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심장
258화. 심장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은 1,700명이 조금 안 되었다. 청동사자 호의 의문이 풀리지 않은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소환에 불응한 탓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짜’ 청동사자 호 때문은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도 예상보다 병력이 적었다. 본래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였던 바위성의 켈트 경과 가시성의 바이란 경이 불참하여 늑대성, 호른성, 구릉성, 폭풍성 등 8개 성의 군대만 집결했다.
그리해서 양측의 병력은 1,700명 대 1,150명이었다. 숫자로 보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유리하지만, 기사와 용병의 질로 따지면 백중세였다.
“세상일이란 게 참 신기하오.”
제임스 공작은 늑대성 동남쪽 25마일 거리에 이름 없는 농촌 마을을 끼고 포진한 양측의 군대를 보았다.
“랭스터 가문, 허드슨 가문, 하인즈 가문, 사트로 가문... 볼탄 반도를 주름잡던 수많은 가문이 어느새 하나둘 사라지지 않았소.”
검은 숲의 우직한 기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볼탄 반도 사람도 아닌데 아는 척하게 놔뒀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야금야금 집어삼킨 로드릭 가문이 마침내 볼탄 반도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소.”
검은 숲의 기사는 전투마 위에서 휘하 기사와 용병을 부리는 로벨 로드릭 백작을 보았다. 볼탄 반도 사람답지 않은 새하얀 피부와 말꼬리처럼 묶어서 올린 새까만 머리카락이 서로 대비되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검은 숲의 기사가 입 모양으로 감탄하자 제임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 로드릭 후작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될 것이오.”
검은 숲의 공작이란 자리를 생각하면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었다. 기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오.”
“그러니까 공작님이 어찌 아시... 아, 아앗! 그렇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제임스 공작은 찡그린 얼굴로 우직한 기사를 노려보았다.
“할 일이 없으면 전투마의 편자나 살펴보시오.”
“그런 일은 종자를 시키시면...”
“지금 당장! 직접! 가서 살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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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쟁의 달인이었다.
큰 전쟁은 연례행사로, 작은 전쟁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치르는 혼란한 볼탄 반도에서 ‘무적’이란 별명이 붙었으니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건 좀 어렵겠는뎁쇼.”
“...그렇지?”
그런 로벨이 볼탄 반도의 패자를 가르는 ‘마녀 전쟁’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어린 집사가 철없이 적의 위용에 감탄했다.
“이야! 저게 모두 얼마야?”
“값으로 따질 상황이 아니잖소!”
로벨과 로벨을 보필하는 호른 경, 브릭 경, 펄프 대장 등이 비슷한 표정으로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진영을 관찰했다. 정확히는 진영 좌측에 배치된 신식무기를 관찰했다.
“확인된 숫자만 20문입니다.”
“뭘 믿고 싸움을 거나했더니, 저거였군요?”
에릭 공작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 청동대포를 20문이나 동원해 좌익에 배치했다.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보편적으로 야전에서 부대를 배치할 때 우익에 무게를 두었다. 중장기사와 맨앳암즈를 우익으로 삼고, 경기병과 풋맨을 좌익으로 삼아 서로의 약점을 먼저 뚫는 쪽이 이기는 싸움을 벌였다.
유리피아 대륙의 지휘관이 딱히 오른쪽을 숭상해서가 아니다. 유라피아 대륙인 대다수가 오른손잡이기 때문이다.
“무기를 오른손으로 잡고, 방패를 왼손으로 잡으니까, 적진을 돌파할 때 적의 왼쪽으로 달리는 게 좋아. 적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거든. 마상시합도 상대방의 왼쪽으로 달리잖아.”
“그게 그렇게 차이 나요?”
“당연하지.”
“으악! 그럼 큰일 난 거네요?”
에릭 공작은 로벨의 기사들이 공격할 좌익에 대포 20문을 배치하여 봉쇄했다. 기사의 갑옷이 아무리 단단해도 대포를 막는 못하고, 기사의 말이 아무리 빨라도 포탄보다 빠르지 못했다.
“자존심 상하지만 우리도 따라 하자. 겁쟁이 데비의 포병대를 좌익으로 배치해.”
로벨 로드릭 군에도 7문의 팔코넷과 5문의 핸드캐논이 있었다. 장미성의 대포보단 작지만, 장미성의 기사들을 긴장시킬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볼탄 반도의 두 거인이 대치했다. 비유하자면, 오른손에 기사라는 창을 들고, 왼손에 대포라는 방패를 쥐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눈알을 굴리는 중이었다.
어디까지나 비유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군대는 개인과 다르고, 전쟁은 결투와 달랐다. 로벨은 양손을 그대로 두고 중앙의 장창병과 쇠뇌병을 움직였다.
“스피어맨 1, 3, 5소대 교대로 10보 전진. 적 사정거리 경계에 파비스를 설치해.”
정예병과 잡병의 차이는 무장의 차이가 아니었다. 옆 사람과 발을 맞춰서 걸으면 정예병이고, 그렇지 못하면 오합지졸 잡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울프 용병단은 최고의 정예병이었다.
척! 척! 척! 척!
길이(무기)와 높이(키)는 제각각 다르지만, 속도만큼은 똑같았다. 누구 하나 앞서가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일자로 전진했다. 그 위압감이 대단해서 창칼로 찔러도 끄덕 안할 철옹성 같았다.
로벨 로드릭 군이 먼저 움직이자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도 질 수 없다는 듯 중앙의 용병부대를 전진시켰다. 검은 번개 용병단, 무쇠 망치 용병단, 칼날 폭풍 용병단... 뭐 그런 이름을 가진 ‘전통적인’ 용병단이었다.
전통적인 용병단은 전통에 따라 전쟁 직전에 고용주가 요구한 병력을 확충했다. 부대 유지비용은 적게 들지만, 충성심과 소속감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단합조차 되지 않았다. 열흘 전만 해도 생판 모르는 남이었으니 손발이 맞을 리 없었다. 풍랑에 들썩이는 파도처럼 삐뚤삐뚤 앞으로 쏟아졌다. 울프 용병단이 곧게 뻗은 명검이라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용병단은 찌그러진 깡통 집합이었다.
“저대로 부딪치면 보나마나지.”
“공작 쪽이 2배 많은데?”
“진형을 갖춘 부대한테 병력은 의미 없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또 모르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 않군.”
전황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모두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 중대가 적 사거리 밖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파비스를 설치하지 못한, 설치했어도 거리와 간격을 재지 못한 에릭 공작의 용병단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의 장기 중 하나가 3개 조의 순차사격이었다. 간신히 쿼럴을 피한 용병은 후속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2차, 3차 사격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공격은 실질적인 피해보다 심리적인 압박이 더 컸다. 정신 못 차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만들었다. 저대로 두면 칼질 한번 못해 보고 와해될 것이다.
“돌격! 돌격해라! 거리를 좁혀라!”
용병대장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패닉에 빠진 용병들을 울프 용병단에게 돌진시킨 것이다. 그냥 두면 제멋대로 후퇴하며 후방부대까지 혼란케 할 테니 차라리 적진으로 돌진시켜 난전을 유도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와 싸워본 적 없는 구닥다리 용병의 전술이었다.
“스피어-월-!”
우선 울프 용병단 스피어맨 중대를 얕잡아 보았다. 야전 경험이 풍부한 울프 용병단은 무턱대고 달려오는 오합지졸에게 뚫릴 만큼 약하지 않았다.
“으리야앗!”
“죽어랏!”
무쇠 망치 소속인지 칼날 폭풍 소속인지 애매한 용병들이 창끝을 쳐내며 뛰어들었다. 그러나 크고 기다란 창 아래에는 가늘고 짧은 창이 숨겨져 있었다. 벽 안으로 파고들었다 생각하는 순간, 가슴과 허벅지에 올 파이크(Awl Pike)와 캔들 스틱(Candle Stick)이 파고들었다.
두 무기 모두 창날이 깊이 박히지 않도록 키용이 달려있어서 금방 회수가 되었다. 창날이 빠져나가자 뜨거운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으으... 으아아...”
“사, 살려줘... 살려줘요...”
절명한 용병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구멍 난 신체 부위로 새어나가는 피와 영혼을 틀어막았다. 펄프 대장은 가차 없이 명령했다.
“찔러!”
울프 용병단은 무덤덤하게, 몇몇은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창을 찔렀다. 이번에는 정확히 머리와 심장을 뚫었다.
“저것이 늑대성이 자랑하는 울프 용병단인가?”
“저 정도면 자랑할만하군!”
울프 용병단은 바위처럼 굳건하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용병단은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깨지는 파도처럼 난잡했다. 한눈에 봐도 승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계속 전진해!”
울프 용병단은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속도에 맞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중앙군이 붕괴되었다. 이제 초조한 것은 에릭 공작이었다. 허리가 끊어지면 아무리 좋은 창과 방패가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일단 몸을 지켜야 했다.
“기사들을 중앙으로 모아라.”
에릭 공작은 우익에 배치된 기사와 기병대가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바로 그 순간, 로벨이 승부수를 띄웠다.
“늑대성의 기사들이여!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이여!”
로벨의 목소리는 사내치고 날카로웠다. 전장의 소음에도 귓가에서 외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으며 모닝스타의 고삐를 당겼다. 새하얀 칼이 하늘을 향하고, 새하얀 말이 적진을 향해 투레질했다. 그렇게 시각과 청각을 장악한 후 사고마저 사로잡았다.
“나를 따르라! 돌격! 돌격한다!”
어린 집사가 허둥지둥 랜스를 꺼냈지만 받지 않았다. 로벨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적진을 향해 쏘아졌다.
“이런! 위험합니다!”
“주군을 따르자! 이랴앗!”
로벨의 열렬한 추종자인 호른 경과 브릭 경이 뒤를 따르고, 호승심 넘치는 랭스터 경과 피가 끓는 메튜 경이 뒤쫓자.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너도나도 박차를 가했다. 얼마나 서둘러 쫓아가는지 헬름을 쓰지 못한 기사가 다수였다.
“공작님! 저희들도...!”
“뭘 기다리고 있소! 가시오!”
검은 숲의 기사이자 제임스 가문의 기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로벨 로드릭의 기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기쁜 마음으로 바이저를 내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적의 비명과 아군의 함성이 지평선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긴장과 전율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기사로 태어나 기사로 성장한 참된 기사라면 누구나 꿈꿔온 기마돌격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달려도 적진에 닿지 않고, 아무리 달려도 아군의 함성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너무 많이 달렸다. 진즉에 포탄이든 화살이든 날아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어디로 돌격하는...’
앞에 보이는 것이 강철의 뒤통수와 똥오줌을 갈기는 말 엉덩이뿐이라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파악이 끝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에 동참했군!’
앞서 달리는 기마가 피워낸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적진이 보였다. 대포를 배치한 적의 좌익도, 붕괴되어가는 적의 중앙도 아니었다. 기사와 기병대가 빠진 적의 우익이었다.
로벨은 전장을 끝에서 끝으로 가로질러 적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동시에 기사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도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