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교양
268화. 교양
어린 집사가 귀족 의상을 입히며 신신당부했다.
“사람 많은 곳에 끼지 말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춤 같은 거 추지 말고, 국왕 폐하 얼굴만 보고 바로 나와요. 알았죠?”
“응!”
로벨은 힘차게 끄덕였다. 마상시합에 열을 올릴 때 수시로 참석한 축하 연회였다. 어려울 거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는 다르고, 새로운 왕과 옛 왕은 달랐다. 기사들의 위세가 꺾이고 부르주아 세력이 득세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리해서 궁중연회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에르나 왕국 사교 클럽에서 유행하는 유리 향수란 것이오.”
“과연, 꽃을 장식한 것보다 훨씬 좋군요.”
“고아함으로 따지면 네일 공국의 델프트 블루가 최고지요.”
“그것도 동방 도자기에 비할 바는 못 되지 않소?”
술과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죽어라 먹고 마시는 기사들의 파티가 아니었다. 호탕한 기사보다 고상한 부르주아가 많았다. 자연히 분위기 또한 조용하고 차분했다.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가 두 자릿수로 모여서 현란한 궁중 음악을 자아내는 가운데, 뱃살이 푸짐한 기사와 금화 소리가 찰랑이는 자유민이 자리에 앉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술잔을 기울였다.
와인이 마룻바닥에 고이고, 뼈다귀가 산처럼 쌓이는 ‘일반적인’ 연회에 익숙한 로벨에게 대단히 어색했다.
“어머나, 로드릭 공작님, 어쩜 이리 훤칠하세요?”
“오우거와 레슬링 해서 두 다리를 부러트렸다는 게 사실인가요?”
로벨은 빨갛고 파랗고 노오란 쉬르코를 입은 귀부인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험상궂은 기사들이 뭉쳐서 손칼로 고기를 썰어대는 분위기면 아무리 용감무쌍한 레이디라도 눈치를 살필 텐데, 자상한 미소로 최신 유행과 교양시를 자랑하는 분위기가 되자 반대로 사람 멱따기가 유일한 장기인 기사들이 끼어들지 못했다.
그러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었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 공작의 직위와 수십만 페닝의 자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혼’의 기사 로벨이 바로 그러했다.
“레이디? 조금 떨어져 주겠소?”
“어머나! 어머나! 제가 부담을 드렸나요?”
“그건 아니지만...”
로벨은 손을 붙잡고 가슴을 비비는 귀부인들 탓에 곤욕스러움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나보다 크잖아!’ 로벨의 표정을 오해한 귀부인은 뭐가 좋은지 오호호~ 웃으며 더욱 밀착했다.
로벨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에 닿는 팔을 빼냈다. 이곳이 볼탄 반도라면 호른 경이나 브릭 경이나, 켈트 경이나, 하다못해 페르젠 백작이나 헤르만 백작을 불러서라도 자리를 피할 텐데, 바다를 건너온 상황이라 친분이 있는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 여기 계셨소?”
아니, 한 사람 있었다. 그것도 보통 기사가 아니라 포비아 왕국의 모든 기사를 거느린 기사들의 왕이었다.
“Your majesty.”
로벨에게 엉겨 붙은 귀부인들이 일제히 떨어지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천방지축 말괄량이 같은 포클랜드의 레이디라도 국왕 폐하 앞에서 촐싹거릴 배짱은 없었다.
로벨도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국왕의 표정과 동작을 살폈다.
‘많이 변했구나...’
전쟁터에서 겁먹은 얼굴로 왕이 되기 싫다 울먹거리던 작은 소년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른 탓인지,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들었는지 자신감 넘치는 청년 왕이 되었다.
국왕과 공작의 담화를 방해할 수 없는 귀부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국왕은 손끝으로 추파를 흘리고 멀어지는 젊은 귀부인을 보며 속삭였다.
“혹시 내가 방해한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합니다.”
국왕은 모르겠지만 로벨의 충성심이 소폭 상승했다. 국왕은 와하하! 웃으며 손수 와인을 채워주었다.
“볼탄 반도와 분위기가 달라 불편할 거요.”
“조금... 그렇군요.”
“에릭 프란시스 공작도 그랬지. 이해하시오. 에르나 왕국을 욕하면서도 에르나 왕국의 유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따라 하는 작자들이라 그러하오.”
로벨은 과거 에릭 공작의 품평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기사의 혀를 빌리면 계집애의 수다 모임이고, 부르주아의 혀를 빌리면 교양 넘치는 사교 파티였다.
“그래도 적응하면 나쁘지 않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어험... 델 포니 수도원에서 포도수확이 한창이라 하오.”
“올해는 날씨가 좋으니 좋은 와인이 나오겠군요.”
“기회가 되면 몇 상자 사두는 것이 좋을 거요.”
두 사람은 국왕과 공작이 나눌만한 대화를 시도했다. 왕으로 자란 왕이 아니고, 공작으로 태어난 공작이 아니라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어설픈 지식과 어색한 칭찬을 주고받은 후 적당할 때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프란시스 공작은... 어찌하였소?”
“보고받지 못하셨습니까?”
“아니오. 경이 보낸 서신은 받았소.”
어린 집사가 전후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붉은 장미 수도원에 연금했다. 공작의 예우로 물리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았지만, 그리 고마워하진 않을 것이다. 명예를 잃은 기사는 죽은 것보다 못했다. 로벨은 숨을 조금 들이마신 후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할지 묻는 것이군요.”
“...그렇소이다.”
국왕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나를 죽이려고 한 자비에 후작은 감싸면서, 나를 왕위에 올린 프란시스 공작은 내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소. 기사들이 뭐라 떠들지도 걱정되고... 아, 로벨 경의 공을 낮추는 것은 아니오. 허나 당시 로벨 경은 프란시스 가문의 봉신이지 않았소.”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처우는 로벨에게도 큰 고민이었다. 어린 집사는 장미성과 장미성을 유지할 농장 서너 곳을 남겨주자고 했는데, 호른 경을 비롯한 기존 봉신들이 결사반대했다.
300년의 세월은 상상 이상으로 길었다. 지금은 로벨 로드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숨죽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프란시스 가문을 복권하려는 세력이 나타날 것이다.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제게 늑대성과 백작위를 내려준 주군입니다.”
“충성 서약은...”
“서약을 지운다 하여 과거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에릭 공작이 우정을 기억하는 한 명예롭게 대할 것입니다.”
로벨의 맹세에 국왕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
‘로벨 로드릭의 공작 즉위 축하연회’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새로 오고 나가는 사람이 종종 있어서 얼굴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연회 주최자인 국왕과 주인공인 로벨은 발목이 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린 집사가 걱정할 텐데...’
로벨은 성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어린 집사와 허풍쟁이 제이콥을 걱정했다. 깊은 고민 끝에 이쯤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로드릭 공작,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그렇지 않소. 잘 먹고 있소.”
로벨은 어느 나라 요리인지 모를 접시를 치우고 새 접시를 받았다. 그러나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삼지창을 한 뼘 크기로 축소해 놓은 듯한 ‘포크’와 봉투칼을 날카롭게 갈아놓은 듯한 ‘테이블 나이프’가 어색했다. 그냥 큼직하게 찢어서 씹어 먹으면 될 텐데, 포클랜드의 유행은 이상했다. 그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생겼다. 술잔을 주고받다 보니 경계가 허술해진 모 백작이 사고 쳤다.
“허허! 이거 실례되는 말이지만, 세습 기사 출신치고 교양이 참 바르시오. 보통은 이런 자리에서...”
“실례인 줄 알면 하지 마시오.”
로벨이 정색하며 쏘았다. 반은 연기지만, 반은 진심이라 매우 매서웠다. 이름 모를 백작이 당황해서 헛기침했다. 로벨은 짧은 침묵을 이용해 자리를 옮겼다. 로벨이 떠나자 어린 레이디부터 늙은 부르주아까지 책망하는 눈으로 백작을 보았다.
‘눈치라곤 없는 작자 같으니...’
“그, 그런 의도가 아니었소! 그리 보지 마시오!”
로벨은 홀가분하게 정복왕의 홀을 빠져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는 회랑을 걸었다. 그 사이에도 로벨을 알아본 귀족과 귀부인이 달라붙었는데, 몸부림에 가까운 핑계로 떼어냈다. 누군가 로벨을 찾는다면 후원부터 뒷간까지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로벨 로드릭 후작. 아니지, 이제 공작인가?”
성 밖으로 이어진 회랑 끝에서 마지막 장애물과 마주쳤다. 한때 왕실 수비대장 자리에서 왕국의 실세로 군림한 인물이었다.
“자비에 후작.”
로벨이 이끄는 왕제파에 패하여 지지 세력을 잃었으나 검은 숲에서 구왕파를 몰아낸 공으로 과거의 영광을 일부 되찾았다. 로벨에 의해 흥망성쇠를 겪었으니, 로벨과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벌써 가시는 거요?”
“조금 피곤해서. 실례하겠소.”
로벨은 모자챙을 잡고 인사 후 지나쳤다. 그러나 자비에 후작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프란시스 가문의 핏줄을 경계하시오.”
로벨은 얼결에 멈춰 섰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자비에 후작은 근엄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경고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자는 사실 별 볼 일 없지. 자기 밥그릇이나 겨우 챙기는 작자였으니까. 그조차도 경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테고.”
“...무슨 뜻이오?”
“가진 것 이상을 탐내는 자가 있소. 권력투쟁에 실패하여 외지로 쫓겨났으나, 결단력, 추진력, 그리고 잔혹함에서 배다른 형보다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자요.”
로벨은 곧장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깨달았다. 입술을 비틀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
그리고 공자와 손잡은 악마추종자 이야기였다.
@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라, 포클랜드 시티의 일정도, 왕성의 연회도 마침내 끝이 났다.
로벨은 볼탄 반도로 귀환을 명령하자 뒷골목에서 급료를 탕진하던 선원과 용병이 허둥지둥 양지바른 곳으로 뛰쳐나왔다. 왕국 전체를 돌아다녀도 로벨만한 고용주가 없기에 혹시나 버려질까 질겁했다.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네. 잘 놀았냐?”
“흐흐... 수도는 뭐가 달라도 달라.”
소집령이 내린지 하루 만에 98% 인원이 돌아왔다. 보통의 선장이나 용병대장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백상아리 호 선장이 허허허! 웃으며 감탄했다.
“이번 항해에는 추가 모집이 필요 없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백상아리 호 정도 되는 중형 갤리선이 도시에 장기정박하면 선원 중 절반이 다른 배를 타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 무단이탈했다. 그래서 출항 전날에 급히 인원을 보충하는데, 숫자를 못 채우면 선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된 선원을 납치해서 태울 때도 있었다. 술 취해서 기분 좋게 자다 깨어나니 망망대해 한가운데고, 갑판장이란 놈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일 시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언제 출발할 수 있어?”
“화물적재는 끝났고, 맥주만 조금 실으면 됩니다.”
본래 상하기 쉬운 음식은 싣지 않는데, 맥주만큼은 예외였다. 노잡이 노예는 채찍으로 다스리고, 갑판의 선원은 술로 달래는 것이 전통이었다.
“서둘러. 더 복잡해질 거야.”
로벨은 부둣가에 모인 으리으리한 마차 행렬을 보았다. 로벨을 배웅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과 부르주아였다.
1번 항은 군항이라 어지간한 신분은 들어올 수 없었다. 그 말인즉, 저들 모두 한 가닥씩 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차돌 같은 손으로 코밑을 쓱쓱 닦았다.
“궁상맞게 굴 때가 많아서 까먹는데, 우리 기사 나리가 대단하긴 대단해. 저 콧대 높은 것들이 뙤약볕에 찾아오고 말이야.”
애꾸눈 볼포스가 난간에 기대앉아 뒤를 힐끔 보았다.
“볼탄 반도의 공작이란 자리가 그런 것이지.”
어린 집사 다음으로 로벨을 오래 보필한 외팔이와 애꾸눈이었다. 감회가 남달랐다.
“그런데 대장은 어디 갔어?”
“피곤하다고 먼저 내려갔다.”
“그 양반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먼. 뭘 했다고 벌써 피곤해?”
“농담이 아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은퇴할지도 몰라.”
로벨은 꾸역꾸역 찾아오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용병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하나뿐인 눈으로 하나뿐인 고용주를 바라보았다. 본래도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멀어진 기분이었다.
“이래서 기사가 싫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