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48화 (248/605)

248화. 하늘

248화. 하늘

오래된 성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습기 머금은 돌 냄새, 손때 묻은 나무 냄새, 퀴퀴한 먼지 냄새, 오래된 술 냄새, 촛농 냄새... 로벨은 볼탄 반도 남쪽 끝자락에서 고향집의 냄새를 맡고 소리 없이 웃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기사들과 함께 성 밖에 나갔다고 합니다.”

“시내에 있는 건가?”

“지금쯤이면 이곳 소식을 전해 들었을 테니까...”

로벨의 부하들은 로벨처럼 한가하지 못했다. 폭풍성의 병사를 무장해제 시키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무기와 자재를 모아 수성을 준비했다. 그 모든 일을 고작 50명이 해야 했으니 쉴 틈이 없었다.

“헤르만 백작보다 악마추종자가 문제요.”

랭스터 경이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듯했다.

“사악한 마녀가 분명하오. 내 보이는 즉시 목을 칠 것이오.”

호른 경 역시 이빨을 갈았다. 로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들인 이미지가 한순간 날아갔다. 그러나 마녀-악마추종자를 잡을 방법이 요원했다. 얼굴을 모르니 마녀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로벨은 전쟁물자로 채워지는 폭풍의 홀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말했다.

“몰드 헤르만 백작군은 500명이 넘소. 반면 우린 50명이오. 그 점에 집중하시오.”

로벨의 지적에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은 정신을 차리고 현실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켈트 경에게 연락해서 남은 병력을 불러와야 합니다.”

“우리가 온 것을 헤르만 백작이 알아챘으니 도시 밖 경계가 삼엄할 것이오.”

“켈트 경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로벨은 기사들과 작전을 짰다. 사실 작전이라 할 것도 없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군대를 동원할 때까지 폭풍성에서 최대한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폭풍성은 정공법으로 함락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니 정예 50명이면 어중이떠중이 500명은 막을 수 있었다. 다만, 버팅거 시티 외곽에 주둔 중인 울프 용병단 150명과 회색산에 남겨진 광부와 피난민이 조금 걱정이었다. 에릭 공작이 내년 봄으로 출병을 미루거나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면 천하의 로벨이라도 대책이 없었다.

“영주님! 영주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빨리요!”

때마침 식량창고를 점검한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돌아왔다. 표정이 무척 안 좋았다. 로벨은 창고가 텅텅 비었나 걱정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염소가! 염소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많아요!”

“염소? 많으면 좋잖아?”

로벨은 염소도 먹을 수 있나 고민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그게 아니라고 손짓 발짓하다가 그냥 로벨의 손을 잡아끌었다.

“직접 보세요! 아참! 아직 식사 전이죠? 다행이다! 어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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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집사와 마녀가 왜 호들갑을 떨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염소=가축=식량으로 생각한 모자란 상상력을 반성했다.

“...이게 뭐야?”

지하실은 염소 소굴이었다. 정확히는 염소 ‘머리’ 소굴이었다. 얼핏 세어도 100개가 넘는 염소 머리통이 지하창고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뿔이 뾰족한 염소, 수염이 기다란 염소, 눈을 꼭 감은 염소, 눈동자가 사각형인 염소, 어미 염소, 늙은 염소, 새끼 염소...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염소 머리통이 바람 넣은 돼지 오줌보처럼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로벨은 논리적인 가설을 세웠다.

“몸통은 삶아 먹고, 머리만 모은 건가?”

“오호라!”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이 그럴듯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린 집사는 생각이 없는 기사들이 어이없어 빼액-! 소리쳤다.

“머리통을 왜 모아요! 그리고 염소에 한 맺힌 것도 아니고 100마리나 잡아먹겠어요? 여기가 무슨 염소 목장도 아닌데요?”

듣고 보니 정상이 아니었다. 로벨은 정상이 아닌 일을 자주 꾸미는 특수한 직업 종사자를 떠올렸다.

“...제물이야?”

“아마도요.”

마녀 키르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머리가 염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염소가 좀... 괴상하잖아요? 사실 염소 머리인지 물소 머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

“예. 맞아요. 염소를 숭배하고, 경멸하고, 무서워하죠. 그게 중요해요.”

그러한 상상력과 믿음이 마도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로벨은 헤르만 백작을 돕는 악마추종자가 머리 없는 염소여도 놀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산제물을 바치는 것보단 낫네.”

“공포를 끌어낼 수 있다면 제물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어요. 사람이 좀 더 직관적이고, 구하기가... 쉬울 뿐이죠.”

마녀 키르케는 설명을 마친 뒤 자신의 설명에 자괴감을 받았다. 그러나 폭풍성의 정복자 로벨 로드릭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물로 쓰인 거면 먹지 못하겠네? 먹을 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냥 놔두면 썩어서 악취가 날 테니까 태워버리... 음...”

로벨은 말을 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염소 사체지만 그냥 태우기는 아까웠다. 이 전쟁은 로벨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랭스터 경을 힐끔 보았다. 출신 때문인지 처지 때문이지 말똥 묻은 기사치고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

“랭스터 경, 이단신앙에 대해 좀 아시오?”

“...뭐라고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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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성의 비밀통로는 유용하게 쓰였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을 비롯한 볼탄 반도 토박이 3명을 추려서 폭풍성 밖으로 내보냈다. 허풍쟁이 일당은 전쟁통에 어수선한 시장에 숨어들어 소문을 내었다.

“뭐, 호수성 백작이 염소랑 동침한다고?”

“에끼! 염소를 숭배한다고!”

“그걸? 왜?”

“잉그비아 왕국의 이교도가 염소를 섬긴다고 들었는데...”

“하! 미친 거 아니야?”

전쟁의 흉흉함과 내일의 불안함과 허풍쟁이의 주특기-헛소리가 더해지자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때맞춰 헤르만 백작이 대량의 염소를 사들였다는 증언이 나오자 몰드 헤르만 백작이 이단신앙을 가졌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어린 집사는 익숙지 않은 폭풍성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봤자 소문이잖아요? 요즘 같은 시절에 이단심문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이단심문관이 와도 호수성의 백작을 처벌할 수도 없고요. 애당초 우리가 찾은 것은 염소 머리뿐이죠. 볼프 후작처럼 사람을 해친 것도 아닌데...”

로벨은 벽걸이 횃불에 불을 옮기며 설명했다.

“세상 사람은 집사처럼 매몰차지... 이성적이지 않아. 그거 있잖아. 그거... 그 뭐였지?”

“여론이요?”

“아, 맞아.”

어린 집사도 여론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래서 로벨의 전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런 권리도, 의지도 없는 무지몽매한 평민을 선동한다고 무엇이 바뀔까. 그러나 명분을 챙길 줄 아는 랭스터 경의 생각은 달랐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오? 아니면 겁쟁이 동부평야 영주들이오?”

로벨은 예리한 지적에 미소 지었다.

“둘 다요.”

어린 집사는 기사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당황했다.

‘내가? 내가 영주님보다 못하다고?’

막상 내뱉고 나니 불경해서 당황한 와중에 반성까지 해야 했다.

로벨은 마지막 벽걸이 횃불에 불을 붙이고 손에 든 횃불은 머리털을 쥐어뜯는 어린 집사에게 주었다. 어린 집사는 몸종 경력 10년 차답게 횃불을 받자마자 로벨의 앞을 비추었다.

“지낼 만해?”

흔들리는 그림자 너머로 칙칙한 안광이 하나둘 떠올랐다. 어둠에 오래 잠겨있어서일까, 기이하게 조용했다.

“나, 나으리...?”

굵직한 나무 창살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집사가 까치발을 들고 좀 더 깊숙이 비추었다. 그림자가 도망치고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포로가 된 헤르만 백작의 병사들이었다.

로벨은 날렵한 턱을 만지며 포로들과 눈을 마주했다. 몸값을 지불할 여력이 안 되는 가난한 농민병이었다. 운이 좋으면 손가락 하나로 풀려나고, 운이 나쁘면 노잡이 노예로 팔려갈 팔자였다. 오롯이 로벨의 자비심에 달려있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어둠이 고인 감옥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너희를 먹일 식량이 모자라.”

“어이구! 살려주십시오!”

“굶겠습니다요! 제발 죽이지만 마십시오!”

“나으리! 나으리는 천사 아닙니까요? 제발 목숨만은...!”

‘천사?’

어린 집사는 특이한 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로들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로벨의 다리 끄덩이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로벨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느 기사보다 기사다운 랭스터 경은 무지렁이의 무례에 분노하여 수염도끼를 빼들었다. 창살 밖으로 나온 손모가지를 잘라낼 생각이었다. 로벨은 포로와 랭스터 경을 모두 말려야 했다.

“아니야. 아니야. 안 죽여. 너희를 왜 죽여? 랭스터 경? 도끼 좀 치우시오. 그걸 왜 꺼내는 거요?”

로벨은 흥분한 기사와 포로를 진정시키고 간신히 본론을 꺼냈다.

“난 너희를 풀어줄 거야. 전부 고향으로 돌아가.”

처음과 다른 이유로 침묵이 생겨났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감옥 안팎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푸, 풀어준다굽쇼? 진짭니까요?”

“아니, 왜요? 뭘 믿고요? 진짜요?”

어린 집사가 격하게 따져 물었다. 호수성의 영지민이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또다시 징집되어 적이 될 병사들이다. 자비를 베풀더라도 다시는 무기를 잡지 못하게 검지와 중지는 잘라야 했다.

“그럴 필요 없어.”

로벨은 음침한 지하감옥에 어울리지 않게 상큼하게 말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면 돼. 염소와 마녀와 마법 말이야.”

헤르만 백작군 포로들은 믿기지 않는 자비로움에 감격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정말이었어! 옛 신의 천사였어!’

‘염소와 마녀와 천사잖아...’

어린 집사가 기가 막힌 얼굴로 주인과 포로를 보았다. 지금 당장이야 살려줬으니 고마워하겠지만, 3일만 지나도 깔끔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안 그래도 병력이 열세인데, 적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참! 우리 영주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저래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안 되겠다. 내가 더 엄하게 보필해야지.’

어린 집사의 오해와 달리, 로벨의 자비는 순수하지 않았다. 저들의 목격담은 허풍쟁이 일당이 퍼트리는 소문과 합해져 몇 배로, 몇십 배로 증폭될 것이다. 그리하면 몰드 헤르만 백작의 만행이 저 멀리 프란시스 시티까지 닿을 것이다.

‘내가 아는 주군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헤르만 백작은 폭풍성을 잃고, 명예를 잃고, 명분을 잃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배신하여 충성 서약을 철회했다는 헤르만 백작의 정의는 이단신앙 앞에서 가치를 잃었다. 에릭 공작은 옛 신의 이름을 걸고 당당히 기사들을 소집할 것이고, 동부평야 영주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남은 문제는 악마추종자야.’

에릭 공작이 대군을 이끌고 와도 악마추종자가 있는 한 쉽게 이기기 힘들었다. 로벨은 호른 경과 랭스터 경의 원수, 그리고 염소의 원수를 처리할 방법을 고심했다.

그러는 사이 로벨의 의도대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 사악한 이교도 신앙에 빠졌다는 소문부터 잉그비아 왕국의 늙은 마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소문도 퍼져나갔다. 로벨 로드릭 후작의 등에는 세 쌍의 날개가 있으며, 옛 신의 부름을 받아 가끔 하늘로 올라간다는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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