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성공
243화. 성공
로벨은 조단 랭스터 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은 중장년인데, 갓 서임 받은 20살 기사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안 될 말이오.”
“무엇이 아니되오?”
로벨은 의자등받이에 허리를 묻고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곳은 나의 주군인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봉신들에게 하사한 땅이오. 함부로 탐할 수 없소.”
“이미 탐하는 자가 있지 않소?”
몰드 헤르만 백작. 로벨은 버팅거 시티를 차지하고 공공연하게 약탈을 자행하는 호수성의 주인을 떠올렸다.
“호수성이 아니어도 동부지방 영주들이 실력행사에 나셨소. 잡아먹고 잡아먹히다가 가장 센 놈이 제2의 랭스터 백작이 될 것이오. 그걸 경계해서 동부질서를 바로잡겠노라 선언한 것이 아니었소?”
로벨은 고깔모자로 부채질하는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았다. ‘그런 거야?’ 마녀는 로벨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고깔모자를 흔들었다. ‘아니구나.’ 로벨은 다시 랭스터 경을 보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오.”
조던 랭스터 경은 말없이 로벨을 보았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가진 것은 말 한 필과 기사 종자 한 명. 그리고 약보다 독이 될 때가 많은 랭스터 가문의 피뿐이었다. 수백 명의 군대와 수천 명의 영지민을 거느린 제후와 거래하기에는 가진 패가 빈약했다. 그렇지만 기사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후작은 결국 동부로 가게 될 것이오. 이곳에 머물며 그때를 기다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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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랭스터 경의 기대는 깨끗이 빗나갔다. 동부평야의 크고 작은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더 나아가 버팅거 시티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은 기존 500명의 병사에 추가로 200명의 용병을 고용한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었다.
“그쪽도 지갑사정이 안 좋을 텐데요? 어떻게 용병을 200명이나 고용했을까요?”
“글쎄...? 사트로 시티 상인들한테 빌리지 않았을까?”
아무튼 파도성이 먼저 나선 이상 로벨이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로벨은 좋아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 고민하다가 골치가 아파오자 덤덤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내버려두자.”
로벨은 어떤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사실은 애초에 군사를 움직일 생각도 없었다. 싸울 것처럼 소문을 낸 것도 싸우기 싫어서였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 마일 떨어진 에릭 공작은 로벨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였구나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할 상황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장차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로벨을 탈 없이 억제했고, 로벨은 화살 하나 소모하지 않고 하버트 페르젠 백작을 통해 버팅거 시티 일을 보복하게 되었고,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비밀스러운 후원 아래 무명을 떨칠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이 가을이 오기 전에 승리만 하면, 호수성의 음흉한 기사와 고향 잃은 떠돌이 기사 외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내가 꼭 만나야 해? 어차피 상회장이 처리할 거잖아?”
“어허! 어허! 로드릭 상회의 주인은 영주님이에요. 신참 얼굴은 봐야죠! 예의와 신뢰 문제라고요!”
“진상품 문제가 아니고?”
“힛! 그것도 있고요.”
로벨은 여름이 저물어가는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영내 인구가 늘어난 만큼 송사가 한 가득이었다. 시장 상인의 소송은 농부의 소송보다 다양하고 복잡하여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도 골머리를 썩일 때가 많았다.
고층건물을 계속 짓다보니 벌목과 채석도 문제가 되었다. 북쪽 숲과 바위산 채석장은 영주의 사유지라 건축자재를 구할 때마다 허가를 내주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기사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검술, 창술, 승마술 등을 꾸준히 훈련하고, 무기와 갑옷도 틈틈이 광을 내었다. 랜스도 열 자루나 새로 장만했다.
오늘은 로드릭 상회에 새로 소속된 외지 상인들을 만나기 위해 깨끗한 예복을 차려입었다.
로벨을 기다리게 할 수 없는 상인들은 벌써부터 성 앞에 모여 웅성웅성 소란을 피웠다. 규모가 상당하고, 가져온 진상품-뇌물도 대단했다. 어린 집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렇게 좋아?”
“물론이죠!”
세금과 교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풍족해서 과거처럼 몇 푼 안 되는 진상품에 목맬 필요가 없는데, 어릴 적 습관인지, 공짜라 마냥 좋은 건지 상납 받을 때마다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로벨이 자리 잡고 앉자 아야와 이야카가 자연스럽게 좌우에 따라 앉았다. 그리하면 저녁에 잘 익은 양다리 한 짝씩 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해 알고 있었다.
어린 집사는 목을 가다듬고 성문을 지키는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그리고 성 밖에 대기 중인 로드릭 상회의 새로운 식구에게 알렸다.
“차례로 들어오시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돈 자루를 굴리는 상인들이 들어왔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를 잇는 북부대로를 장악하고, 노스폴드 시티, 사트로 시티, 프란시스 시티의 상권을 야금야금 먹어가는 로벨 로드릭의 기세는 왕국 상인들 사이에서 대단한 화제였다. 철밥통을 깔고 앉은, 혹은 철밥통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은 기사가 이만한 수완을 보이기 힘들기에 더욱 그러했다.
‘성은 별 볼 일 없는데?’
‘4, 5년 전만 해도 그냥 시골이었다니까.’
대도시에서 대영주를 상대해온 부르주아들은 늑대성과 늑대성의 주인 모습에 살짝 실망했다.
증축과 개축을 반복했지만, 기본 골조는 300년 전의 목재성이었다.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한 메인 홀도 천장이 낮고 기둥 간격이 촘촘해서 두 자릿수 사람이 들어오면 어딘가 답답했다. 영주가 앉은 의자도 시골 농부가 주물럭거린 듯 볼품없었다.
거기다 ‘무적무패’라 소문난 기사도 계집처럼 곱상하니 위엄이 없었다. 수염이 없어서 그런지 실제 나이보다 4, 5살쯤 어려 보였다. 철부지 기사와 철없는 귀부인이 좋아할 외모지만, 닳고 닳은 상인에게 믿음을 주기는 어려운 외모였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것은 송아지만한 회색 늑대와 무장이 훌륭한 울프 용병단이었다.
“보르도에서 온 보르도 상인 대표 콘리스 폴린입니다. 고귀한 분을 뵙습니다.”
“블랙워터에서 온 잭 글리스 상단주입니다. 존엄한 후작님을 뵙습니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상인들이라 가져온 선물도 대단했다. 인어의 바다 남쪽의 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 풍경화부터 같은 무게의 황금과 맞바꿀 수 있다는 샤프란 자루까지 볼탄 반도에서는 구경도 못할 사치품이었다.
로벨은 물건의 가치를 몰라서 건성으로 저쪽에 놓으라 말했지만, 어린 집사는 기대 이상으로 화려한 진상품에 기뻐하며 목록을 작성했다. 상인들도 로벨보다 로벨의 측근에게 관심을 가졌다.
‘저자가 늑대성의 귀재로군.’
‘소문보다 더 젊은데?’
‘그 소문이 절반만 진실이어도...’
사흘에 한 번씩 전쟁이 일어나는 포비아 왕국에서 재산을 불린 상인들이었다. 눈치는 기본이고, 판단력까지 우수했다. 로벨은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고, 어린 집사는 친하게 지내야 할 대상임을 금방 파악했다.
“영주님이 먼 곳에서 찾아온 여러분의 노고를 풀어드리고자 조촐한 연회를 준비했어요. 들여오세요.”
어린 집사가 손뼉을 치자 찰드 촌장이 보낸 마을 청년과 헨리 피터 상회장이 보낸 일꾼이 음식과 테이블을 가지고 홀로 들어왔다. 여러 번 한 일이라 순식간에 연회준비가 갖춰졌다.
‘정말 조촐하군.’
‘쉿! 쉿!’
로벨의 직위에 비하면 확실히 간소하긴 했다. 광대도 없고, 음악도 없고, 귀부인도 없었다. 그래도 술과 고기는 말단 일꾼까지 모두 배불리 먹을 만큼 준비했다. 감탄은 못 해도 만족은 할 수 있었다.
로벨은 지난 수일간 벼르고 벼르던 일이 끝나자 기쁜 마음으로 델 포니산 와인을 원샷했다. 에르나 왕국식 ‘교양’을 강조하는 몇몇 상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정통적인 기사 문화에 젖어있는 대다수 포비아 왕국 상인은 ‘사내답다’, ‘기사답다’ 칭송했다. 로벨은 술기운이 올라 헤프게 웃으며 마음껏 즐기라 권유했다. 그리고 실속 있는 상인들과 친목을 다지는 어린 집사를 흘겨본 뒤 주방으로 이어진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어? 기사 나리?”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복도에 흉내쟁이 퍼시발 외 울프 용병단이 옹기종기 모여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고 있었다.
“이크! 숨겨! 숨겨!”
“저, 저는 말렸습니다요!”
울프 용병단은 주방의 음식을 훔쳐 먹다 걸려 당황했다. 로벨은 닭인지 오리인지 모를 뼈들을 힐끔 보고 한소리 했다.
“저 안쪽에 맥주도 있어. 어린 집사는 바쁘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먹어.”
“크흐흑! 역시 우리 기사 나리!”
“정말 감사합니다요!”
로벨은 조용히 마시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고 주방을 지나 뒤뜰로 나갔다.
“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기가 막히게 로벨을 찾아왔지만, 양다리를 하나씩 물려주자 달려온 속도로 사라졌다.
“휴우...”
로벨은 우물가에 앉아 나지막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성벽 위 보초가 못 본 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신이 없네.”
로벨은 성 그림자와 대비되어 유난히 맑고 화창하게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조각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힘차게 날갯짓 하는 새들이 바람을 거슬러 올라갔다. 먼 곳에서 상인과 용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배부르고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로드릭 가문은 로드릭이란 성(姓)을 물려주기 시작한 이래 가장 성공했다. 로벨은 자신의 대에서 이룩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긴 머리를 자르고 무거운 갑옷을 입었을 때 걱정하고 질책했을 아버지와 오라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제가 가문을 일으켰어요. 보세요. 자랑스럽지 않나요?’
“이대로 조용히 지내면 될까...”
지난 8년을 격동적으로 보낸 탓일까, 아직도 한창 때 나이지만, 삶의 무게에 지친 노(老)기사처럼 느껴졌다.
‘볼프 후작은 한동안 침묵할 테고, 마도의 수호자도 의외로 얌전하니, 버팅거 시티 일만 정리되면...’
그때, 성 안에서 소란이 전해졌다. 웃고 떠드는 소란이 아니라 놀랐을 때 나오는 어수선한 소란이었다.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문을 바라보았다. 로벨을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펄프 대장과 어린 집사가 뒤뜰로 나왔다. 심각한 일이 분명했다. 바위처럼 딱딱한 표정도 표정이지만, 고기와 술을 훔쳐 먹는 용병들을 그냥 두고 나왔다는 것이 증거였다.
“영주님, 안 좋은 소식입니다.”
“뭐가?”
어린 집사가 빨리 말하라고 펄프 대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펄프 대장이 굵은 침을 삼키고 말했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군이 버팅거 시티에서 대패했습니다.”
“아, 그래?”
로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소란 피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펄프 대장의 보고는 끝나지 않았다.
“포로가 된 페르젠 가문 기사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사주를 받았음을 자백하였고, 그것을 빌미로 몰드 헤르만 백작이 충성서약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젠 백작이 점령한 동부지역을 차례로 점령 중인데... 그... 영주님의 회색산도 공격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