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55화 (255/605)

255화. 칼자루

“유, 유, 유령이다!”

“멍청아! 유령이 어디 있냐!”

“그럼 뭐야? 저게 뭐냐고!”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은 칼 맞은 누군가보다 호들갑을 떨었다. 로벨은 괜스레 무안해져서 슬그머니 칼을 뽑았다. 찌를 때처럼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유령은 아니야. 감촉이 있어.”

“그럼, 그럼 사람입니까?”

로벨은 칼끝을 랜턴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사람도 아니야.”

“그, 그, 그럼 뭡니까요!”

로벨은 칼끝이 잘 보이게 비춰주었다. 덩치 좋은 용병이 머리를 맞대고 희미한 랜턴 불빛에 집중했다. 거무스름한 액체가 묻어있는데, 피라고 하기에는 까맣고 물이라고 하기에는 독했다. 그리고 붉은 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울프 용병단에게는 익숙했다.

“설마?”

“설마...?”

“그어어어...?”

로벨 일행은 동시에 선장실을 보았다. 타이밍이 묘하게 맞았다.

“기사 나리, 아, 아무래도...”

이성이 상황을 인지하기 전에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실의 ‘무엇’보단 생동감이 넘치는 소리였다.

“우어어억! 저리 꺼져라! 어디를 감히... 으악...!”

로벨은 반사적으로 아론다이트를 치켜들었고, 허풍쟁이 이하 용병들도 허겁지겁 도끼와 망치를 꺼내 쥐었다. 옛 신의 사제가 번개 같은 속도로 성호를 긋고 외쳤다.

“형제님들! 밖으로 나갑시다!”

호칭이 잘못되었다. 옛 신의 교리에 따르면 옛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전부 ‘형제자매’였다. 따라서 이곳 청동사자 호에는 세 자릿수의 형제가 있었다.

쿵! 쿵-!

콰지-직-!

선실 여기저기에서 구르고, 넘어지고, 때려 부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어이 선실 벽을 뚫고 피투성이 머리가 삐져나왔다.

“모두 뛰어!”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 튀어나온 머리를 베고 냅다 달렸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흉내쟁이 퍼시발이 울먹이며 항의했다.

“왜! 왜 또 구울이야!”

“끄아악! 나한테 무슨 원한 있냐!”

구울 혹은 언데드. 청동사자 호는 죽지 못하는 시체의 소굴이었다. 마크 하몬 남작의 성에서 시작해 붉은 산 전쟁까지 지긋지긋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날 따라와!”

좌우 선실에서 연체동물 촉수처럼 팔다리가 튀어나왔다. 가끔은 머리통이 먼저 나오기도 했다. 로벨은 낮은 천장과 좁은 폭에 개의치 않고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요동치는 랜턴 불빛 아래 그로테스크한 팔다리가 날아올랐다.

“오오... 옛 신이시여!”

“기도는 조금 있다 합시다!”

이곳은 좁고 복잡한 갤리선의 선실이었다. 막다른 곳에 몰리면 평생을 훈련한 소드 마스터라도 대책이 없었다. 칼 한 자루로는 수천, 수만 파운드의 질량을 밀어낼 수 없었다.

로벨의 경이로운 칼질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구울은 멈추지 않았다. 벽이 깨지고, 문이 쓰러지면서 구울이 굴러 나왔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도끼로 하나하나 찍으며 구울의 추격을 늦췄다.

“자, 잠깐! 나다! 치워라!”

정신없이 쪼개다 보니 구울이 아닌 것도 쪼갤 뻔했다. 선창을 살피러 내려간 페르젠 가문 기사가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우악! 친구는 두고 오소!”

“저런 친구 사귄 적 없다!”

3층 선실에서 노잡이 노예들이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다. 쇠사슬에 묶인 팔다리가 급속도로 썩어 문드러지며 뜻하지 않게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야?”

“저놈들은 둘 다 가졌네! 계속 뛰어!”

“아니면 둘 다 잃었거나...”

철학적으로 사고할만한 주제지만 때와 장소가 안 좋았다.

“다 왔어!”

로벨이 경이로운 솜씨로 길을 열고 일행에게 손짓했다. 옛 신의 사제가 나이를 잊고 날듯이 계단을 오르고, 젊은 기사와 울프 용병단이 차례로 기어 올라왔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을 바짝 쫓아온 15, 6살 남짓한 선원 구울을 징 박힌 가죽 부츠로 차고 해치를 닫았다. 이유 없이 화가 나 있는 구울들이 온몸으로 해치를 두드렸지만,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올라타자 아래에서 위로 미는 구조상 쉽사리 열지 못했다.

“이걸 막아야 하는데...”

무거운 것을 올리고 싶어도 선체가 기울어진 탓에 쉽지 않았다.

“쇠사슬? 쇠사슬 없어?”

“쇠사슬은 없고... 밧줄이 있는뎁쇼?”

“그거라도 가져와!”

선원의 반란이나 노잡이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갑판 해치에는 잠금장치가 있었다. 굵은 항해용 밧줄을 욱여넣어 동여매자 오우거 구울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열기 힘들게 봉해졌다. 기사와 사제와 용병은 비로소 한시름 덜고 되는대로 주저앉았다. 긴장과 공포로 잊고 있던 추위가 몰아쳤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소. 정말... 정말 예상 못했소.”

젊은 기사가 샤프론을 풀어 땀을 닦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피와 살점을 꼼꼼히 닦은 후 칼집에 넣었다.

“무엇을 찾았소?”

“무엇을?”

“이 아래에서 말이오. 무엇을 찾았으니 구울이 날뛴 것 아니오.”

로벨의 추궁에 젊은 기사가 움찔했다. 기사의 맹세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꼭 맹세가 아니더라도 구울의 사지를 찢어발긴 로벨의 무용에 주눅이 들어 딴소리하기가 힘들었다.

“이것을 좀 보시오.”

젊은 기사가 징그러운 것을 마지못해 잡은 느낌으로 무언가를 꺼냈다. 표정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지 로벨 등 썩은 쥐나 고양이 머리가 나와도 놀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놀라고 말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도 놀랐지만, 옛 신의 사제가 가장 크게 놀랐다.

“그, 그, 그것은! 그것이 어떻게 이런 곳에...!”

로벨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갔다. 젊은 기사는 모두가 볼 수 있게 갑판 위에 내려놓았다.

솜씨만 보면 심부름이나 겨우 하는 도제처럼 조잡했다. 좌우가 대칭된 덕분에 간신히 팔과 다리란 것을 알 수 있고, 팔과 다리 덕분에 간신히 머리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머리가 머리 같지 않았다. 몸통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소나 양처럼 뿔이 돋아있었다. 눈과 입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며, 귀와 코는 보이지 않았다.

“...괴물?”

“그냥 괴물이 아니라, 아, 악마 아닙니까요?”

바닷물에 찰랑이는 석양의 마력 때문인지, 살의로 가득한 구울의 울음소리 때문인지 유난히 음산하게 보이는 이단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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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청동사자 호 조사를 중지시켰다.

겨울 바다와 암초만으로 위험한데, 구울까지 숨어 있으니 무리하게 조사하다간 인명피해가 나올 것이다. 로벨은 봄이 오면 다시 조사하겠노라 약속했지만, 두 가문의 대리인은 듣지 않았다.

페르젠 가문의 젊은 기사는 바위 곶에서 즉시 파도성으로 떠나갔다. 겨울여행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고생이 심할 텐데 기어이 수행원을 닦달하여 출발했다.

프란시스 가문을 대신해 온 늙은 사제는 젊은 기사보다 한층 더 조바심을 내었다. 하지만 부실한 몸과 장미성까지 거리와 로벨의 표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늑대성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옛 신의 사제는 에릭 공작의 먼 친척이거나 은혜를 입은 열렬한 추종자가 분명했다. 로벨의 오해를 풀기 위해, 혹은 로벨의 입을 막기 위해 열정적으로 해명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이단 신앙을 가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교황 성하의 축복 아래 공작위를 계승했으며, 붉은 장미 수도원을 오랫동안 후원해 왔습니다.”

“그거야 영주님도 알지만...”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는 정적이 많습니다. 검은 성의 볼트 사트로 후작, 호수성의 몰드 헤르만 백작, 포클랜드의 자비에 후작... 그조차도 아니면 잉그비아 왕국에 망명간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꾸민 짓이 분명합니다.”

“음... 그럴 수도 있죠.”

옛 신의 사제가 안달복달할수록 어린 집사의 광대가 올라갔다. 칼자루를 쥐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의를 안다면 칼날을 함부로 보여서 안 된다. 어린 집사는 표정을 수습하고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정황이 증거지 않소!”

로벨은 차가운 공기를 폐 깊숙이 넣은 후 새하얀 김으로 바꿔 내뿜었다. 성 안이라도 불을 피우지 않으면 야외나 다름없었다.

‘세속의 일은 모른다고 잡아떼더니만...’

편리할 때만 가져다 쓰는 옛 신의 지팡이였다. 로벨은 마른세수로 피로와 짜증을 씻어내고 애써 차분히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사제님도 피곤할 테니 그만 쉬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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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벽난로에 젖은 망토를 걸고 쇼오스를 차례로 벗었다. 햇빛을 못 봐 하얀 종아리와 오밀조밀한 발가락이 차례로 나타났다. 아래쪽에서 보면 굳은살과 근육이 조금 징그럽지만, 위에서 보면 어느 레이디처럼 매끈한 다리였다. 어린 집사가 벽난로의 불씨처럼 빨간 얼굴로 옷가지를 받아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벨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에릭 공작이 아니야.”

어린 집사는 반박하지 않았다.

로벨은 가죽 부츠를 가지런히 모아 불 앞에 놓고 두 다리를 당겨 쪼그리고 앉았다. 키가 커서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 사제 말이 맞아. 이유가 없어. 그리고 우린 ‘진짜’ 악마추종자를 알고 있잖아.”

“강철성의 짓일까요?”

“구울, 음모, 내분, 혼란.”

“으음... 유력하군요.”

뱀파이어 군주는 인간이 될 거라 말했다. 진짜 인간이 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인간을 흉내 내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인간처럼 음모와 모략을 시작했다.

“차라리 늑대의 왕이 편했던 것 같아. 그쪽은 그냥 치고받고 싸우면 끝났는데.”

“어? 정말요?”

“...미안. 거짓말했어.”

로벨은 능력과 성향이 제각각 다른 마도의 수호자를 곱씹었다. 어느 쪽이든 징글맞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강철성과 싸울 수도 없고...’

최대의 숙적 볼프 사트로 후작을 쓰러트렸는데도 평화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졌다. 프란시스 가문, 헤르만 가문, 페르젠 가문이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의심 많은 곳이 군주의 자리인데, 사악한 자가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었다.

로벨은 무릎 사이에 이마를 묻고 탄식을 토해냈다.

“난 기사 작위와 늑대성이면 충분한데...”

“원래 남의 것을 뺏는 것보다 가진 것을 지키는 게 어렵다고 하잖아요.”

어린 집사는 위로한다 치고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그래도 효과가 있었다.

“그런 거야?”

“그런 거죠.”

로벨은 두 눈을 깜박이다가 실없이 웃었다.

“강철성을 치워두고 청동사자 호부터 생각하자. 어떻게 할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이제 아쉬운 것은 에릭 공작이 되었어요. 헤르만 백작에 이어서 페르젠 백작까지 돌아서면 끝장이니까요. 그리고 페르젠 백작도 조심스럽겠죠. 에릭 공작을 질타했는데 영주님이 끝까지 에릭 공작 편에 서면 페르젠 백작은 남북으로 포위당한 꼴이 되어요.”

“아하? 그래서 칼자루야?”

“영주님은 최고의 기사잖아요. 기왕 잡은 칼자루니까 제대로 휘둘러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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