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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59화 (259/605)

259화. 승리자

259화. 승리자

말(馬)이 전력질주 할 수 있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잘 먹이고 잘 훈련한 전투마라도 3분 남짓 질주하면 더 이상 달리지 못했다. 중무장한 기사를 태우고 3분을 달리면 자칫 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기절할 때까지 달릴 수 있는 짐승이 말이었다.

‘1마일밖에 안 돼! 할 수 있어!’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우익에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의 우익까지 1마일이 조금 안 되었다. 갤럽(gallop)으로 2~3분 거리였다. 로벨은 기사의 기량과 전투마의 체력과 전쟁의 흐름을 두루 살핀 후 장거리 돌격을 감행했다.

그렇다고 무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마일을 전력질주해서 전투를 벌이면 기사나 말이나 후퇴할 체력이 남지 않았다. 성공하면 적의 진영이 무너지지만, 실패하면 아군의 주력이 괴멸당하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히랴! 히랴! 히랴앗!”

로벨을 비롯한 30여 명의 기사가 바람을 탄 듯 질주했다. 적의 중앙군을 밀어붙이는 펄프 대장의 뒷모습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욕설 비슷한 것이 들린 듯한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해서 확실하지 않았다.

1마일. 산책하기는 조금 멀고, 나들이하기는 조금 가까운 애매한 거리가 2분 21초 만에 지워졌다. 기사 없이 덩그러니 남은 기사 종자와 수행원이 당황해서 아무 무기나 꺼내 들었다. 로벨은 그 용기를 높이 사서 명예롭게 외쳤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다!”

그러나 기사가 아닌 수행원은 그리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저승 가는 길에 명예로 삼고 싶어도 이름과 칼이 동시에 날아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촤악-! 핏물이 마른 땅을 적셨다.

아론다이트는 호수의 요정이 호수의 기사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진 명검이었다. 칼날은 무쇠를 두드려도 이빨 하나 나가지 않고 손잡이는 가벼우나 휘두를 때 무게감이 있었다. 새하얀 칼몸과 섬세한 코등이가 얼핏 예술품처럼 보이지만, 롱소드의 달인이 잡으면 진가를 나타냈다.

“내가 로벨 로드릭이다! 덤벼라!”

로벨은 말 위에서 전후좌우로 칼날을 뿌렸다. 휘두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검광이 로벨의 몸을 뒤덮었다.

“이 괴물 자식! 죽어라!”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를 모시며 다년간 훈련한 기사 종자와 수행원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솜씨만 보면 경험 많은 베테랑 용병보다 나았다. 하지만 로벨의 눈에는 설익었다.

“어설퍼!”

로벨은 칼끝으로 메이스의 목을 쳐내고 반발력으로 반평생 기사의 수발을 들었을 수행원의 정수리를 쪼갰다. 유언은 고사하고 비명 지를 틈조차 없었다.

시체가 초 단위로 쌓여갔지만 걸리적거리는 일은 없었다. 신비의 문턱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닝스타는 콧김이 좀 거세졌을 뿐 여전히 기운찼다. 로벨에게 쪼개지는 적이 1명이라면 모닝스타에게 뭉개지는 적이 3명이었다.

로벨과 모닝스타의 활약에 자극을 받았는지 로벨을 따라온 늑대성과 검은 숲의 기사도 눈이 반쯤 뒤집혀서 날뛰었다. 그 결과 40명이 조금 안 되는 기사가 400명이 넘는 적의 우익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주군! 적이 도주합니다!”

호른 경이 플레일에 흐르는 피를 털며 소리쳤다. 로벨도 파나케아 투구의 신묘한 힘으로 보고 있었다. 중앙에 합류하는 영리하고 양심적인 병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작정 남쪽으로 도주했다. 로벨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아니야. 아직이야.’

로벨은 좀 더 먼 곳을 보았다. 중앙으로 이동한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기사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식솔이 처참하게 당했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것이다. 지칠 때로 지친 로벨의 기사가 상대하기 어려웠다.

“주, 주군! 적이 옵니다!”

“로벨 경! 이제 어찌하오!”

기사들은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로벨 곁으로 찾아왔다. 싸움으로 끓어오른 피가 식자 어느 때보다 냉정해졌다. 다시 말해 위기감을 느꼈다.

로벨은 스멀스멀 피어나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아론다이트를 흩뿌리고 서너 걸음 앞으로 나왔다.

“대열을 정비하시오.”

로벨의 단호한 태도에 호른 경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싸우실 겁니까?”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따르는 기사는 약 50명, 그중 공작의 수행기사와 군대를 통솔하는 영주를 제외하면 40~42명 정도였다.

‘지치지 않았으면 해볼 만하지만...’

기사보다 전투마가 문제였다. 모닝스타와 일부 체력 좋은 녀석을 제외하면 숨이 코끝까지 차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지만, 로벨은 웃음을 머금었다.

“기사가 적에게 등을 보일 수 없지 않소?”

기사도의 정수 같은 발언에 브릭 경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외 기사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볼탄 반도에는 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작전상 후퇴라는 것도...”

로벨은 바이저 너머로 미소를 보냈다. 로벨의 머리는 전방을 향해 있지만, 로벨의 시선은 500야드 가량 떨어진 후방에 닿아 있었다. 아니, 이제 400야드였다.

“헬름은 소중한 장비지만, 가끔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하오.”

“갑자기 무슨 말씀을...”

“뒤를 보시오.”

마지막 말은 거의 웃음이었다. 기사들은 동시에 말머리를 돌렸고, 그 탓에 일부가 충돌사고를 내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언제 여기까지?!”

외팔이 더치가 이끄는 풋맨 중대와 겁쟁이 데비가 지휘하는 포병 중대가 죽기 살기로 뛰어 350야드까지 전진했다. 아슬아슬하지만 팔코넷의 사정거리였다.

“본인에게는 전술에 아주 해박한 친구가 있소.”

그때,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군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기사님! 기사님! 야! 우리 기사님 괴롭히지 마!”

@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기수 제롬 하우턴 경은 적과 300야드 떨어진 곳에서 고민에 잠겼다. 채찍질 한 번이면 창이 닿을 거리인데, 전장에서 먹고 마시며 새긴 직감이 돌격을 저지했다.

‘고작해야 100여 명이거늘...’

무장이 부실한 풋맨 부대야 기마돌격 한 번으로 흐트러트릴 수 있지만, 풋맨 뒤에 따라붙은 크고 작은 대포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열을 갖춘 로벨 로드릭 후작과 그의 기사들도 꺼림칙했다.

‘그랜드 챔피언, 늑대성의 주인, 늑대의 기사, 무적무패의 기사, 폭풍성의 정복자, 옛 신의 가호자...’

나이를 먹는 횟수와 칭호를 늘리는 횟수가 엇비슷한 볼탄 반도 최강의 기사였다.

제롬 경은 ‘최강’이란 단어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수년 전 일이지만,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 그렉 페럿 경과 결투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는데, 한층 성장한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자고 저런 기사를 적으로 돌렸는지 공작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제롬 경!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오?”

“저 배은망덕한 기사가 숨 돌릴 틈을 줘서 아니 되오!”

하지만 모두가 제롬 경 같지는 않았다. 내가 그랜드 챔피언보다 못할 것이 뭐 있냐는 자만심, 무적인지 무패인지 숫자로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는 계산, 적의 지휘관을 잡으면 작위든 봉토든 골라잡을 수 있다는 공명심이 더해져 제롬 경을 재촉했다.

제롬 경은 한심한 표정을 바이저로 가렸다.

“경들 눈에는 저 대포가 보이지 않소?”

질문으로 가장한 경고지만 속까지 꽉 찬 철통들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작 10문 아니오? 우리는 42명이외다!”

“수레에 올린 대포는 명중률이 높지 않다고 들었소. 그리고 로드릭 백작과 가까이 붙으면 쏘지 못할 것이오.”

“공작님이 지켜보고 계시오. 약간의 위험은 감수합시다.”

얼핏 들으면 전부 맞는 말 같았다. 제롬 경도 순간 그럴듯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명백히 오산이었다.

대포가 10문쯤 되면 표적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범위를 지정하고 쏘았다. 그리고 그랜드 챔피언에게 돌격할 필요도 없었다. 재장전 시간이 길어서 어차피 두 번은 못 쏜다.

기사가 포병을 상대할 때는 산개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대포의 회전범위를 따돌려 크게 우회해야 한다. 그러나 대포가 익숙하지 않은 볼탄 반도 기사는 대(對)포병전술에 어두웠다.

“로벨 로드릭의 목을 치고 신속하게 이탈합시다. 돌격 준비하시오.”

프린시스 가문의 기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바이저를 내리고 해비 랜스를 랜스 레스트에 걸었다. 제롬 경은 뒤통수를 간질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떼어내고 목청껏 명령했다.

“Charge!”

그 외침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콰콰콰광-! 콰쾅-!

@

로벨의 기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구릉성의 마튼 경이 혀를 찼다.

“저러니까 천박한 부르주아 놈들이 말똥 소리를 하지.”

7문의 팔코넷과 5문의 핸드캐논이 불을 뿜자 초원 한 곳이 땅거죽을 뒤집으며 크게 흔들렸다. 멀리서 보아도 무시무시한데, 그 현장에 뛰어든 제롬 경 이하 장미성의 기사들은 두 말할 것이 없었다. 말머리가 날아오르고, 네 다리가 조각조각 흩어졌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춘 기사들은 파괴의 현장에서도 사지가 멀쩡했다. 그러나 강철 안쪽은 그러지 못했다. 직격 당한 기사는 뼈마디가 으스러져 죽고, 전투마에서 튕겨 나간 기사는 목이 꺾여서 죽었다. 쇼크, 골절, 내장파열, 과다출혈 등등으로 42명 중 최소 15명이 전투불능에 빠졌다.

포격에 직·간접적으로 당한 기사가 절반, 꼬꾸라진 기사와 충돌해 억울하게 낙마한 기사가 절반이었다. 그렇게 삽시간에 1/3이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럼 해볼 만하지!”

“주군, 명령을!”

로벨은 포성에 화를 내는 모닝스타를 더욱 부추기며 아론다이트를 전방으로 뻗었다.

“Charge!”

전쟁의 꽃이자 전투의 하이라이트. 기사 대 기사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한쪽은 지칠 때로 지쳤고, 한쪽은 포격 한 방에 너덜너덜해졌으니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

쾅-!

승기를 잡은 것은 느리지만 가속이 붙은 로벨 쪽이었다.

로벨은 랜스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포격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전투마의 목을 쳤다. 장미성의 기사들이 험한 말, 못된 말, 나쁜 말을 동시에 내뱉으며 우악스러운 병장기를 휘둘렀지만, 마상 위의 불안한 칼질에 당할 만큼 어설픈 모닝스타가 아니었다. 초원의 가젤처럼 폴짝 뛰어 멀어졌다.

“무슨 놈의 망아지가!”

허공에 칼질한 대가는 꽤 컸다. 로벨 뒤를 바짝 따라온 호른 경, 브릭 경, 메튜 경 등이 무방비한 기사들을 들이박았다. 쾅! 쾅쾅-!

쇠와 쇠가 충돌하는데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기사의 단련된 힘과 전투마의 속도가 더해진 소리였다. 한 번의 충돌로 도합 7명의 기사가 나가떨어졌다. 그중 5명이 장미성의 기사였다.

말에서 떨어졌지만 용케 몸을 건사한 장미성의 기사가 소리쳤다.

“크으윽! 비겁하다!”

“전장에서 정정당당을 찾는가!”

찾아서 안 될 것은 없지만, 머리 위로 날아드는 칼질을 피하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로벨은 롱소드 마스터 칭호가 아깝지 않게 베고, 찌르고, 밀치고, 때리며 장미성의 기사를 몰아붙였다. 장미성의 기사는 죽기 살기로 방어했으나 끝내 롱소드를 놓치고 말았다.

“나, 나는 프렌디 가문의...”

“그건 나중에 듣겠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빙그르- 돌려서 묵직한 폼멜을 휘둘렀다. 애초에 그리 쓰라고 크고 무겁게 만든 것이라 방심한 기사를 한 방에 기절시켰다.

“몸값 협상할 때 알려주시오.”

로벨은 다음 상대를 찾아 말머리를 돌렸다. 믿음직스러운 휘하 기사들이 각자 하나씩 두들겨 패고 있어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럼 대장을 잡을까?’

로벨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에릭 공작은 용병부대에 이어서 기사들까지 당하자 철수를 시작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로벨 로드릭 군은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소리칠 힘은 있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높이 들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다! 늑대성이 승리했다!”

승리는 항상 짜릿하고 달콤하다.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의 승리라면 더욱 그러하다. 로벨을 중심으로 승리의 함성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기사 나리가 이겼다!”

“로벨 로드릭 만세! 늑대성 만세!”

로벨은 피 묻은 바이저를 올리고 모든 승리자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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