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중재
257화. 중재
늑대성은 그리 크지 않은 시골 장원의 낡은 성이다. 언덕 위에 지은 수고와 석재로 보강하는 개축으로 어느 정도 모양새는 갖췄지만, 분명하게 말해 변방의 작은 성이다.
“허, 참, 크흠! 아, 아늑하고 좋소이다.”
“그렇소? 본인도 그리 생각하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나 흑단성은 물론이고, 떡갈나무 성보다 작고 초라했다. 그러한 곳에 제임스 공작을 비롯한 12명의 기사가 지내게 되니 창고까지 털어서 침실로 내줘야 했다.
제임스 공작은 객실로 급조된 ‘아늑한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까마귀 성에서 동고동락하던 시절이 생각나오.”
그때만큼 열악하단 뜻이지만, 단순한 로벨은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크게 신세 진 시절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솔직한 소감과 악의 없는 농담을 꿀꺽 삼킨 후 예의 바른 손님으로 처신했다.
“후작에게 진 빚이 많으니 이렇게라도 갚아야지. 언제든지 말만 하시오. 본인과 본인의 군대는 후작을 따라 종군할 준비가 되어 있소.”
제임스 공작 이하 검은 숲 기사들은 로벨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이 부족한 늑대성의 후작은 난처한 듯 뽀얀 뺨을 긁적였다.
“오해가 있는 듯하오.”
“오해라 했소?”
“본인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싸울 생각이 없소.”
로벨의 선언에 먼 곳에서 임전 태세를 갖추고 찾아온 손님들이 모두 당황했다.
“싸우지 않는다고? 그럼 지원 요청을 왜 한 것이오?”
“지원 요청이 아니라 중재 요청이었소. 전달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보오.”
“중재? 늑대성과 장미성을 중재하라?”
제임스 공작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땅이든 재물이든 한 몫 잡을 생각에 들뜬 기사와 용병들에게 미안하지만, 제임스 가(家)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로드릭 가문에 진 빚을 작게나마 갚으며, 프란시스 가문에 새로운 빚을 씌우게 된다. 더불어 왕국 전체에 제임스 가문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제임스 공작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본인이 어찌하면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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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의도를 오해한 것은 제임스 공작만이 아니었다.
“해링턴 영지의 채플 해링턴 남작이 찾아왔어요.”
“곰바위 숲의 매든 글리슨 경이 알현을 요청했어요.”
볼탄 반도의 영주들이 불티나게 찾아왔다. 개중에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충성을 맹세하거나, 사심 가득한 얼굴로 재화를 내놓기도 했다. 제왕을 꿈꾸는 자라면 실로 기뻐할 일이지만, 제왕은 고사하고 평범한 기사도 바라지 못한 로벨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손님인 제임스 공작과 검은 숲의 기사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누가 진정한 볼탄 반도의 주인인지 깨달은 것이지.”
프란시스 가문과 로드릭 가문의 불화는 모른척하기가 힘들 만큼 커다란 이슈였다. 세력만 보면 파도성, 바람성, 덩굴성 등의 충성을 받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우세하지만, 폭풍성을 단 하루 만에 정복하며 무적무패의 신화를 새로 증명한 로벨 로드릭 후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거인의 힘 싸움에 난쟁이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그 미묘한 줄다리기에 변화가 생겼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이교도란 소문이 돌면서 페르젠 가문 이하 봉신들의 결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로벨 로드릭 후작은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과 500명의 정병을 끌어들이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다.
검은 숲 해방전쟁 시절부터 제임스 공작을 따른 충성심 깊은 흑단성의 기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속삭였다.
“정말 중재하실 겁니까?”
“물론 그럴 것이오.”
“고작 그런 일로 공작님을 부르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무례? 하핫! 로벨 로드릭 후작은 너무 착한 것이 탈이오.”
“착한...?”
기사는 제임스 공작의 턱을 가만히 보았다. 꺼뭇꺼뭇한 수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날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제임스 공작은 시선을 회피하는 기사를 이상하게 쳐다본 후 마저 설명했다.
“누가 봐도 대세가 기울지 않았소. 로벨 후작은 주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중재’라 말한 것이지. 사실상 ‘내 상대가 못 되니 닥치고 있어라’라는 의미요.”
“아, 아아, 그런 의미로 중재로군요!”
오해가 오해를 만들고, 착각이 착각을 낳았다. 검은 숲의 군대와 볼탄 반도의 충성맹세까지 받았으니, 그다음은 너무나 뻔했다.
“그런데 프란시스 공작이 굽히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제임스 공작은 피식- 웃었다.
“굽히지 않으면 부러질 뿐이오. 주종(主從)은 대등할 수 없으니 한쪽은 반드시 굴복해야 하오.”
“어찌해서 대등한 관계가 불가능합니까?”
기사답지 않은, 혹은 너무나 기사다운 질문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자세를 고치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주종관계란 결국 힘의 관계요. 기사도? 명예? 충성심? 물론 존재하오. 힘이라는 거목 아래에서 말이오.”
“힘이 없으면... 충성심도 없는 겁니까?”
“내가 까마귀 성과 가시나무 성을 왜 로벨 로드릭 후작에게 주었는지 아시오?”
“볼프 사트로 후작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볼프 사트로 후작‘도’ 견제하는 것이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은 기사 가문의 둘째로 태어난 만큼 군사보다 정치에 탁월했다.
“샘 포클 시대 이전이나 이후나 군주와 봉신의 관계는 똑같소.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해도 본질은 땅을 주고 사람을 빌리는 계약 관계요. 계약이란 말이오. 힘이 센 놈이 정하는 것이지.”
제임스 공작은 차가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검은 숲의 제후들도 힘이 생기면 언젠가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들 거요.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오. 난 그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늑대의 힘을 빌렸소. 그것은 늑대도 마찬가지요.”
제임스 공작은 프란시스 가문의 성 이름이 ‘장미성’이란 것을 떠올리고 다시금 웃었다.
“개처럼 키우다가 덩치가 커지니 잡아먹으려는 주인을 꺾어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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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제임스 공작이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친필로 편지를 보냈다.
교양은 있으나 모호한 표현, 정중하지만 의미심장한 단어로 지면의 9할을 채운 후 핵심은 한 줄로 끝냈다.
‘검은 숲과 제임스 가문은 로벨 로드릭 후작을 지지한다.’
도시 뒷골목의 코흘리개 꼬마도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로벨은 제임스 공작의 편지가 ‘거, 보아하니 이런저런 의심이 많은 듯한데, 로벨 로드릭 경은 착한 봉신이니까 괜한 의심하지 마시오’ 내용일 거라 굳게 믿었지만, 결코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난 이쪽 편! 그래도 계속 까불 거야?’ 수준에 가까웠다.
로벨이 알면 30년 정도 빨리 뒷목을 잡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로벨이 제임스 공작의 편지를 확인해서-대단히 무례한 행위다- 화해시키는 내용을 보냈다 해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방심을 유도한 기만책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제임스 공작이 말했듯 힘이 역전된 주종관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늘날의 볼탄 반도는 누가 봐도 전쟁 직전이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는 구릉성의 마튼 경이 보낸 편지를 두 번 훑어보고 한숨 쉬었다.
“화해할 생각이 없나 봐요.”
“그렇지?”
에릭 공작이 봉신들을 소집하고 용병단을 고용했다는 보고서였다. 인어의 바다를 건너 동방원정을 떠날 생각은 아닐 테고, 대단히 높은 확률로 북진할 것이다.
“병력이 얼마나 될까?”
“파도성이 소환에 응하면 작년처럼 2,000명쯤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1,500명쯤 되겠죠.”
“우리군의 2배네?”
“정확히는 1.8배에서 2.5배죠.”
로벨은 숫자를 부르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하고 싸우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언제 쳐들어올까?”
로벨의 영혼 없는 질문에 마녀 키르케가 답을 내놓았다.
“장미성 공작님은 똑똑하니까 봄 추수 전에 올 거예요. 그래야 공성전을 피할 수 있잖아요.”
어린 집사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빨리요? 이제 막 병사를 모으는데?”
“전술의 기본은 신속, 은밀, 정확이죠. 우리 기사님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싸운 기사님이잖아요?”
“이런! 그럼 빨리 대비해야죠! 이럴 때가 아니잖아? 우선 군량을 확보하고, 쓸 만한 용병을 고용하고...”
로벨은 호들갑 떠는 어린 집사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뭐가 아니에요?”
“나랑 싸울 거면 서약을 파기해야 하잖아.”
충성맹세로 맺어진 주군과 기사는 서로를 해칠 수 없었다. 복종과 보호의 서약 때문이다. 설령 철천지원수가 되더라도 절차에 따라 서약을 파기한 후 싸워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양심이나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피라미드 봉건사회 구조상 서약을 무시하면 똑같이 당할 수 있었다.
“우앗! 저쪽에서 먼저 파기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하나요? ‘너 같은 기사를 거둔 적 없다!’ 이렇게 할까요?”
“그거보다 좀 복잡하죠. 옛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거라 성직자를 대동하고 철회해야 하거든요.”
어린 집사와 마녀도 긴장감이 없어 보였다. 로벨처럼 실감이 안 나는 것이 분명했다.
마녀 키르케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슨 명목으로 서약을 파기하죠? 기사님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그야, 뭐, 하나 만들어 붙이면 그만이죠. 성직자도 금화로 부리는 세상인데요. 앗! 미안해요, 리암 수사님.”
“괘, 괜찮... 흑...”
로벨도 조금 궁금해졌다. 에릭 공작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적대하고, 전쟁까지 준비하는지 말이다.
그 답은 겨울 햇살로 질척해진 땅이 봄 햇살로 단단히 굳어갈 때 전해졌다.
로벨 로드릭의 여동생이 악마와 사통한 사악한 마녀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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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가? 아니! 내 동생이 마녀라고?”
세상의 많은 사람이 놀랐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정체 모를 악마와 맺어진 당사자였다. 어린 집사도 보기 드물게 횡설수설했다.
“영주님이, 그러니까 아가씨를 불러서 해명하라고 주장하는데, 뭘 알고 그러는 건지, 그냥 막 던지는 건지,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로벨의 정체를 아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그중 신뢰할 수 있는 어린 집사와 말 못하는 모닝스타를 제외하면 하나뿐이었다.
‘강철성에서...?’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다. 어쩌면 마도의 수호자와 무관하게 그저 로드릭 가문을 모욕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소문과 달리 지저분한 작자로군.”
제임스 공작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기사다 보니 레이디를 대상으로 사통이니 간통이니 하는 소리가 듣기 좋지 않았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오. 후작, 여동생을 불러서 진상을 밝히고 모욕의 대가를 치러주시오.”
제임스 공작의 제안에 세 사람이 움찔했다.
“아니, 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
“천천히! 천천히 생각해 보죠! 아주 천천히!”
로벨과 어린 집사가 전전긍긍했다. 제임스 공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세 번째 사람이 비교적 차분히 반박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제임스 공작 이하 여러 시선이 호른 경을 향했다.
“제임스 공작이 말하였듯 지저분한 수작이오. 저런 수작에 응하는 것이 주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요. 그리고 모욕하기로 작정한 자에게 무슨 해명이 통하겠소?”
호른 경의 주장에 모두 수긍했다.
“여기에 진짜 마녀가 있으니, 그걸 이유 삼을지도 모르지.”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라고욧!”
로벨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호른 경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호른 경은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로벨의 봉신 중 가장 호전적인 조단 랭스터 경이 갑옷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딴 식으로 나오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로벨은 기사들은 쭉 둘러보았다. 로벨을 위해 기꺼이 모인 충성스러운 기사들이었다.
‘하아...’
원하지 않았고, 뜻하지 않았지만, 이 지경이 되어서 물러설 수 없었다. 로벨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전쟁을 준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