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54화 (254/605)

254화. 난파선

로벨의 겨울용 가죽망토는 로벨의 부친인 필립 로드릭이 쓰던 것으로 어림잡아 15년쯤 된 물건이었다. 재질이 좋은 것도 아닌데, 직업상 험하게 입다 보니 헤지고 찢어지고 화살 구멍까지 숭숭 뚫려버렸다. 오죽하면 구두쇠 어린 집사가 새 망토를 사자고 권했지만, 로벨이 먼저 거절했다.

“아버님이 아끼던 거야. 아직 더 쓸 수 있어.”

그리고 오늘 후회했다.

“으아아아... 아아아... 아아...”

“춥다! 너무 춥다!”

한겨울의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웠다. 더욱이 지금 로벨 일행이 있는 곳은 바닷바람이 앞뒤로 휘몰아치는 높은 해안절벽이었다. 하관이 제멋대로 상하운동을 시작했다. 길 안내를 자처한 호른 마을의 중년 어부는 고귀한 분의 고귀한 호들갑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래로 내려가면 좀 낫습니다요.”

“잠깐. 잠깐 기다려. 이대로 내려가면 동사 아니면 낙사야.”

로벨은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인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을 불러 바람이 덜 부는 곳에 불을 피우도록 했다. 고기 끓인 물이든 풀을 삶은 물이든 뜨거운 것을 위장에 넣어야 살 수 있었다.

“에이, 뭐가 춥다고 그래요? 자! 가슴 펴고! 활기차게!”

“으으... 얄밉지만 할 말이 없다...”

털가죽을 꽁꽁 둘러 곰으로 변신한 마녀 키르케만 살판났다. 늑대성을 나올 때만 해도 열과 성을 다해 비웃었던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은 입장이 180도 바뀌어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로벨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암초에 걸터앉은 프란시스 가문의 상선 ‘청동사자 호’를 바라보았다. 로벨의 갤리선인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보다 2배 커다란 초대형 갤리선이었다. 중년 어부가 은화 두 닢에 새삼 굽신거리며 아는 지식을 늘어놓았다.

“이 계절에는 북서풍이 불어 근해로 배를 몰지 못하고 먼 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요.”

“그럼 저 배는 왜?”

“그게 의문스러운 점입니다요. 제 생각에는 해적을 피하려다가 항로를 잃은 것 같습니다요. 배가 멀리 돌아오니까 해적이 노리기 아주 좋거든요. 그래도 저 꼴이 됐으면 화물은 가져가지...”

로벨은 어부의 근거 없는 추리를 들으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거친 바람을 타고 맹렬히 달려온 파도가 삐죽삐죽 솟은 암초에 걸려 넘어지며 하얀 거품을 피워냈다. 수만 개의 물방울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가운데 머리를 갸우뚱하고 쓰러진 갤리선의 모습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기울어진 돛대가 파도에 젖어 삐그덕- 삐그덕- 소음을 자아내고, 찢어진 돛이 바람을 흘리며 가련히 펄럭였다.

“영주님! 불을 피웠습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절벽 저편에서 소리쳤다. 기름과 종이를 아낌없이 쓰면 이런 추위에도 불을 피울 수 있는 모양이다.

로벨은 어부에게 그만하라 손짓하고 프란시스 가문과 페르젠 가문의 대리인을 불러 모았다. 건장한 청년 기사도, 고행에 익숙한 늙은 사제도 한 겨울 바닷바람은 당해내지 못해 입술이 파랬다.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운 다음 시작합시다.”

“조, 조, 좋은 생각이오!”

“옛 신의 축복이외다!”

애꾸눈 볼포스는 애써 피운 불을 높으신 분에게 양보하고 구석진 곳에 다시 불을 피웠다. 거칠 것이 없는 용병이라도 귀한 가문의 기사 나리와 설교를 입에 달고 사는 사제 영감 옆에서 불을 쬐고 싶지 않았다.

페르젠 가문의 젊은 기사는 쇠장갑을 벗어 불을 쬐며 무안한지 아무 말이나 꺼내놓았다.

“이까짓 일에 로벨 경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소.”

로벨은 못해도 20만 페닝은 될 갤리선이 이깟 일인지 생각하며 손수 냄비를 걸고 염장고기와 말린 순무를 집어넣었다. 기사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나의 주군인 페르젠 백작과 잡음이 많지 않소? 혹시 그 때문이오?”

로벨은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호른 경이 대신 나서서 말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후작님이 아니오. 그리고 경이 말하였듯 잡음이지. 진짜 큰 소음은 따로 있으니.”

시선이 프란시스 가문의 늙은 사제에게 쏠렸다. 사제는 사제복의 폭 넓은 소매를 모아 성호를 긋고 조용히 불을 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추궁할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옛 신의 사제를 대리인으로 보낸 것이 절묘한 한 수였다.

로벨은 바람에 자꾸 찢기는 불을 달래며 국자와 그릇을 주문했다.

“빈 속을 채워두시오. 오늘은 고생 좀 할 듯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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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말대로 고생이었다. 그냥 고생도 아니고 아야와 이야카의 형제뻘 되는 가축을 부르짖을 고생이었다.

절벽을 내려가는 길은 바위투성이에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하고 가파른데다 바람까지 거칠었다. 로벨은 밧줄을 허리에 묶고 몸이 날랜 순서로 내려 보냈다. 목숨 내놓고 살아가는 몇몇 용병이 객기를 부렸지만 서슬 퍼런 아론다이트 앞에서 빠르게 잠들었다. 균형 감각이 안 좋은 외팔이 더치가 발이 미끄러지는 사고가 있었고, 젊은 기사의 종자가 무기 꾸러미를 떨어뜨리는 말썽이 있었다.

절벽을 내려와서도 고생이 끊이지 않았다. 깊고, 거칠고, 무엇보다 차가운 겨울 바다였다. 헤엄쳐서 건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해 뗏목을 가장한 나무다리를 놓았다. 절벽 위에서는 로프를 이용해 통나무를 내리고, 절벽 아래에서는 암초와 암초 사이에 길을 놓는데, 자재를 충분히 준비했음에도 한나절이 넘게 소요되었다. 그리고 애쓴 것에 비해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젊은 기사는 서임 받은 이래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고, 옛 신의 사제는 기도문을 읊조리면서 보기 드물게 진실함을 보였다. 기사든 사제든 용병이든 파도에 들썩이는 뗏목에 오르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해가 질 것 같은데, 크흠! 내일 하시지요?”

“제 생각에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그렇습니다요! 밤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요!”

로벨은 각계각층의 항의를 찍어 누르는 폭군의 기질을 보였다.

“그런 말 마시오. 쇠도 달았을 때 두드려야 하는 법이오. 이거 받으시오.”

로벨은 통나무를 내리는데 사용한 굵은 마로프를 허리에 감고 젊은 기사에게 건넸다.

후작쯤 되는 기사가 솔선수범하니 본인의 명예와 페르젠 가문의 명예를 짊어진 기사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프란시스 가문의 대리인 역시 선택권이 없었다.

추가로 로벨을 보좌하기 위해 울프 용병단에서 3명을 선발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고용주의 간택을 받은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을 놀리다가 세 번째 대상이 되었다.

울프 용병단은 낄낄거리고 낑낑거리며 뗏목을 잡아당겼다. 뗏목에 오른 청동사자 호 탐사자 6인은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악을 썼다. 이 계절에 이리 요동치는 바다에 빠지면 안전장치를 했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사실 로벨도 얼굴을 적시는 파도와 뼛속까지 침투하는 추위에 급속도로 후회했다. 가죽 망토가 파도에 젖으면서 몸이 두 배쯤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미 떠난 배를 돌릴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더욱 안 되었다. 그런 로벨의 고집을 옛 신이 가호하사 기적적으로 청동사자 호 갑판에 이르렀다.

“옛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기사의 신앙심이 새삼 벅차올랐다. 그 광경에 감명 받아야 할 옛 신의 사제는 비 맞은 늙은 개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실제로 방수기능이 전무한 사제복은 사방에서 몰아친 파도에 폴싹 젖어있었다.

“자, 빠르게 둘러봅시다.”

로벨은 기울어진 청동사자 호 우측 갑판에 올랐다. 바닷물에 젖어 미끄럽고 잡동사니가 굴러다녀 바닥이 좋지 않았다.

“짐을 묶어놓았습니다요.”

“응?”

로벨도 여러 차례 배를 탔기에 청동사자 호 갑판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식수를 담은 오크통과 선실에 들이지 못한 나무상자가 돛대와 난간에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온 발가락 슈미츠가 아는 척했다.

“태풍이 오거나 하면 이리 묶어두지요.”

“한겨울에 무슨 태풍이야?”

“그러니까 이상합니다요.”

허풍쟁이 제이콥과 흉내쟁이 퍼시발은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은 상자를 뜯으며 시시덕거렸다. 아이란드 왕국산 고급 벨벳과 마늘 등의 향신료였다.

로벨은 값비싼 교역품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게 없어.”

“그거라니요?”

“시체.”

로벨의 말에 웃음이 싹 가셨다. 이만한 갤리선이면 못해도 100여 명은 탑승하고 있어야 했다. 바다에 휩쓸려간 사람이 많다 해도 이리 깨끗할 수 없었다.

로벨은 암초 사이에서 암초처럼 우뚝 솟은 좌측 갑판으로 기어 올라갔다. 파도가 닿지 않은 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피?”

햇빛에 노출된 지 수일이 지난 적갈색 피였다. 로벨은 흐려진 핏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메인마스트 뒤의 채광창을 지나 선창으로 이어졌다.

“배 안에 뭔가 있어.”

약탈에 열중하는 용병도, 그런 용병을 못마땅하게 경계하는 기사와 사제도 침묵했다. 수평선 위로 해가 남아있고 해안가에 사람이 북적이지만 기이하게 음산했다. 오래된 교회의 지하 납골당, 혹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산 속 공동묘지 같았다. 아무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 같지 않았다.

“저, 기사 나리? 안에도 들어가시게요?”

“응? 당연하잖아?”

“다, 당연한 거긴 한데, 그게 좀 불안하달까...”

“시체가 없는 것도 이상하고요.”

로벨은 웅얼거리는 부하의 말을 듣지 않고 가죽 망토 속에서 랜턴을 꺼냈다. 손잡이가 조금 젖은 것 말고 멀쩡했다.

“부싯돌 있어?”

모두가 기대감에 젖어 서로를 보았다. ‘없지? 없을 거야! 그치?’ 그러나 태생적으로 남의 눈치를 안 보는 기사가 말굽처럼 굽은 부싯돌과 부싯깃을 담은 통을 꺼냈다.

“본인이 챙겨왔소. 아, 고마워할 필요 없소.”

젊은 기사는 원망 서린 눈길에 잠시 당황했다. 로벨은 발아래를 신경 쓰며 불꽃을 빚어냈다. 그리고 랜턴 덮개를 벗기고 심지 위에 조심스럽게 옮겨갔다.

“좋아. 가자.”

로벨이 준비를 마치자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 한숨이 더 큰지는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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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려면 2시간쯤 남았지만, 청동사자 호 선실은 동굴처럼 깜깜했다. 그냥 동굴이 아니라 해안 동굴이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2층부터는 종아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3층의 노잡이 노예들은 동사가 아니라 익사했을 것이다. 차디찬 물에 잠겨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어갔을 노잡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아렸다.

“선장실은?”

“보통 고물 쪽에 있지요.”

로벨은 어느 쪽이 뱃머리인지 가늠한 후 후미로 이동했다.

‘으으...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

‘참아, 임마! 나으리들도 저리 참는데!’

‘저 나으리는 벌써 기절한 얼굴인데?’

사방이 밀폐된 곳이라 용병들의 속닥거림이 잘 들렸다. 다소 불쾌한 소리도 나왔지만 참았다. 조용한 것보단 나았다.

퉁퉁 부은 고깃덩어리, 둘둘 말아놓은 해먹, 두드리면 쨍! 하고 깨질 것 같은 냄비 따위가 발밑으로 흘러갔다. 로벨은 랜턴을 높이 들어 주위를 밝혔다.

“발 조심해.”

“저희야 항상 조심하지요. 기사 나리가 부려 먹지 않으면요.”

“입도 조심하고.”

어둠과 고인물을 헤치고 나가다 보니 마침내 선장실에 도달했다. 로벨은 굳게 닫힌 문을 위아래로 비춰본 후 손잡이를 잡았다. 덜컹-! 안쪽에서 무언가 걸린 듯 열리지 않았다.

로벨은 잠깐 고민하다가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문틈으로 찔러 넣어 뭐가 있는지 살필 생각이었다. 그사이 젊은 기사가 부싯돌과 기름을 이용해 작은 횃불을 만들었다. 조명이 2개가 되자 한결 밝아졌다.

“본인은 선창을 살펴보겠소.”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손가락 한마디 겨우 들어갈 틈으로 칼날을 밀어 넣었다. 물컹-

“물컹?”

께름칙하게 익숙한 감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을 찌를 때 감각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

로벨의 질문에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이 실소했다.

“기사 나리도 참... 이런 곳에 누가 있겠습니까요?”

“끄어어어...”

놀랍게도, 누가 있었다.

255화. 칼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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