의 기사 로벨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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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이 노랗게 물들고 과일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떨어질 무렵, 로벨과 어린 집사의 업무도 마무리되었다.

로벨은 장미성을 깨끗이 청소한 후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돌려주었다.

에릭 공작은 형식적으로 로벨의 자비로움을 찬양한 후 성 안에 칩거했다. 로벨이 울프 용병단을 이끌고 늑대성으로 회군할 때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도, 재산도, 명예도 잃은 기사의 몰골은 작고 초라했다.

“...괜찮을까?”

로벨이 중얼거리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수다를 떨다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누구요? 공작님이요?”

“잠깐! 잠깐! 공작님이라고 하니까 우리 공작님이랑 헷갈리잖아요? 에헴! 장미성 공작님이라고 해요. 우리 기사님은 늑대성 공작님이라고 부르고요.”

“바보도 아니고 왜 헷갈려요? 아무튼, 장미성 공작님이 왜요?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성 있겠다, 농장 있겠다, 어지간한 기사보다 풍족하게 살 텐데요.”

“그게 그렇지 않아. 너도 알잖아.”

“어휴! 또 그런다! 영주님은 할 만큼 해줬어요. 호른 경은 독살하자고 제안하고, 브릭 경은 외국으로 추방하자고 주장했는데도 이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줬으면 옛 신이 감격해서 손수 천국행 티켓 끊어 놓았을 걸요.”

로벨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농담에도 대꾸하지 않고 모닝스타의 까만 갈기를 쓸어내렸다. 인간사에 구애받지 않는 모닝스타는 오랜만에 주인과 함께해서 기쁜 듯 총총 걸었다.

“이제 좋은 일만 생각하세요. 음... 포클랜드에서 남겨온 자금이 있으니까 성벽을 지어요. 그리고 자재가 남으면 요새도 짓고요. 아! 그곳에 스톤헤드 요새에서 노획한 대포를 배치하면 어떨까요? 20문이나 있으니 철옹성이 되겠죠?”

“그걸 언제 다 해요.”

“지금쯤 로드릭 ‘시티’ 북쪽과 남쪽에 망루가 지어졌을 걸요? 시작이 반인데, 공사가 반이나 되었으면 다 된 거죠. 히히힛!”

어린 집사는 로벨을 아주 잘 알았다. 무기와 갑옷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성과 요새라 금방 관심을 보였다.

“울프 용병단 숙영지로 쓸 수 있겠다. 그렇지?”

“그럼요!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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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은 귀향길은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한 해의 결실을 본 농부들은 고단한 가운데도 행복한 웃음을 흘렸고, 여름내 살을 찌운 가축들은 게으른 얼굴로 햇살을 즐겼다.

전쟁의 여파가 남아 굶주린 용병과 인육에 취한 괴물이 야지를 돌아다녔지만, 그들도 눈이 있어 200명이 넘는 울프 용병단에 덤비지는 않았다.

로벨은 새롭게 충성한 봉신들의 영지를 지나며 볼탄 반도 공작의 위엄을 드높였다. 무적을 상징하는 깃발 아래 무패를 자랑하는 군대가 행군하니 기사들은 허둥지둥 성 밖으로 나와 새로운 주인을 칭송했다. 충분한 식량과 약간의 금화를 강탈한 것은 영웅서사에 어울리지 않으니 남기지 않도록 하겠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무거운 군장이 무색하게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펄프 대장과 각 소대장은 행군속도를 늦추느라 고생했다. 그러나 군율에 얽매이지 않는 어린 집사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와앗! 늑대성이다!”

언덕을 뛰어오른 어린 집사가 두 팔 벌리고 소리쳤다. 뒤따라 온 마녀 키르케가 덩달아 신나서 껑충껑충 뛰었다. 잠시 뒤 서로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풀피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뚱하게 말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아직 어린 애들이구만.”

울프 용병단은 무거운 대포 수레를 끌고 굳이 가파른 언덕을 오를 생각은 없었기에 한참을 빙 돌아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자 구릉 사이로 노란 밀밭과 옹기종기 모인 집들과 늠름한 늑대성이 나타났다.

“우와악! 우리 집이다!”

“만세! 만세! 드디어 돌아왔다!”

울프 용병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초라해 보일 만큼 날뛰었다. 어이없는 시선이 일부 쏘아졌지만 기쁨에 젖은 용병들은 1온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고향이 최고지. 집은 더욱 최고고.”

펄프 대장이 주름진 미소로 웃었다. 그러나 기쁜 것은 기쁜 것이고, 대장으로 해야 할 일은 일이었다.

“시끄러! 대열 유지한다! 이 머저리들아! 도적떼처럼 날뛰면서 개선할 생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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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봄에 떠나서 여름과 가을을 거쳐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

로드릭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로벨과 울프 용병단의 이름을 외쳤다. 젊은 용병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처녀들은 행렬로 뛰어들어 재회의 키스와 포옹을 나누었다. 눈꼴 시린 연인 탓에 대열이 헝클어졌지만 질책은 없었다. 가장 깐깐한 소대장조차 미소로 봐주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크지 않은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늑대성에 도착했다. 로벨은 귀향의 기쁨으로 들뜬 병사들을 둘러보고 최고의 연설을 남겼다.

“해산해.”

마지막까지 완벽한 개선식이었다.

펄프 대장을 비롯한 고참 용병들은 물자를 정리하느라 성에 남았지만, 페이가 작은 만큼 책임감도 작은 말단 용병들은 자신의 무기와 짐만 챙겨서 시내로 뛰쳐나갔다. 장담하건대, 로드릭 시장의 요식업자와 숙박업자는 올해 최고의 매출을 올릴 것이다.

“주머니도 빵빵하겠다, 군기도 풀렸겠다, 술독 올라 죽은 시체 몇 구 나오겠는데?”

“나도! 나도 놀러가고 싶다!”

“넌 임마! 포클랜드 시티에서 실컷 놀았잖아!”

로벨은 지칠 줄 모르는 모닝스타를 마구간에 묶어놓고 근 반년 만에 돌아온 늑대성을 둘러보았다. 마중 나온 사람은 없지만, 마중 나온 늑대는 있었다.

“컹! 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어미를 격하게 반겼다. 멧돼지도 때려잡을 앞발로 로벨을 덮쳤다. 인간계 최강자 중 하나가 까닥하면 자기 집에서 비명횡사할 뻔했다.

“아야야... 잘 지냈어? 사고 안 치고?”

아야와 이야카는 로벨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짖고, 깨물고, 하울링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굶주린 늑대에게 공격당하는 중이라 여겼을 것이다.

“우리 귀염둥이들! 언니가 왔어요!”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야와 이야카는 표적을 바꿔 마녀에게 달려들었다. 연약한 마녀 키르케는 로벨과 달리 저돌적인 환영을 버티지 못했다. 늑대 차지(?)에 휘말려 요란하게 나자빠졌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뛰어왔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까르륵- 웃으며 늑대 남매와 뒹굴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우쭈쭈! 맞아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가 발라놓은 흙과 지푸라기를 털어내고 홀로 아성으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비워둔 성에는 외로움과 적막함이 고여 있었다. 로벨은 먼지를 털어내듯 침묵을 걷어냈다.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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