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56화 (256/605)

256화. 망루

계절이 소리 없이 변하기 시작했다.

겨울을 이겨낸 자귀나무 가지에 새순이 한 잎, 두 잎 피어나고, 어린 집사의 흉악한 부지깽이를 피한 고드름조차 한낮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방울방울 녹아내렸다.

로벨은 ‘푸쉬업’이라 이름 붙인 상체 운동을 오른팔과 왼팔로 번갈아 50회씩 반복 후 땅을 힘껏 차고 일어났다. 땀방울이 앞머리를 따라 완만한 곡선으로 뿌려졌다.

“...이렇게 4만 9,520페닝을 모았어요. 장미성이 요구한 것에 절반이 좀 안 되지만, 뭐, 어차피 다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영주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응?”

“...안 듣고 있었어요?”

“으, 응? 아니야. 다 들었어. 그러니까. 음. 그런 거지?”

“안 들었잖아요!”

어린 집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로벨은 귀를 막고 딴청을 부렸다. 어린 집사는 씩씩- 거리다가 화내봐야 배만 꺼진다는 16년 치의 경험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까놓고 장미성에 주기가 아까워요. 여름까지 기다렸다가 아무 말 없으면 슬그머니 우리가 쓰는 게 어때요?”

“아무 말 없을 리가 없잖아.”

기사라면, 기사가 아니라도 명예를 가진 사내라면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4만 페닝이라고 했지? 일단 가지고 있어.”

어린 집사는 ‘4만 9천...’ 하고 정정하다가 잽싸게 입을 막았다. 9,520페닝 쯤은 비상금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했다. 영주인 로벨도 허락(?)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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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돌과 자갈로 포장한 늑대 도로는 눈이 녹아도 진창이 되지 않고 수레가 지나가도 굴곡 없이 평탄했다. 욕심 많고 부지런한 행상인은 땅이 굳을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봄맞이 상품을 싣고 로드릭 시장을 향했다.

“그래야 비싼 돈 들여서 공사한 보람이 있죠.”

어린 집사는 새해 인사 겸 뇌물로 올라오는 상품을 살피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겨울바람에 바짝 말린 정어리,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그물버섯,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올라온 렌틸콩, 질긴 쇠가죽과 부드러운 돼지가죽, 까칠한 아마포, 푹신한 솜뭉치 등이었다.

“주로 생필품이네요?”

“먹고 입는 것이 귀할 때니까요.”

어린 집사는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는 교양 넘치는 장사꾼 마인드를 가졌다. 헨리 피터 상회장과 지미와 루시를 통해 선물을 보낸 상인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래야 이후로도 자발적인 상납을 할 테니까.

반짝이는 쇠붙이로 많은 것이 해결하는 세상이었다. 창, 칼, 금화, 은화 등이었다. 그러나 반짝이는 것은 귀하기에 필요한 것을 직접 해결하는 탁한 쇠붙이도 많이 사용했다. 농기구, 사냥도구, 벌목용 도끼 등이 여기 해당한다.

로벨은 탁하디탁한 도끼를 나눠 들고 다소 난해한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300년 묵은 상수리 나무를 두드리는 벌목꾼을 보았다.

“강가에 살아도 우물세~ 고기를 잡아도 토지세~ 우리 영주님의 생일은 1년에 12번인데 왜 나이를 먹지 않나~”

“어제는 노역으로 불려가고~ 오늘은 전쟁으로 끌려가고~ 내일은 반란으로 잡혀가고~ 도시로 놀러 갈까~ 숲으로 소풍 갈까~”

로벨은 거목을 두드리는 도끼질 사이사이로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에 집중했다. 신나면서 처량한 이상한 노래였다.

“저게 무슨 노래야?”

“그, 그, 그게 저기, 거시기해서, 그런 것이라...”

가장 이상한 것은 시찰에 따라 나온 찰드 촌장이 몸 둘 바를 몰라 한다는 것이다. 리암 수사가 귓구멍을 후비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영주님을 욕하는 노래에요.”

그 말에 모두 놀랐다. 로벨은 욕먹어서 놀랐고, 찰드 촌장 이하 마을 주민들은 로벨이 오해할까봐 놀랐다.

“욕해? 나를? 왜? 내가 뭘 어쨌는데!”

로벨이 상처 입은 얼굴로 되묻자 리암 수사가 ‘아차차!’하며 뒷말을 추가했다.

“영주님 말고요! 영주님 말고 다른 영주님이요! 세금을 과하게 물리고, 노역을 빡세게 시키는 영주님을 욕하는 거예요.”

로벨은 긴가민가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저런 노래를 불러?”

“그냥 전통 같은 거죠. 호흡을 맞추는 기합 같은 거요. 그리고 저 사람들은 본래 로드릭 마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로드릭 마을 최고의 벌목꾼은 검은 숲에서 피난 온 유랑민이었다.

검은 숲이라고 숲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숲을 지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벌목, 건축, 공예 등이 우수했다. 찰드 촌장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땀을 흘리며 말했다.

“몸통은 마을 밖에 망루를 짓는데 쓰고, 곁가지와 잔뿌리는 부족한 땔감으로 쓰면 될 겁니다요.”

로벨은 망루란 말에 앞서 들은 많은 것을 잊었다. 어린 집사가 어디서 여유자금이 났는지-로벨은 아직도 모른다- 로드릭 마을 북쪽과 남쪽에 커다란 망루를 짓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훗날 여유가 생기면 성벽을 이어서 로드릭 마을 전체를 감싸는 외성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면 로드릭 마을은 명실상부 로드릭 시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가능해? 노스폴드 시티에서 기술자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로벨은 늑대성을 석재성으로 개축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리암 수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검은 숲에서 온 형제님도 목수 장인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래?”

기사에게 기사의 명예가 있듯이 장인에게도 장인의 명예가 있었다. 공사를 책임진 장인이 있는데, 도시에서 다른 장인을 데려오면 속이 상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명예... 기사... 검은 숲...’

로벨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 중얼거렸다. 뭔가 떠오를 듯 말듯 했다. 그때 벌목꾼 대장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무엇이 넘어가는지 분명했다. 우지직- 우지근- 소리가 나더니 북쪽 숲 한 귀퉁이가 흔들렸다.

모닝스타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콧구멍을 주먹만하게 벌렁거리며 걸쭉한 콧김을 뿜었다. 로벨은 무의식적으로 모닝스타의 갈기를 쓸어주다가 문뜩 깨달았다.

“검은 숲의 기사. 알버트 제임스 공작.”

로벨의 빈약한 정치감각이 오랜만에 빛을 발했다.

“제임스 공작을 초대하면 올까?”

“제임스 공작이 누구... 엑? 검은 숲의 공작님이요?”

“응. 올까?”

이번에는 대답하기에 앞서 상당히 오랫동안 숙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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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기사도 아니고 한 지방의 주인쯤 되는 기사를 초대하는 것은 보통 권력과 인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검은 숲은 북부대로를 지나 산과 강과 숲을 여러 번 건너야 하는 머나먼 곳이었다. 옆 동네 놀러 오듯이 올 수 없다. 따라서 로벨의 초대에 응하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해냈군요!”

어린 집사는 제임스 가문의 인장이 찍힌 장문의 편지를 읽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블랙우드 시티 최고의 달필가가 받아 쓴 편지는 필체면 필체, 문장이면 문장 모두 빼어난데,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은 내용이었다. 성 조지아의 축일에 맞춰 방문하겠노라 거듭 약속했다.

“하긴! 영주님이 몇 번이나 도와줬는데요! 볼탄 반도가 아니라 동방제국이라도 찾아와야죠! 영주님의 ‘조언’ 덕분에 검은 숲의 현군이란 별명도 생겼다면서요?”

“응? 내 덕이야?”

“영주님이 ‘강력하게’ 설득해서 두 번이나 군대를 물렸으니까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로벨은 떡갈나무 성과 블랙우드 시티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적어도 한 번은 강력했었다.

어린 집사는 영주님의 얄팍한 인맥도 써먹은 곳이 있다는 둥,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는 둥, 에릭 공작이든 페르젠 백작이든 나대지 못할 것이란 둥 신이 나서 떠들었다. 하지만 리암 수사와 몇몇 사람은 회의적이었다.

“제임스 공작... 님을 불러서 어쩌시게요?”

로벨은 깜찍할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했다.

“중재를 요청할 거야.”

“에릭 공작이요?”

“응. 응. 어린 집사 말대로 상황이 바뀌었잖아. 그치만 에릭 공작은 자존심이 있어서 말을 바꾸지 못하니까.”

“검은 숲의 공작님이 말을 바꿀 핑계가 될까요?”

“왜? 똑같은 공작이잖아? 12기사 가문이고?”

어린 집사는 똑같은 공작도 아니고, 12기사 가문이라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라고 정정해 주었지만, 제임스 공작을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는 동의했다.

“아무렴! 검은 숲이 우리 편이면 함부로 못 하죠!”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가 직업적 편견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동의를 구했다.

‘마녀 자매님은 저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마녀 아니라니까요. 음. 가능할 수도 있지만...’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2인치쯤 당겼다가 놓았다.

‘보통은 기사님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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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은 정확하지 않더라도 신속함과 광범위함에서 무엇보다 뛰어났다.

편지가 오고 간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검은 숲의 알버트 제임스 공작이 폭풍성의 정복자 로벨 로드릭 후작을 돕기 위해 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는 소문이 포비아 왕국 전역에 퍼졌다. 검은 숲의 영주이자 늑대성의 봉신인 머를 브릭 경과 죠드 도너반 자작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니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을 정도였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500명? 500명이라고?”

“그렇다니까요?”

봉신들을 소집하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최대치였다. 봄 농사로 바쁜 일손에 검은 숲의 불안한 치안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결초보은의 자세였다.

“그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저쪽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까요. 이쪽 사정을 전해 들은 거겠죠.”

그리고 십중팔구 도너반 자작이 종용했을 것이다. 까마귀 성의 영악한 주인은 올해가 볼탄 반도의 주인을 가르는 해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정작 볼탄 반도의 주민은 까맣게 모르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500명을 어디서 재우죠? 어마어마하게 먹어치우는 전투마도 많을 텐데...”

어린 집사는 어린 집사다운 고민에 잠겼다. 울프 용병단 300명도 겨우 감당하는데, 여기에 500명이 늘어나면 먹일 것과 재울 곳이 부족했다.

“제임스 공작이랑 기사들은 성에 재우고, 병사들은 뉴 로드릭 마을로 보내자.”

“거기 자리가 있나요?”

“하몬 남작의 성터를 정비하면 주둔지로 쓸 수 있을 거야. 식량도 그쪽에서 충당하고. 맥주가 맛있으니까 싫어하지 않겠지.”

“그거 다 영주님의 재산이라고요.”

“어차피 작년 맥주잖아?”

겨우내 먹고 남은 저가의 맥주지만, 그거라도 공급하면 병사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오래는 안 돼요! 이제 곧 춘궁기라고요. 남은 식량이 많지 않아요. 곡물값이 가장 비쌀 때라 페닝으로 사려면 웃돈 줘야 하구요.”

“응. 걱정하지 마. 눈이 녹기 전에 담판을 지을 거야.”

로벨은 에릭 공작이 제임스 공작의 중재로 마지못해 화해를 받아들이고,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무엇을 먹고 얼마나 마실지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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