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감동
249화. 감동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배신자이자 이단자 몰드 헤르만 백작을 처단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로벨은 그렇게 사기를 북돋았다. 펄프 대장과 호른 경은 아예 들숨날숨으로 삼았다. 그러나 헤르만 백작군의 공격이 사흘간 계속되고, 배수로를 이용한 침입이 두 차례나 일어나자 신뢰를 잃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가을 추수가 가까워지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조단 랭스터 경이 건초를 모아 피 묻은 수염도끼를 닦으며 말했다.
“후작과 헤르만 백작이 공멸하기 바라는군.”
어린 집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헤르만 백작은 배신자니까! 하지만 우리 영주님은 왜요? 뭘 잘못했다고요?”
랭스터 경은 도끼날을 앞뒤로 비추며 대답했다.
“그리 화내는 것을 보니 그 작은 머리로도 짐작하고 있었군.”
어린 집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외팔이 더치는 자신의 손도끼보다 크고 화려한 수염도끼를 부럽게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요? 공작놈이... 공작님이 우리 기사 나리가 죽기를 바란다굽쇼?”
랭스터 경은 외팔이를 힐끔 보고 무시했다. 어린 집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행정관이자 후작을 모시는 시동으로 대우하지만, 네일 공국 출신의 하찮은 용병은 상종하지 않았다. 외팔이 얼굴에 피가 몰려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린 집사는 외팔이가 사고 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영주님을 경계하는 거예요. 영주님이 버팅거 시티를 차지하면 영지의 크기도 크기지만 프란시스 공작령을 에워싸는 꼴이 되니까요.”
“그게 말이 되오? 기사 나리인데? 충성 맹세도 했잖소?”
“헤르만 백작도 충성 맹세해놓고 저러잖아요.”
어린 집사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설득당했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 달리 이유가 없었다.
“이럴까봐 미리미리 친해지라고 한 건데...”
“볼탄 반도의 절반을 다스리는 가문이다. 친분 따위로 판단하지 않겠지.”
랭스터 경이 어린 집사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로벨 보고 순진하네 어쩌네 할 입장이 아니었다. 불신과 분노 다음은 좌절이 찾아왔다. 어린 집사는 식탁, 의자, 옷장, 구유 따위로 틀어막은 배수구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최악의 경우에도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탈출시켜야 했다.
“왜들 그래? 랭스터 경, 무슨 일 있소?”
로벨과 펄프 대장이 성벽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헤르만 백작은 병력을 150명씩 나눠 파상적으로 공격했다. 3배의 병력이 3번을 쉬지 않고 공격하니 수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성은 버티지만, 병사가 지쳐갔다.
외팔이가 펄프 대장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대장, 애들은 괜찮소?”
“아직은 괜찮다. 애꾸눈이 잘 가르쳤어.”
성벽을 지키는 것은 울프 용병단의 자랑 크로스보우 제1소대였다. 백발백중은 아니지만 7, 80발은 명중시키는 특등사수였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 헥헥거리는 헤르만 백작군이 어찌할 상대가 아니었다. 사흘 동안 32명의 적병을 사살하거나 부상 입혔다.
어린 집사는 어린 집사답게 병참을 걱정했다.
“쿼럴은 얼마나 남았어요?”
“200발 정도 되오. 아, 걱정 마시오. 밤중에 몰래 나가 회수하고 있으니 3, 4일은 더 버틸 수 있소.”
“그 말은 3일이 한계란 말이군요.”
어린 집사는 서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에릭 공작의 정신적 결함을 심도 깊게 지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위기였다. 폭풍성을 기습 점령할 때는 기똥찬 작전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도시 한복판에서 고립되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로벨의 표정은 밝았다.
“왜들 그래? 무슨 걱정 있어?”
랭스터 경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지휘관이 초조해 하면 병사들은 겁먹고 도망칠 궁리를 한다. 허세라도 좋으니 항상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그렇다 해도 저리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다니. 사자의 심장이라도 가진 건가?’
물론 아니었다. 로벨을 오랫동안 따른 어린 집사 이하 늑대성 식구들은 허세나 연기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에릭 공작이 지원군을 안 보내잖아요! 굶어 죽거나 칼 맞아 죽을 판이라구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예상 밖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큰일이 난 거죠!”
랭스터 경은 무슨 몸종이 제 주인을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지 어이없어 쳐다보았다. 더욱 웃긴 것은 호른 경이나 울프 용병단이나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권위가 없는 건지, 허물이 없는 건지, 정말 이상한 기사였다.
이상한 기사 로벨 로드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도 지원군은 올 거야.”
“누가 와요! 누가!”
로벨은 뿔이 난 어린 집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좀 두고 봐야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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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생각은 모두 맞았다.
하룻밤이 지나자 버팅거 시티 밖에 지원군이 나타났다. 아침에 한 부대, 점심의 두 부대, 저녁에 네 부대... 해가 질 때쯤에는 도시 밖이 깃발로 뒤덮였다. 어린 집사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식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걸 기다린 거예요?”
로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응.”
어린 집사는 그제야 볼탄 반도의 제후가 에릭 프란시스 공작만이 아니며, 호수성에 불만이 있는 기사가 로벨 로드릭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폭풍성의 높디높은 성탑에 오르니 불만 가득한 깃발이 매우 잘 보였다.
“파도성 깃발이네요?”
“덩굴성의 에디즈 자작도 왔어요.”
“바람성의 맥기 가문 깃발도 보이오.”
헤르만 가문에 쌓인 것이 많은 가문과 켈트 경이 임시 지휘하는 울프 용병단 150명이 합쳐지자 그 병력이 1,000명 가까웠다.
“하이에나들이 지친 먹잇감을 노리고 왔군.”
“충성맹세를 스스로 저버린데다가 이단신앙을 의심받고 있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죠.”
“그래도 원한이 없으면 저리 안 하지.”
로벨을 따라 성탑에 올라온 늑대성 식구들은 가을 추수도 팽개치고 몰려온 각 지방 군세에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랭스터 경은 도끼자루를 혁대 고리에 끼우며 말했다.
“이제 포위된 것은 헤르만 백작이오.”
그것도 도시 안팎으로 포위되었다. 역사의 햇수가 전쟁의 횟수인 유라피아 대륙에서도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폭풍성을 공격하면 도시 밖에서 공격할 테고, 도시를 수비하면 폭풍성이 시내에서 날뛸 것이다.
“헤르만 백작이... 어떻게 나올까요?”
로벨과 로벨의 가신은 모두 전쟁경험이 풍부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리 많지 않았다.
“도망칠 거요.”
“후퇴할 것이다.”
“호수성으로 물러날 겁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답이 나왔다. 절묘한 타이밍이라 나이와 신분을 잊고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린 집사가 ‘히힛!’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군요?”
“그렇소.”
“물론이다!”
또다시 동시에 답이 나왔다.
“도시의 시설을 점거해야 하오.”
“헤르만 백작군을 추격해야지!”
“호수성을 공격하시지요.”
이번에는 미소 짓지 못했다. 펄프 대장이 나이답지 않게 핏대를 세웠다.
“아니, 나으리들 눈깔에는 저 깃발이 안 보입니까? 우리 애들이 피 흘려 잡은 먹이를 저 하이에나한테 거저 주려고?”
“뭣이라? 눈깔? 천박한 용병 놈이 뵈는 것이 없구나!”
“나도 랭스터 경에 의견에 동의하오. 사소한 이익보다 후환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오.”
펄프 대장은 버팅거 시티 장악을, 랭스터 경은 헤르만 백작군 추격을, 호른 경은 더 나아가 호수성 공격을 주장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까지 가담해 말싸움을 벌이다 자연히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최종 결정은 최고 지휘관인 로벨의 몫이었다. 로벨은 한참 뒤에 입술을 떼었다.
“우리 목적은 소금광산과 식품공장을 정상화하는 거야.”
“아... 그랬죠?”
로벨의 말에 기본 전제로 욕심을 깔고 떠들던 일동이 우울해졌다.
“그래도 기왕 폭풍성을 점령했으니까, 조금 더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징수권이나 통행권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관세 면제라도...”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쉬운 듯 도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조단 랭스터 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고향집이라 하지 않았소?”
랭스터 경은 뜬금없는 사실 확인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 랭스터 가문의 성이었으니...”
과거형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못난 이복형제 때문에 300년을 이어온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 덕분에 조단 랭스터 경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몸 둘 곳이 없는 떠돌이 기사가 되었다. 로벨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자상하게 말했다.
“그럼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겠지.”
개미 기어가듯 말해도 우레보다 크게 들릴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저, 정말이오?! 폭풍성을 내게 준다고?”
사실 예상 못 한 것은 아니다. 로벨을 따라 종군할 때부터 대리인이 될 것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룬 성 같은 작은 성이었다. 볼탄 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버팅거 시티를 통째로 맡기는 것은 별개였다.
어린 집사는 양쪽 뺨을 누르며 기겁했고, 펄프 대장은 두 눈을 주먹만 하게 뜨며 경악했다. 그러나 귀족의 생리를 잘 아는 호른 경은 냉정했다.
앞서 말했듯 버팅거 시티는 대도시였다. 북쪽으로는 버팅거 호수와 붉은 산이, 남쪽으로는 기름진 동부평야가, 서쪽으로는 프란시스 가문의 땅이 닿아있다. 북쪽에 치우쳐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는 늑대성 영지와 달리 프란시스 가문 영지의 안마당이었다.
로벨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비롯한 남부 영주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이미 반발하고 있지.’
호른 경은 성탑 밖을 내다보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끝내 오지 않았다.
복잡하고 미묘하며 음험하기까지 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각자는 해야 할 일을 충실히 따랐다. 조단 랭스터 경은 벅찬 얼굴로 수염도끼를 뽑았다.
“무, 무슨 짓입니까!”
“저 나으리가! 미쳤나?”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이 식겁해서 마주 무기를 뽑았다. 오해였다. 조단 랭스터 경은 자신의 도끼를 내려다보고 아차! 했다. 아무래도 도끼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호른 경이 한숨을 쉬고 롱소드를 칼집째 뽑아 주었다.
“경의 것이오. 축하선물 셈 치시오.”
조단 랭스터 경은 눈짓을 고마움을 표시하고 롱소드를 뽑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싸우자는 뜻이 아니었다.
“My Lord.”
조단 랭스터 경은 무릎을 꿇고 롱소드를 머리 위로 바쳤다. 일반인은 직접 볼 일이 거의 없는,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누구나 아는 동작이었다.
“제 칼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 뽑힐 것이며, 제 말은 주군을 따르기 위해 달릴 것입니다. 저의 충성을 허락해주십시오.”
가문마다, 지역마다 충성서약이 조금씩 다른데, 랭스터 가문의 서약은 꽤 낯간지러웠다. 로벨은 롱소드를 받아 수직으로 세운 후 아래로 내렸다.
“로드릭 가문의 정당한 주인으로 충성에는 신뢰를, 정의에는 명예를 선물하겠소.”
로벨은 롱소드를 돌려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의 기사 조단 랭스터 경은 일어나시오.”
계산된 행동이라도 감동이 없지 않았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은 폭풍의 탑에서 이루어진 명예롭고 숭고한 맹세였다. 덩치답지 않게 감수성이 풍부한 외팔이 더치와 기사 소설을 즐겨 읽은 마녀 키르케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저기, 아직 이긴 거 아닌데요? 헤르만 백작군이 저기 있는데... 벌써부터 왜 그래요?”
감동이 모자란 것은 아무래도 어린 집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