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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50화 (250/605)

250화. 범인

250화. 범인

어린 집사의 걱정과 달리 몰드 헤르만 백작의 결사항전이나 악마추종자의 음험한 술수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호수성이 건재하니 불리한 전장에서 사생결단을 낼 필요가 없고, 악마추종자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에게 흑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결국 도망갔군.”

헤르만 백작군은 질서도 정연하게 북쪽으로 퇴각했다. 헤르만 가문에 쌓인 게 많은 에디즈 자작이 추격해서 섬멸하자 주장했으나 대다수 제후가 부정적이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거듭되는 전투로 지쳤고, 페르젠 백작군은 지난 패배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기타 영주들은 주인 잃은 성과 도시를 탐내었다. 이윽고 폭풍성의 폭풍의 홀에서 귀족원 회의가 열렸다.

“뜻하지 않게 모두 모였구려.”

“정통성 전쟁 이후 처음인가?”

정식으로 초대해도 엉덩이가 무거워 어지간하면 모이지 않는 제후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이 중요한 자리에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없다는 것이 많은 변화를 시사했다.

“잉크통에 빠져 죽을 부르주아처럼 굴지 말고 솔직히 말합시다. 이 도시를 누가 다스릴 거요?”

탐욕스러운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폭풍성을 점령한 것은 로벨이지만, 몰드 헤르만 백작을 쫓아낸 것은 여러 제후들이었다. 바람성의 맥기 남작을 비롯한 욕심 많은 제후들은 로벨이 버팅거 시티의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 무력시위를 해서라도 반대할 작정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또한 원치 않을 테니 재판으로 가도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로벨 로드릭이란 풍운아를 얕잡아 보았다.

로벨은 눈치 싸움하는 제후들을 비웃듯 곧장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우리 로드릭 가문은 전공과 정통성을 두루 갖춘 조단 랭스터 경을 추천하는 바요.”

“그, 그자는...! 으음... 그것이...”

로벨의 추천에 일부는 웃고 일부는 당황했다. 그러나 ‘전공’이란 무기와 ‘정통성’이란 갑옷을 내세우자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공적만 내세우거나, 핏줄만 내세우면 억지를 쓸 수 있을 텐데, 둘 다 가진 상태라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의 땅과 재산을 지켜주는 ‘정통성’은 타인의 땅과 재산도 지켜주었다.

“본인은 이견이 없소.”

로벨의 추천에 에디즈 자작이 동조했다. 덩굴성 입장에서는 호수성을 견제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반역을 꾀한 조프리 랭스터 백작은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누군가는 랭스터 가문을 이어가야 하지 않소. 그의 이복동생이며 죄가 없는 조단 랭스터 경이 적임자요.”

“허나 저자는 로벨 로드릭 경의...”

바람성의 맥기 남작이 말끝을 흐렸다. 볼탄 반도에서 내로라하는 제후들이 모인 자리였다. 혓바닥을 특히 조심해야 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의? 무엇이오?”

조단 랭스터 경이 도끼자루에 오른손을 얹고 으르렁거렸다. 호칭을 새겨들어야 했다. 랭스터 가문은 프란시스 가문이 아니라 로드릭 가문을 섬겼다.

‘벌써 이야기를 끝냈구나...’

‘로벨 로드릭! 실로 늑대처럼 교활하군!’

조심스러운 반대와 부끄러운 자천이 잠깐 나왔지만, 로벨의 지지에 비하면 힘이 없었다. 예정에 없던 귀족원 회의는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세부적인 이권 문제는 며칠 더 이어지지만, 조단 랭스터 경이 폭풍성의 주인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조단 랭스터 경의 주인이 누군지도 똑똑히 알려졌다. 올해에는 겨울잠을 설칠 사람이 여럿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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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히힛! 히히힛!”

어린 집사는 조단 랭스터 경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낄낄거렸다. 주거세 면제, 통행세 면제, 거래세 면제, 우물세 면제, 기타 등등 면제, 면제... 도시민이 져야 할 세금이 모두 면제되었다. 그 말인즉, 소금광산과 식품공장 수익이 20%쯤 오른다는 뜻이다.

“그 아저씨가 입은 험해도 은혜를 아는군요. 좋아요. 좋아. 응당 그래야지.”

그러나 당장은 페닝이 들어올 곳보다 나갈 곳이 많았다. 울프 용병단의 전쟁수당, 소금광산 수리비와 광부 고용비, 식품공장의 인부와 식자재도 다시 들여야 했다.

로벨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어린 집사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졌다.

“그러고 보니 큰일이네요. 상인이 줄어서 세금도 얼마 안 되는데... 이안 선장은 내년 봄이나 되어야 돌아올 테고, 봉신들은 거지꼴이라 바칠 세금도 없을 테죠.”

로벨은 자나 깨나 살림 걱정인 어린 집사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그러지 말고 하늘을 봐봐.”

“왜요? 하늘에서 금화라도 떨어져요?”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면서도 하늘을 보았다. 똑같은 하늘이라도 시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리고 기분에 따라 달리 보였다. 오늘은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가을이요?”

“응. 가을이야.”

어린 집사가 정말 어릴 때, 가난한 로드릭 성이 정말 가난할 때, 가을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었다.

“아하! 추수가 코앞이군요?”

“응. 맞아.”

장사에 실패해도, 세수가 줄어들어도, 땅이 주는 결실이 있으니 내년 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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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폭풍성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늑대성으로 귀환을 준비했다.

로벨은 떠돌이 기사에서 대도시 버팅거 시티의 주인이 된 조단 랭스터 경을 위해 약간의 병력과 물자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로드릭 상회의 추천을 받아 행정관과 재무관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귀족원의 인정을 받았다 해도 무일푼 외톨이 기사가 인구 8천의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으니 로벨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리고 로벨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로벨의 사람으로 꽉꽉 채워놓았으니 사실상 로벨의 도시가 되었다.

어린 집사는 그 모든 일을 계획하며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10년은 허튼짓 못하겠죠.”

“으엑? 랭스터 아저씨가 배신할 거라 생각해요?”

마녀 키르케가 무서운 사람이란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가끔씩 저렇게 속을 긁을 때가 있었다. 마녀가 안 되었으면 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악당 전문 배우...

어린 집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화내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어제의 결심은 오늘의 핑계로 사라지고, 오늘의 감동이 내일의 욕망에 사라지죠.”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잖아요.”

“슬픈 게 아픈 것보다 나아요. 그리고 사람이 변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어린 집사는 뒷말을 조금 삼켰다. 로벨이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쁜 게 아니면요? 뭐에요? 뭐가 좋아요?”

“그건 그러니까... 에이잇! 시끄럽다! 저리가요! 바쁜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요!”

어린 집사는 펜의 큼직한 깃털로 마녀 키르케를 쫓아냈다. 마녀 키르케는 혀를 날름 내밀고 로벨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어린 집사는 쫓는 시늉만 하고 쫓지 않았다. 버팅거 시티 외에도 처리할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마녀 키르케에게 말하려다 만 것이다.

‘프란시스 가문에 계속 충성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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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팅거 시티로 몰려온 제후들은 콩고물을 챙긴 순서로 떠나갔다. 페르젠 백작은 약간의 금화와 파도성 포로에 만족했고, 에디즈 자작은 호수성을 고립시킨다는 합의에 만족했고, 맥기 남작은 거래세 감면과 도망친 영지민의 송환에 만족했다. 로벨 로드릭 군도 늑대성으로 회군을 시작했다. 떠나간 용병과 남겨진 용병을 제외해도 150명에 이르는 숫자였다.

“주군, 내년 봄에 찾아뵙겠습니다.”

조단 랭스터 경이 도시 밖까지 배웅을 나와 아쉬움을 표현했다. 성격을 보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참된 기사라 충성맹세 후 깍듯이 대우했다. 로벨은 피곤함을 숨기며 밝게 대답했다.

“경은 언제든지 환영이오. 어두운 지하에서 높은 성탑까지 함께 싸워온 형제지 않소.”

실제로 싸운 곳은 성 안마당이지만, 그걸 지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단 랭스터 경은 감격해서 흉갑을 두 번 두드렸다. 로벨은 청량한 미소로 화답한 후 말머리를 돌렸다. 오랜만에 주인을 태운 하프 유니콘은 앞발을 높이높이 들며 기운차게 출발했다.

“우선 회색산에 들려서 피난민을 살펴야 해요. 헤르만 백작군이 물러갔으니 마을로 내려갈 수 있겠지만...”

“마을이 없어졌잖아?”

“그러니까요. 추수가 끝나면 금방 겨울이 찾아올 텐데,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죠.”

“내년 봄까지 회색산에서 지내게 하면 어떨까?”

“평소라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했겠지만... 뭐, 좋아요. 이참에 은퇴한 용병과 광부와 광부의 가족으로 광산마을을 만들어 보죠. 뉴-뉴 로드릭 마을 어때요?”

“...그냥 회색산 마을이라고 하자.”

어린 집사답지 않은 선심이었다.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소금광산을 지킨 늙다리 잭슨 이하 회색산 용병에 조금은 감동한 것이 분명했다. 영원한 것은 없네 어쩌네 떠들어도 속은 주인을 닮아 착했다. 마녀 키르케가 수레 위에서 앙증맞게 기지개를 켰다.

“으앙! 빨리 돌아가서 아야랑 이야카를 보고 싶어요!”

“그 냄새 나는 털북숭이가 뭐 이쁘다고...”

“어머? 그런 말 하니까 어린 집사를 싫어하죠! 걔네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진짜라니까요? 제가 보리빵은 기사님꺼니까 먹으면 안 되고, 호밀빵은 어린 집사꺼니까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정말 호밀빵만 먹어요.”

“이이이익-! 그쪽이 범인이었구나! 어쩐지 내 빵만 사라지더라!”

집사와 마녀가 수레 위에서 구르기 시작했다. 노쇠한 짐말이 구슬프게 울며 항의했지만 안타깝게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펄프 대장은 말채찍을 끌어안고 무심히 하품했고,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는 여느 때처럼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누었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폭풍성 점령과 방어를 3배쯤 과장해 도시 밖에 주둔한 동료들에게 떠들었다.

로벨은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들을 쭉 둘러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고단한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꾼들 같았다. 기사와 용병이 전쟁을 끝냈으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 집이 제일이야.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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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산에서 피난민을 돌보고, 여러 마을을 돌며 보급품을 충당하니 열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렇게 긴 여정을 보내고, 마침내 로드릭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집이다!”

하얀 연기를 내뿜는 높고 낮은 지붕과 노랗게 파도치는 고운 밀밭과 낫질이 한창인 부지런한 농부와 햇볕을 쬐는 게으른 소떼 위에 우뚝 솟은 성이 있었다. 장미성처럼 화려하지도, 폭풍성처럼 장엄하지도 않지만, 정답고 친숙한 ‘우리집’이었다.

“아우우우우-우-!”

“컹! 컹!”

저 먼 곳에서 네 발 달린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마녀 키르케는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주 달렸다.

“우리 귀염둥이들! 엄마가 돌아왔어요!”

사납고 잔인한 울프 용병단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깔모자를 쓴 마녀가 송아지만한 늑대와 뒹구는 것을 보니 확실히 고향에 돌아온 실감이 났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어 어깨까지 자란 긴 머리를 흔들었다. 따스한 햇살이 참 좋았다.

“이제 좀 편하게 지내자.”

“에휴. 그럴 수 있으면요.”

로벨은 어린 집사를 흘겨보고 늑대성으로 이동을 명령했다. 먼 길을 걸어온 병사들답지 않게 걸음이 힘찼다. 그것도 ‘우리집’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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