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소각
244화. 소각
자고로 연회를 열면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다음 해가 뜰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전통이고 관례였다. 아침이 밝아 올 때 술에 절어 인사불성인 손님을 마차에 실어 보내야 잘 대접한 파티가 되는 것이다.
로벨은 ‘예의’와 ‘법도’를 아는 기사가 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초저녁에 잔칫상을 물렸다. 다행히 실망하는 상인은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상인이 많았다. 돈 냄새를 맡았으니 로벨이 붙잡아도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헤르만 백작이 무슨 수로?”
로벨은 몰드 헤르만 백작을 제법 잘 알았다. 선대인 볼트 헤르만 백작보단 낫지만, 결코 전쟁영웅이 될만한 작자는 아니었다. 로벨은 자신이 아는 가장 뛰어난 전술가를 떠올렸다.
‘그 짧은 시간에 700명이나 되는 페르젠 백작군을 섬멸하고, 동부평야 대부분을 점령한다고? 주드 맥켈런 남작도 불가능한 일이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지내온 세월이 있으니 나름대로 재주가 있긴 하겠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700명의 대군을 단숨에 격파할 재주라 생각되진 않았다. 어린 집사가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죠? 봉신들을 소집할까요?”
“안 올 거야. 못 오거나.”
초봄에 전쟁을 치렀는데, 해가 바뀌지도 않아 초가을에 또다시 전쟁을 치를 수 없었다. 특히 가시성, 바위성, 호른성 등은 피해가 커서 동원할 병력도, 재정도 부족했다. 의무종군일이 끝났으니 강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뿌린 거였죠... 에이잇! 멍청한 공작님! 무능한 백작님! 처음부터 힘을 합쳐서 호수성을 압박하면 좋았을 텐데!”
어린 집사가 툴툴거렸다. 로벨은 차마 주군을 욕할 수 없어 화제를 돌렸다.
“전쟁은 안 돼. 적어도 내년 봄까진 안 돼.”
“그럼 어떡해요? 공장에다 광산까지 잃었는데, 그냥 참아요?”
“그것도 안 돼. 봉신들과 상인들이 실망할 테니까. 아, 그래. 그럼 되겠다.”
로벨이 손가락을 튕기며 결단을 내렸다.
“회색산으로 가자.”
“어어? 전쟁인가요?”
“아니야. 아니야. 울프 용병단만 데리고 갈 거야. 회색산을 되찾고, 소금광산만 지키는 거야.”
호수성과 버팅거 시티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땅에서 수비만 하겠다는 뜻이다. 어린 집사가 당연한 의문을 던졌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 전군을 이끌고 영주님을 공격하면요?”
“산 위에서 수비하면 쉽게 안 당해. 장미성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우린 버티기만 해도 충분하고. 정 안 되면 내 사람을 챙겨서 도망치지, 뭐.”
말처럼 쉬울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가장한 실리와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할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영주님... 이제 정말 다 컸군요.”
“으응? 원래 내가 더 컸잖아? 지금도 크고.”
“...키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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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무장시키고, 회색산까지 행군할 식량과 자재를 준비시켰다. 긴급한 출정이라 약간의 징발이 있었지만, 영지민의 반발은 크지 않았다. 도리어 가진 것을 먼저 내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 수레가 바퀴를 새로 달아서 튼튼합니다요. 이놈으로 가져가십쇼.”
“잠깐! 잠깐 기다리라니까! 저 닭도 잡아서 줄 테니까!”
늑대성의 영지민은 봄에 이어서 또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 영주님을 걱정했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시겠지?”
“그야 당연하지! 우리 영주님이 어떤 분인데!”
“옛 신이여, 우리 영주님을 보살펴주소서...”
로벨은 도로가에 몰려나와 무릎 꿇고 기도문을 읊조리는 농부들을 안쓰럽게 보았다. ‘무릎 아플 텐데...’ 그러나 자상한 영주님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큰 듯했다.
기사들은 소집하지 않았지만, 세 명의 기사가 로벨을 따르기 위해 출정 당일 찾아왔다.
“결국 본인의 말대로 되었지 않소! 으하핫! 지난 7년 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소!”
한 명은 여름내 지미와 루시 여관에서 숨죽이고 지내던 조단 랭스터 경이었다. 갑옷으로 보나 휘하병력으로 보나 부유한 기사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때 명문이라 불린 랭스터 가문의 기사였다. 어쭙잖은 용병 열 명보다 나았다.
“우리의 주군이오. 경의를 표하시오.”
또 한 명은 호른 성의 패트릭 호른 경이었다. 붉은 산 전쟁에서 잃은 병사를 보충하지 못해 기사 종자와 수행원만 데리고 합류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저자의 주군은 아니지. 그냥 두시오.”
마지막 한 명은 바위산의 켈트 경이었다. 랭스터 경처럼 공적이 필요한 것도, 호른 경처럼 충성심이 강한 것도 아니라, 세 명의 기사 중 가장 의외였다. 어린 집사도 의아해서 슬그머니 떠보았는데, 켈트 경의 대답은 솔직했다.
“빚을 졌으니 갚아야지.”
로벨이 몸값을 빌려준 것에 나름대로 보답하는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켈트 경다웠다.
이렇게 울프 용병단 220명, 기사와 수행원 12명, 그리고 로벨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까지 총 235명이 축복과 걱정 속에 회색산으로 출발했다. 가을을 알리는 노란 낙엽이 떨어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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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산으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와 눈 감고도 지나갈 익숙한 지형 때문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펄프 대장이 나이를 핑계로 수레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먼저 신세 지고 있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살짝 당겨 수레 가까이 붙었다.
“옛날?”
“영주님과 처음 출정했을 때 말입니다. 그때도 이 길로 갔지요.”
로벨은 기억을 뒤적여서 후계자 전쟁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고작 13명의 신출내기 용병단을 이끌고 팔콘 요새를 점령하고, 회색산에 올라 늑대의 왕과 싸웠다. 그리고 오늘은 회색산을 지키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랬지. 그랬어.”
로벨과 펄프 대장은 가난하고 서투르던 시절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행군은 빠르지 않아도 안정적이었다. 큰 숲과 넓은 강은 피하면서 보급이 용이한 마을을 찾아 아낌없이 페닝을 풀었다.
하루는 돼지 치는 마을에서 우람한 수퇘지 다섯 마리를 잡아 고깃국을 배불리 먹고, 하루는 벌목하는 마을에서 수레를 다섯 대 사들여 지친 용병의 짐을 덜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를 가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볼탄 반도 남쪽에서 로벨 로드릭과 울프 용병단의 평판은 아주 좋았다. 수시로 도적을 소탕하고, 때때로 악랄한 영주를 징벌하며, 고결한 깃발로 자유민과 상인을 지켜주니, 자신의 영주보다 로벨을 좋아하는 영지민이 많았다. 게다가 페닝을 아낌없이 쓰며 물자를 사가니 싫어하려도 싫어할 수 없었다.
첫눈처럼 하얀 백마 위에서 세공이 아름다운 갑옷을 입고 도도하게 마을을 굽어보는 로벨의 모습에 감탄한 영향도 있었다. 로벨을 옛 신의 사자라 부르며 조아리는 노인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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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에서 출발한지 아흐레 되는 날,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회색산 초입에 도착했다. 여름 내내 전쟁 소식이 들려온 곳이라 어떨지 걱정했는데, 소문보다 더했다.
“이건 좀 심한데?”
회색산 아래의 작은 산림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 후계자 전쟁 때, 그리고 회색산의 소금광맥을 찾을 때 신세 진 마을이었는데 전란을 피하지 못하였다.
“이곳 주민이 200명쯤 되었는데...”
로벨은 마을 입구에 울프 용병단을 대기시키고 어린 집사와 호른 경만 대동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있는 것은 쥐와 구더기밖에 없었다. 공격받은 지 수일이 지났는지 잿더미까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러나 참상을 가려줄 만큼 오래되지는 않았다. 창칼에 찔리고 불에 그슬려서 오그라든 시신이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중에는 3, 4살 난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나 참담하여 어린 집사마저 분노했다.
“어떤 놈이 진짜! 용서할 수 없어요!”
호른 경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가리고 말했다.
“시체는 50구 정도입니다. 불을 먼저 질렀으니 실내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응.”
로벨은 한참 뒤에 호른 경 말을 이해했다. 100명 이상의 주민이 어디론가 대피했다. 아니, 습격자가 보내주었다. 어디로 갔을지는 뻔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안전한 곳은 울프 용병단이 주둔하는 소금광산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요? 왜요?”
소금광산에 주둔 중인 울프 용병단은 31명이었다. 나이가 많고 몸이 불편한 용병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렇게 될 때까지 살아남은 노련한 용병이기도 했다. 게다가 억센 광부들이 함께 있으니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회색산을 점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인근 마을을 소각해서 물자보급을 끊고, 피난민을 보내서 전의를 상실시키는 거야.”
로벨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성전에서 흔히 쓰는 전술이었다.
“그럼 회색산은 아직 무사하겠군요!”
어린 집사가 불행 중 다행이란 듯 웃었다. 그러나 로벨과 호른 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주변을 소각했으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할 겁니다. 소금광산이니 소금은 풍족하겠지만, 소금으로 배를 채울 수 없지요.”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보름치입니다. 그러나 회색산에 피난민이 수백 명이라면 사흘을 못 버틸 겁니다.”
회색산에서 수비만 한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졌다. 로벨은 잿가루 날리는 폐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사흘이라도 먹여야지. 출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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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산 곳곳에 몰드 헤르만 백작군이 주둔 중이었다. 그러나 병력은 10명에서 15명으로 소대 규모도 안 되었다. 로벨의 깃발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는데, 호른 경이 전투마를 몰아 두어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산 아래에서 끔찍한 것은 보고 난 뒤라 심문은 거칠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저, 저희는 그냥 시킨 대로, 시킨 대로 한 것뿐입니다요!”
“누가, 무엇을, 왜 시켰는데?”
고차원적인 심문기술은 필요하지 않았다. 얼굴을 한 대 때릴 때마다 정보가 술술 나왔다. 그리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몰래 빠져나오는 회색산 병사를 사살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열흘째 주둔 중이며, 세 명을 사살했다는 내용까지 모두 자백했다.
“우리가 안 왔으면 말라죽었겠군요.”
“그렇게 바보들은 아니야. 항복했겠지.”
정상적인 용병이라면 진즉에 항복했어야 옳다. 그러나 회색산의 울프 용병단은 늙고 병든 주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로벨이 구하러 올 거라 믿은 것이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속닥였다.
“충분히 멍청한데요?”
“실제로 구하러 왔잖은가. 똑똑한 것이지.”
마지막 고용주에 대한 충성. 퇴물이 된 용병을 내치지 않은 보답. 훗날에 더 큰 보상...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기대에 부응할 순간이 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낚아채며 산악행군에 지친 울프 용병단을 격려했다.
“가자! 우리의 형제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