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태풍
265화. 태풍
백상아리 호 선장은 백상아리 호 고급 선원을 한곳에 모아 새로운 선주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황금! 직위! 생존!”
사심 가득한 이유에 감명 받은 갑판장은 선원들을 쥐 잡듯이 굴렸으며, 한술 더 뜨는 노예장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열심히 채찍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반발은 거세지 않았다. 노잡이 노예들은 윌 오 위스프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죽을 둥 살 둥 노를 저었다. 쇠사슬로 묶인 이상 좋으나 싫으나 백상아리 호와 생사를 함께했다.
그리하여 로벨 로드릭 함대는 선장이 장담한 제11시 경 인어의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이쁘다!”
마녀 키르케는 뱃전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소리쳤다.
인어의 섬은 초승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화산섬이었다. 크고 작은 돌섬이 주위에 흩어져 있어서 물길을 모르면 큰 배가 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만(灣)으로 들어서면 겹겹이 쌓인 천연 방파제가 선박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다.
“태풍을 피할 만하구나.”
“태풍이 정말 오면 말이죠.”
어린 집사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기뻐하는 선장과 선원과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로벨은 어깨를 으쓱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왕 온 거니까. 소풍 왔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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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섬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판잣집 서른 채에 조각배 열두 척이 전부인 작은 섬마을에 중형 갤리선 3척과 중무장한 용병 수십 명이 등장했으니 그럴 만했다.
섬 주민은 혹시 몰라 아내와 딸을 숨기고 작살과 몽둥이를 준비했다. 전설이 되어버린 울프 용병단을 상대하기에는 빈약한 무장이었다. 게다가 배에서 내리지 않은 선원까지 생각하면 섬 주민보다 로벨 일행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기우가 지나쳤다. 장시간 배를 탄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마을을 헤집고 다니기보다 아늑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싶어 했다.
“쪼그만 게 있을 것은 다 있네요?”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여관과 술집이 있었다. 가끔 태풍을 피해 찾아오는 교역선과 포경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뭐하오? 말 오줌 같은 것밖에 없는데...”
펄프 대장이 맥주잔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술집 주인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세월이 그려놓은 주름보다 전쟁이 그려놓은 흉터가 많은 용병들 앞에서 대놓고 표출하진 않았다.
어린 집사는 걸쭉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 쉬었다. 술집 주인의 억울함이 이해되었다. 육지의 맥주보다 신선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네발짐승의 배설물로 비하할 만큼 나쁘진 않았다. 다만, 근래에 생긴 로드릭 영지민의 고질병이 문제였다.
“뉴 로드릭 마을 맥주가 마시고 싶어요.”
“올해 담근 맥주가 부글부글 끓고 있겠죠.”
“리암 수사님은 실컷 마시고 있겠지?”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허풍쟁이 제이콥이 차례로 동조했다. 심지어 로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때, 외팔이 더치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사자처럼 솟은 머리가 푹 젖어 해초처럼 늘어져 있었다. 정수리가 조금 허전해 보이는 것이 흉악한 네일 공국 용병도 자연의 섭리는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기사 나리, 비가 옵니다요.”
로벨은 나무창을 위로 열고 밖을 보았다. 잠깐 오는 소낙비가 아니었다. 해가 사라진 남쪽 하늘에서 시꺼먼 먹구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불길한 번갯불이 번쩍이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눅눅한 공기를 흔들었다. 쿠르르르릉- 성질 급한 조각구름이 한 발 먼저 달려와 뾰족한 빗방울을 쏟아냈다. 펄프 대장은 맛대가리 없는 맥주를 치우고 투덜거렸다.
“고래 뱃속에 들어온 것 같군.”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고래 뱃속에도 들어가 봤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요. 고래도 본 적 없소.”
어린 집사가 로벨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함께 창밖을 보았다.
“어? 어어? 진짜 태풍이 오나 봐요?”
로벨은 술 냄새나는 어린 집사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창문을 닫았다. 탁-
아귀가 안 맞는 허술한 나무창이지만, 그래도 닫으니까 한결 조용했다. 더불어 분위기까지 가라앉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맥주인지 맥죽인지 모를 것을 한 모금 마시고 애써 밝게 말했다.
“선장 말대로 하길 잘했습니다요! 바다 위에서 저런 걸 만나면 어쩔 뻔했습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 말에 겁쟁이 데비, 외팔이 더치, 발냄새 베커 등이 신나서 떠들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요. 고놈의 널빤지 믿고 바다를 건너는 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요?”
“이래서 남부 샌님들이란. 쯧. 우리 선조는 샘 포클이 응애응애 할 때부터 롱쉽(longship)을 타고 북해를 누볐지.”
“그래봤자 변방 야만족 주제에...”
“오호라? 야만족한테 맞아볼래?”
술잔이 휘둘러지고, 생선뼈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술집 주인은 막돼먹은 용병놈들이 탁자라도 부술까봐 조마조마하게 훔쳐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실내 습도를 높이는 난동을 피해 로벨과 어린 집사 곁으로 다가왔다.
“선원 아저씨들은 괜찮을까요?”
“애꾸눈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마녀 키르케와 어린 집사는 서로 다른 것을 걱정했다. 폭풍우 아래에 7만 페닝을 놓고 온 심정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 반면, 로벨은 무사태평했다.
“오늘은 꼼짝 못 하겠지?”
“2~3일은 꼼짝 못할 걸요.”
“그래?”
로벨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나 고질병은 피하지 못해 인상을 찌푸렸다. 쿠르르르릉... 콰과광-! 천둥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벌이 도란도란 대화했다.
“그 정령인지 괴물인지가 용하네.”
“그것보다 들었수? 이 섬에 세이렌이 있다는데?”
“머메이드가 아니고?”
“어? 뭐가 다른 거요?”
로벨은 맥주로 배를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잔을 흔들며 노래 부르는 용병들과 침 튀기며 멱살잡이하는 용병들이 그대로 정지했다. 아무리 막돼먹어도 대영주이자 고용주인 로벨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나 먼저 들어갈게. 일찍 쉬어.”
자상한 저녁 인사에 용병들은 자세를 고치고 굽신거렸다.
“예. 예. 쉬십시오, 나으리.”
“이놈들은 제가 단속하겠습니다요.”
“니가 뭔데 우리를 단속해?”
“좀 닥쳐봐! 기사 나리 주무신다잖아!”
허풍쟁이 제이콥이 예의 없는 용병들을 두드렸다. 마녀 키르케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로벨을 따라가다가 어린 집사에게 귀가 잡혀 도로 테이블에 앉혀졌다.
로벨은 눈웃음을 흘리고 뒷마당을 지나 객실로 향했다. 술집 주인은 거친 용병과 음험한 마녀를 충견처럼 다루는 기사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정말 대단한 나으린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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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과-쾅-!
로벨은 번갯불과 천둥소리에 눈을 떴다. 대학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번개가 먼저 치고 천둥이 뒤따라온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번개와 천둥이 동시에 울린 것은 태풍이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덜컹-! 덜커덩-!
로벨의 추론을 뒷받침하듯 반쯤 열린 나무창이 요동쳤다. 거센 바람과 굵은 빗방울이 마룻바닥을 흠뻑 적셨다. 문제는 창문만이 아니었다. 건초와 판자로 막지 못한 빗방울이 천장에서 뚝- 뚝- 떨어졌다.
‘...문제가 심각하네.’
어린 집사 말대로 있을 것은 다 있지만,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
로벨은 축축한 침대에서 일어나 맨발로 창문을 닫았다. 잠깐 사이에 소매와 종아리가 흠뻑 젖었다. 비바람은 조금 줄었지만 걱정이 더욱 커졌다.
‘애들은 괜찮을까?’
로벨은 침대맡에 걸어둔 소드 벨트를 챙겨서 방문을 열었다. 신발도 없고 모자도 없어 잠깐 망설였으나 짙게 깔린 어둠을 믿고 걸음을 떼었다.
태풍이 쏟아붓는 빗물은 폭포수와 비견될 만했다. 우물을 지나 본채 뒷문을 여는 10초 남짓한 사이 온몸이 젖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고, 린넨 튜닉이 흠뻑 젖어 무거워졌다. 로벨은 연신 세수를 하며 간신히 홀에 들어섰다.
“으으으... 추워...”
“비 들어온다... 문 닫아...”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객실에 들어가지 못한 용병들이 홀에 대충 자리 잡고 잠을 청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그리 나쁜 잠자리 같지는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찾아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먹구름이 자아낸 그림자 속에서 물컹한 것이 밟히고 구울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했다. 업어 가도 모를 만큼 만취한 용병들은 볼때기가 밟혀도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 기사 나리?”
아니, 모두가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책임질 줄 아는 허풍쟁이 제이콥은 비교적 멀쩡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부스스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로벨은 계속 자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의도한 것 마냥 환한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 허풍쟁이의 동공이 순간 7배쯤 확대되었다.
“기사 나리... 가 아니야?”
번갯불은 짧지만 강렬했다. 거짓을 몰아내고 진실을 밝혔다. 로벨은 깜짝 놀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빗물에 젖은 튜닉이 몸에 달라붙어 소박한 가슴과 굴곡진 허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로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라... 꿈인가?”
허풍쟁이는 이빨에 끼인 생선가시를 우물우물하더니 도로 누웠다. 번개의 잔상은 술기운에 빠르게 사라지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공간을 매웠다.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술 마시던 창가 자리를 살폈다. 용병 못지않게 인사불성이 된 소년소녀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하필 창가라 빗물이 흥건했다. 여름밤이라지만 이래서는 감기 걸리기 십상이었다.
“집사, 집사, 그만 일어나.”
로벨은 어린 집사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마녀 때문에 세게 흔들 수 없었다.
‘정말 사이가 좋은 건지...’
계절이 무색한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아야와 이야카를 끌어안고 자던 버릇인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그냥 두 사람을 한 번에 안아들었다. 기사로 훈련하면서 들어 올렸던 어느 바위보다 크고 무거웠다.
‘끄응...’
로벨은 술 냄새 풍기는 어린 집사와 잠꼬대하는 마녀 키르케의 입술을 피해 머리를 위로 들었다. 발밑을 소홀히 하니 또다시 누군가를 밟았다.
“끄악! 어떤 새ㄲ... 기, 기사 나으리?”
로벨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뒤꿈치로 ‘누군가’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소풍은 무슨...”
로벨은 장탄식을 남기고 혼잡한 술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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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밤새도록 기승을 부리고 아침이 되어서 한풀 꺾였다. 여전히 빗방울은 떨어지지만 뭔가를 깨부술 것 같은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술판 끝에 혼절한 전설적인 용병도 하나둘 부활했다.
“으으으... 잠자리가 안 좋아서 그런가. 볼이 얼얼한데...”
“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누, 누가 나 잘 때 때렸냐?”
술을 물 마시듯이 마셔도 자랑거리가 안 되는-도시민 대부분이 물보다 술을 많이 마신다- 용병들이 평소와 달리 숙취를 호소했다.
“괴물이 사는 곳이라 그런가. 잠자리가 영 안 좋네.”
“괴물? 머메이드?”
펄프 대장은 맥주잔에 붙은 음식 찌꺼기를 대충 긁어내고 창밖에 내밀었다. 빗물이 적당히 고이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정신이 어느정도 돌아오자 간밤에 사라진 사람이 눈에 밟혔다.
“가만있자, 집사 양반이 어디 갔지? 어린 집사 못 봤냐?”
“거기 있지 않았수?”
“여기 없으니까 묻잖아! 어젯밤 마지막에 잠든 게 누구냐? 허풍쟁이, 너냐?”
허풍쟁이 제이콥은 펄프 대장 물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적당히 절제한 탓에 숙취는 없지만, 다른 이유로 표정이 심각했다.
“...여기 사는 게 인어가 확실하우?”
“인어가 아니면?”
“몽마가 아닌가 싶어서... 그...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뭐라는 거냐? 그 나이 먹고 설마 몽...”
“아니오! 아니오!”
허풍쟁이 제이콥은 바지춤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빨개진 얼굴이 신뢰를 주지 못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이 슬금슬금 주위를 피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여자 냄새를 못 맡긴 했지. 이해한다. 이해하는데, 거 나가서 씻어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보여줘? 보여줄까?”
허풍쟁이는 억울했지만, 차마 이상한 꿈을 밝히지 못했다. 기사 나리가 여자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면 정말 미친 놈 취급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필 기사 나리가...? 내가, 내가 미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