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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51화 (251/605)

251화. 은퇴

251화. 은퇴

늦가을의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수확의 기쁨 때문인지 모르지만,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은 바라보기만 해도 따스했다.

로벨은 가벼운 일상복을 입고, 가벼운 승마용 안장을 모닝스타에 얹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드릭 마을을 향했다.

“영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응.”

“어이쿠! 영주님! 순시 나오셨습니까요?”

“응.”

“와아아! 영주님! 영주님이다!”

“응. 응.”

로벨을 본 로드릭 마을주민은 모자를 벗고 꾸벅 꾸벅 인사했다. 풍요로운 시절이라 어른이나 아이나 얼굴이 밝았다. 로벨은 세 걸음에 한 번씩 쏟아지는 인사를 건성으로 받았는데, 그 모습이 늠름하다며 다들 좋아했다.

마을 광장은 시장이란 표현이 어울리고, 광장을 둘러싼 주택지는 시내나 읍내란 표현이 어울렸다. 예전의 흙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돌과 나무와 회반죽으로 지은 2, 3층짜리 타운하우스가 거리를 채웠다. 몇 년 사이 4, 5배로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집사는 도시 번화가처럼 보인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마을의 변화가 모두에게 달갑지는 않았다. 시장 상인과 자유민이 마을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기존 영지민은 마을 외곽으로 밀려났는데, 자연히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린 집사는 기존 영지민의 대표 찰드 촌장과 새로운 정착민의 대표 헨리 피터 상회장을 자주 만나라고 충고했다. 로벨은 충신의 충고를 새겨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촌장집과 로드릭 상회를 찾아갔다.

로벨이 딱히 갈등을 해결해주진 않았지만, 영주님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주민이 만족했다. 특히 찰드 촌장과 헨리 상회장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로벨을 대접하는 것이 곤욕스러워서라도 영지민과 정착민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우어엇! 영주님?! 또 오셨습니까요?”

찰드 촌장이 마당에서 기다란 활대를 다듬다가 기겁하여 일어났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촌장집을 둘러보았다.

“사냥하게?”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영주님의 허락도 없이 어찌 감히... 그냥 소일거리입니다요. 이놈이 반평생 사냥꾼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꿩이나 토끼 정도는 잡아도 좋아. 내가 임명한 촌장이면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지.”

“하하하! 정말 감사한 말씀이오나 이제 늙어서 예전 같지 않습니다요. 숲에 못 간 지도 오래되었지요.”

찰드 촌장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받아 랜턴 걸이에 묶었다. 모닝스타는 낯선 촌장이 못 미더운 듯 콧김을 거세게 뿜었다. 들이박을까 말까 고심하는 눈빛이었다. 사납기로는 아야와 이야카보다 더했다. 찰드 촌장은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을 알지 못하고 로벨을 초대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와인을 내오겠습니다요.”

“와인이 있어?”

“영주님이 찾으실까봐 한 병 구해놨습니다요.”

이름 모를 시골 수도원에서 양조한 이름 없는 저가 와인이었으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추수제 준비는 어때?”

“작년 예산에 맞춰서 준비 중입니다요. 헨리 상회장이 도와주고 있습니다요.”

로벨은 어제와 비슷하고 그제와 유사한 이야기를 나누며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찰드 촌장의 집은 늙은 촌장의 집과 달랐다. 전직 사냥꾼답게 사냥용 도구가 가득했다. 한 팔 길이의 큼직한 화살, 짐승의 힘줄, 황마로 만든 질긴 로프, 곰덫, 쥐덫, 무두질용 손칼 등등. 로벨은 토끼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말했다.

“둘이 친하게 지내. 싸우지 말고.”

인생의 굴곡을 하나하나 넘다 보니 어느덧 50줄에 이른 찰드 촌장은 손주한테 할 만한 소리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크게 웃지는 못했다. 로벨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자 화급히 말을 돌렸다.

“어린 집사 나으리는 요즘 무엇을 합니까요? 통 얼굴을 못 뵙습니다요.”

로벨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 하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방금 전 일은 잊어버렸다.

“...몰라.”

“예? 모른다니요?”

“나도 얼굴 못 봤어.”

로벨과 어린 집사의 관계는 주종관계 이상이었다. 신체 일부를 인용한 오래된 친구, 혹은 그 이상의 정신적인 혈육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로드릭 마을 토박이 찰드 촌장은 로벨의 우울한 반응에 놀랐다. 로벨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왜 그럴까?”

어린 집사의 고민이 로벨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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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고민은 정말 깊었다. 얼마나 깊으냐면 펜의 잉크가 마른 지도 모르고 계속 긁적일 정도였다. 한참 전에 찾아온 마녀 키르케가 입을 가리고 여우처럼 웃었다.

“히히! 글씨 연습해요?”

“...음?”

마녀 키르케가 펜촉에 이리저리 할퀸 종이를 가리켰다. 어린 집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했다. 까칠한 집사는 당황하거나 부끄러우면 도리어 화를 내었다.

“또 뭐에요? 일하는데 왜 왔어요?”

“종이를 괴롭히는 일이요?”

“이건 그냥... 아, 왜 왔냐고요!”

마녀 키르케는 고깔모자의 챙을 아래로 끌어당겨 두 뺨을 감쌌다. 여염집 처녀가 쓰는 보닛(bonnet)처럼 보였다.

“고민을 들어주러 왔죠.”

“누구 고민? 제 고민이요?”

“자자, 이 누님한테 털어나 봐요. 혹시 알아요? 사랑과 우정의 마법으로 뿅! 하고 해결해줄지.”

“누님 같은 소리하시네.”

어린 집사는 투덜거리며 펜을 잉크통에 꽂았다. 마녀 키르케는 방긋 웃었다. 평소처럼 히스테리 부리지 않는 것을 보아 고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어린 집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계속 믿어도 될까요?”

마녀 키르케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무표정한 마녀의 모습은 마녀와 7년 넘게 사귀어온 어린 집사에게도 낯선 것이다. 잘 웃는 사람이 정색하면 무서운 것처럼 괜스레 내가 뭘 잘못 했나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면 제법 예쁘기도... 어라? 내가 미쳤나?’

어린 집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서둘러 다시 질문했다.

“우리 영주님이 충성맹세를 거두면 어떻게 될까요?”

“으음... 기사님의 기사 작위는 장미성 공작님이 준 거잖아요.”

“그건 백작위죠! 국왕 폐하가 내려준 후작위도 있으니까요.”

“늑대성은요?”

“하사받은 봉토라 해도 300년이 지났어요. 누가 뭐라 해도 로드릭 가문의 땅이죠. 그리고 우리 영주님이 이만큼 일군 거죠. 에릭 공작이나 프란시스 가문이 뭐 해준 게 있나요?”

어린 집사가 열변을 토하자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제 알았어요! 이미 결정했지만 확인을 받고 싶은 거죠?”

“확인이 아니라 확신이요. 지금 그게 부족해요. 오죽하면 그쪽한테 이야기하겠어요?”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지만, 마녀 키르케는 베시시- 웃었다.

“그래야 우리 집사님이죠. 음. 음. 보기 좋아요.”

마녀의 칭찬 아닌 칭찬에 어린 집사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마녀 키르케 얼굴에도 장난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문제는 기사님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젠장이라구요. 젠장.”

어린 집사의 고민은 한동안 끝나지 않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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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은 정기 보고를 위해 늑대성 언덕을 올랐다.

울프 용병단이 창설된 이래 매일같이 해온 일이지만, 요즘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젊을 때 몸을 막 굴린 탓인지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 무릎이 아려왔다. 화살을 맞은 적 있는 왼쪽 발은 자신도 모르게 땅을 끌 때가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펄프 대장은 억지로 힘을 주어 왼발을 내디뎠다. 늙다리 잭슨처럼 그만 은퇴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병들고 아픈 몸으로 추하게 은퇴할 마음은 없었다.

지난 수년간 동고동락한 전우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으며 당당히 은퇴할 것이다. 성공한 용병의 마지막 장에는 ‘사지 멀쩡히’가 필요했다.

‘그날이 가까운 것도 같은데...’

가깝지 않은 것은 매해 높아지는 늑대성이었다.

펄프 대장은 잠깐 숨을 돌린 후 걸음을 떼었다. 언젠가 로벨이 말했듯 가장 많은 급료를 받으니 그 값을 해야 했다.

“뭐라고? 나가셨다고?”

펄프 대장의 짜증에 사회성이 모자란-그래서 용병이 되었을- 문지기 근무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그 갈기만 까만 하얀 말을 타고 마을로 내려갔소.”

“모닝스타라고! 모닝스타!”

“아니, 내가 고용주 말 이름까지 외워야 하오?”

펄프 대장은 남의 기분을 모르고 시시덕거리는 신참 용병들을 쥐어박을까 고민하다 포기했다. 그래도 문지기 임무는 잘하고 있었다.

“집사 양반은 안에 있는데, 집사한테 맡기면 되잖소.”

“그 친구는 좀 불편한테...”

“아니면 저녁에 다시 오시든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집사가 어디 있다고?”

펄프 대장은 죄는 없지만 괜히 얄미운 문지기에게 ‘자세 똑바로 해라’, ‘창날이 왜 그 모양이냐’, 따위의 트집을 잡은 후 성난 문지기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냉큼 성 안으로 도망쳤다.

‘그러고 보면 이곳도 많이 변했지.’

늑대성에 온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성 안팎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말 한 마리가 비좁다고 몸부림치는 마구간은 크게 확장해서 망아지 10마리가 뛰어놀아도 될 만큼 넓어졌고, 잡초가 무성하여 휴경지로 오해받기 쉬운 연병장은 깨끗하고 평탄하게 단장되었다. 전대 영주인지 전전대 영주인지가 공사하다 말아먹었다는 석재 성곽은 로벨과 어린 집사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 진짜 성다워졌다.

‘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지.’

펄프 대장은 뻐근한 왼쪽 다리를 끌며 아성으로 들어갔다. 아직까지 목재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메인 홀이 반겨주었다. 펄프 대장은 마루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었다. 수시로 수리를 해도 낡은 성이라 어딘가는 고장이 났다. 기둥 사이로 창고, 주방, 계단, 사용인 침실 등이 보였다. 2층은 온전히 영주의 공간이라 로벨이 없으면 올라갈 일이 없었다.

펄프 대장은 2층 회랑을 힐끔 보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아성에서 나온 적 없다고 하니 창고 아니면 집사의 방이었다.

“영주님이 충성맹세를 거두면 어떻게 될까요?”

펄프 대장은 어린 집사 방 앞에서 우뚝 멈췄다. 35년 용병 경험이 몸을 붙잡았다.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충성맹세를 거둔다고?’

어린 집사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 그 결과를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당장 올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 꼴이 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로벨은 헤르만 백작이 아니었다. 그리고 호수성과 폭풍성을 잃어 동부지방의 영향력을 상실한 프란시스 가문이다. 늑대성이 북쪽 영주들을 이끌고 돌아서면 위험한 것은 장미성이 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전쟁은 일어날 텐데...’

펄프 대장은 어린 집사의 방문에서 떨어져 깊은 고민에 잠겼다. 아무래도 은퇴는 몇 년 더 미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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