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45화 (245/605)

245화. 기적

245화. 기적

기적을 목도한 사람의 표정은 일상의 언어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행복이나 감동 따위를 넘어서는 영혼의 울림이 얼굴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회색산의 굶주린 사람들은 어제의 걱정과 내일의 불안을 모두 잊고 가장 순수한 기쁨으로 목청껏 기적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기사 나리가 오셨다! 기사 나리가 구하러 오셨다!”

“오오! 영주님! 나의 영주님!”

소금광산의 갱도가 층층이 자리한 절벽 사이로 6, 700명은 되는 사람이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했다. 낯익은 용병도 있고, 깡마른 광부도 있고, 꼬질꼬질한 피난민도 있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갱도에서 사흘 넘게 굶주린 사람들이라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흑흑! 기사 나리! 오실 줄 알았습니다! 오실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시커먼 용병이 모닝스타 앞에 넙죽 엎드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을 씻었다. 감격의 눈물이라 말리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마저 씻기 전에는 누군지도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늙다리 잭슨? 늙다리 잭슨이잖아!”

펄프 대장이 삐쩍 골은 검댕에도 용하게 정체를 알아보았다. 울프 용병단 초창기 멤버 중 하나인 늙다리 잭슨이었다.

“어엇? 들창코 존도 있네?”

“외팔이! 허풍쟁이! 살아있었구나!”

울프 용병단에서 7년 이상 복무한 고참 용병들의 상봉이 이어졌다. 늙다리 존슨처럼 나이 때문에 은퇴한 용병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상 때문에 은퇴한 용병이었다. 소매 한쪽이 허전한 파이크맨과 목발을 짚은 아바레스터의 모습은 싸움개 닥스 이하 신참 용병들에게 괴기한 것이었다.

‘저 꼴이 되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다고?’

‘우리 기사 나으리가 진짜 좋은 사람이었군.’

사실 장애가 아니어도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입술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졌고, 피와 먼지를 번갈아 뒤집어써서 냄새가 지독했다. 열흘 넘게 면도를 못해 수염이 한여름 잡초처럼 자라 있었다. 엉성하게나마 무기와 갑옷을 갖춰서 망정이지, 그조차도 없었으면 부랑자로 알았을 것이다.

“애꾸눈, 먹을 것을 나눠줘.”

애꾸눈 볼포스는 갱도 입구에 모여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힐끔 보았다.

“...전부 줍니까?”

“응. 한 명도 빠짐없이.”

애꾸눈답게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래도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했다.

로벨이 가져온 식량은 많지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 조달하거나 종군상인을 고용해서 공급받을 생각이었기에 당장 필요한 식량만 가져왔다. 로벨은 ‘먹을 거다!’, ‘우리도 주시오!’, ‘줄을 서라! 줄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처럼 말했다.

“종군상인도 못 오겠지?”

“페닝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보다 좋진 않을 테니까요.”

어린 집사가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로벨은 생각지 못한 난관에 눈썹을 한곳으로 모았다.

내일의 일을 고민하는 것은 로벨과 로벨의 측근뿐이었다. 사흘 만에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본 피난민과 그런 피난민을 통제하는 울프 용병단은 오늘의 일을 처리하기도 바빴다.

로벨은 비스킷 한 조각에 환하게 웃는 젊은 아낙과 딸아이 모습에 억지로 미소 지었다.

“먼 길 왔으니까 조금은 쉬자. 여기 사람들도 배불리 먹고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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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의 수뇌진은 늙다리 잭슨을 통해 전황을 보고받았다. 기대한 것보다 좋은 것도 없고, 고심한 것보다 나쁜 것도 없었다.

“100명 정도 되는 부대가 이틀 연속 공격해 왔습니다요. 버팅거 시티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대비하고 있었지만, 진짜 쳐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요. 여기는 기사 나리의 봉토 아닙니까요.”

“나도 설마 했어. 그래서?”

“광부들과 함께 갱도에 숨었지요. 그리고 땅거미가 지면 몰래 나가 골려주었습니다요.”

“갱도에서? 위험하지 않아?”

“소금 찾으려고 파놓은 구멍이 수십 곳이라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요. 우리 집 마당에서 싸우는데 기사고 용병이고 별수 있습니까요. 사흘쯤 혼내주니까 질려서 도망가더군요.”

늙다리 잭슨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나 오래 웃지 못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요. 하루도 아니지요.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요. 산 아래 큰불을 보았습니다요. 한두 곳이 아니었죠.”

“...마을을 불태웠군.”

“예예. 맞습니다요. 해가 뜨자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요. 우리의 이웃이고, 광부의 가족이라 차마 내쫓을 수 없었지요.”

그 뒤는 로벨도 알고 있었다. 수백 개로 늘어난 입이 얼마 안 되는 광산의 식량을 바닥냈을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그나마 멀쩡한 용병이 하산했는데,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산 중턱에서 생포한 포로의 말과 맞아 떨어졌다.

“굶겨 죽일 생각이었어.”

“너무 잔인해요.”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기사 소설과 역사책을 즐겨 보아 전략과 전술에 밝은 마녀지만, 막상 현실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사시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로벨은 늙다리 잭슨의 어깨를 다독이고 말했다.

“그동안 잘 버텨줬어. 이제 내가 처리할게.”

늙다리 잭슨의 얼굴이 스르륵- 녹았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순례자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감춰온 죄를 고해성사한 수도승 같기도 했다.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던 모양이다.

늙다리 잭슨이 작전 회의실을 나가자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어떻게 처리해요?”

“...글쎄?”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심지어 호른 경과 켈트 경까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 쉬었다. 로벨은 괜스레 무안해서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적군이 100명이라고 했지?”

“지금은 좀 줄어서 80명이요.”

“그럼 후퇴했을 거야.”

로벨은 단정 지었다. 로벨이 울프 용병단 본대를 이끌고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전술’을 생각할 줄 아는 적 지휘관은 망설임 없이 버팅거 시티로 철수했을 것이다. 외팔이 더치가 잘됐다는 듯 외쳤다.

“그럼 이 틈에 사람들을 데리고 빠져나가시죠?”

“안 돼.”

“안 돼요!”

펄프 대장 외 모두가 반대했다. 어린 집사가 눈꼬리가 올리고 말했다.

“그러면 회색산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거예요. 전쟁에서 이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지거나, 덜컥 휴전이라도 하면 회색산은 헤르만 백작에게 넘어가요. 훗날 협정에서도 불리하고요.”

펄프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허나, 식량이 없으니 버틸 수도 없잖소. 우리 용병단만 230명이고, 광부와 주민을 더하면 900명이오. 내일까지 먹이고 나면 모레에는 소금이나 핥아야 할 거요.”

‘철수할 수 없다’와 ‘버틸 수 없다’가 나뉘어서 언쟁을 시작했다. 의미 없는 말싸움이었다. 최종결정권은 어차피 로벨에게 있었다. 호른 경이 어린 집사와 늙은 용병을 조용히 시키고 로벨을 바라보았다. 자연히 다른 시선도 로벨을 향했다.

로벨은 컨틀렛을 풀고, 속장갑까지 벗으며 말했다.

“남아도 안 되고, 돌아가도 안 되면, 남은 것은 하나잖아?”

“...예?”

“그게 뭔 말입니까요?”

로벨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마녀 키르케뿐이었다. 마녀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 외 모두는 마녀보다 못하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어린 집사가 앓는 소리를 내다 결국 질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질문을 발언권이 없어 침묵하는 떠돌이 기사에게 돌렸다.

“조단 랭스터 경, 경은 동부 출신이니 이곳 사정에 밝지 않소?”

“그렇소만...?”

로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경에게 200명의 정예 용병이 있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공격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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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고, 최고의 병참은 적의 보급품이다.

로벨은 늑대성에서 세운 전쟁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회색산을 벗어나 드넓은 동부평야를 횡단했다.

‘보룬 성은 동부평야의 입구이자 교역로요. 버팅거 시티로 흘러가는 물자가 모두 이곳을 지나가니 가장 먼저 차지해야 할 것이오.’

병력을 통솔하는 것은 로벨이지만, 길을 안내하고 작전을 수립하는 것은 조단 랭스터 경이었다. 지난 7년을 벼르고 별렀다는 말대로 온갖 작전이 짜여 있었다. 로벨은 속 편하게 시키는 대로 따랐다.

“누구냐!”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것이...”

로벨은 허리에서 아론다이트를 스르륵- 뽑았다. 달밤에 부끄럼 없이 드러나는 새하얀 칼날이 뇌쇄적이었다.

“...가만, 대답하면 바보잖아?”

보룬 성 초병은 공명심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손에 든 바디슈를 버리고 벽에 걸린 비상종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로벨 혼자가 아니었다. 팡-! 파팡-! 크고 강한 아바레스트의 시위가 일제히 튀었다.

로벨 좌우에서 굵은 철제 쿼럴이 쏘아져 비상종을 향해 달려가는 초병을 마구잡이로 두드렸다. 쇼크가 온 건지, 폐에 구멍이 났는지 비명이 없었다. 로벨은 최선을 다한 보룬 성 경비병을 말없이 위로한 후 성큼성큼 성 안으로 걸어갔다. 저승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전우가 많이 따라갈 테니까.

“거, 누군데 소란을... 히익-!”

성벽 뒤에서 졸던 경비는 외팔이 더치가 던진 손도끼에 유명을 달리했다. 로벨은 멋지게 뽑았지만 쓸 일이 없는 아론다이트를 멋쩍게 늘어트리고 성 안을 계속 걸어갔다.

소란은 로벨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갔다. 성 안에 머물던 보룬 성 영지민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영주가 고용한 용병은 무장과 숫자를 비교한 후 일사불란하게 도망쳤다. 충성심과 공명심이 과한 일부 병사가 로벨을 기습했으나 애꾸눈의 눈보다 빠르지 못했다. 하지만 시시껄렁한 용병과 허약한 농민병만 수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놈들! 정체가 무엇이냐! 페르젠 가문의 떨거지냐!”

강철을 두른 기사가 앞을 막아섰다. 급하게 갖춰 입고 나왔는지 풀 플레이트가 아니라 하프 플레이트 차림이었다. 헬름도 없고, 스커트도 없었다. 컨틀렛도 오른손만 겨우 착용했다.

“보룬 성의 지휘관이오?”

로벨은 지금껏 걸어온 속도를 그대로 보룬 성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는 얼굴형이 변할 만큼 억세게 어금니를 깨물고 롱소드를 치켜들었다.

“나는 보룬 가문의 장남! 솔트 보룬이다! 기사라면 가문을 밝혀라!”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오.”

“머, 뭐? 이런!”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일직선으로 뻗어 갔다. 보룬 경도 롱소드를 마주 그었지만 1초쯤 늦었다.

아론다이트의 새하얀 칼날이 보룬 가문의 차기 후계자 이마를 쪼개었다. 그리고 까마득한 시간 뒤에 보룬 경의 롱소드가 로벨의 어깨에 닿았다. 깡... 궁색 맞은 울림이 울렸다. 보룬 경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그대로 허물어졌다. 우당탕-! 땡그르르...! 제대로 잠그지 않은 플레이트 아머 파츠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핏물을 옆으로 뿌리고 때늦은 충고를 했다.

“아무리 급해도 투구는 꼭 쓰고 나오시오.”

로벨은 뿌듯한 심정으로 아군을 돌아보았다.

통나무로 위장해놓은 보룬 성 남동쪽 측문으로 100여 명의 울프 용병단이 쏟아져 들어왔다. 페르젠 백작군이 패퇴한 후 마음을 놓은 보룬 성 수비병은 늑대들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쓸려갔다. 로벨의 치른 수많은 공성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쉬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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