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동부질서
242화. 동부질서
소문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제멋대로 커지고, 종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로벨 로드릭 후작이 버팅거 시티의 무자비한 약탈 사건에 대노하여 프란시스 가문과 페르젠 가문의 병사를 총동원해 호수성을 공격할 거란 소문이 볼탄 반도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성을 가지고 의심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로드릭 가문이 프란시스 가문의 봉신이며, 붉은 산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그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자극적인 소문에 취한 대다수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로드릭 후작님이면 금방 전쟁을 끝내겠지?”
“암만. 이놈의 전쟁이 끝나야 농사를 짓지.”
볼탄 반도 주민들은 로벨 로드릭 후작이 몰드 헤르만 백작 이하 군소 파벌들을 제압해 길고 긴 전쟁을 끝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도, 페르젠 ‘주니어’ 백작도 로벨과 손잡을 생각이 없었다. 로벨이 버팅거 시티까지 차지하면, 로벨의 힘은 프란시스 가문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로벨의 편지에서 세 번이나 거론된 단어에 집중했다.
“동부질서라...”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북쪽은 로벨이, 남쪽은 에릭 공작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후계자 전쟁 때 갈기갈기 찢긴 동쪽 구(舊) 랭스터 백작령은 군소영주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볼프 후작이 쳐들어올 때마다 덩굴성을 지나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에릭 공작의 충직한 수행기사가 차분히 말했다.
“생긴 것과 달리 영악한 구석이 있군요.”
“이름 없는 시골 장원을 왕국의 손꼽히는 세력으로 성장시킨 친구야. 싸움만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
로벨의 아랫사람들이 들었으면 애매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을 것이다.
에릭 공작은 마호가니로 만든 최고급 책상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어려운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도 문제지만, 로벨 로드릭 백작도 문제야. 커도 너무 컸어.”
수행기사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공작의 아랫사람이라 주인이 의심 많은 것은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로벨 로드릭 백작은 공작의 가장 충성스러운 봉신이었다. 로벨 백작을 의심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의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에릭 공작은 수행기사의 걱정을 읽은 듯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로벨 백작은 믿을 만해. 그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모두가 배신할 때도 홀로 맹세를 지킨 명예로운 기사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천년만년 살 것은 아니잖은가? 누군가는 저 광활한 토지와 강성한 군대를 물려받을 텐데, 그자가 우리 가문을 적대한다면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이었다. 개인의 명예와 친분보다 가문을 위해 결정해야 했다.
“동부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로드릭 가문이 관여해서는 안 돼.”
“그 말씀은...”
에릭 공작은 결심을 굳힌 듯 종이와 잉크를 끌어왔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솜씨를 한 번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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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볼탄 반도 곳곳에 오해와 갈등을 뿌려놓은 로벨과 그 일당은 노랗게 익어가는 밀알만큼이나 깊어지는 여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어허, 발동작 봐라! 얼씨구? 고개 안 들어?”
“상큼한 포도! 달콤한 포도! 보르도 지방에서 막 가져온 신선한 포도 사세요!”
“엄마! 쟤 흙 먹어!”
영지민, 상인, 용병, 양치기, 소와 말까지 더위를 피해 그나마 찬바람이 부는 개울가로 나왔고, 개울 주변은 때 아닌 북새통을 이루었다.
상류에서는 울프 용병단이 체력단련 중이고, 그 아래에서는 사내아이들이 발가벗고 물놀이 중이며, 좀 더 내려가면 소와 양이 사이좋게 누워서 강바람에 구슬프게 울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상인이라, 과일상인, 술상인, 돗자리 상인이 천막까지 치고 장사판을 벌였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위치한 로드릭 마을이라 가능한 풍경이었다.
“저거 장사 잘 되네요. 자릿세를 따로 받아야겠어요.”
“으이그!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군요!”
“세금을 걷는 것은 영주의 정당한 권리에요. 세금을 내는 것은 영지민의 당연한 의무고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개울에 발을 담그고 말다툼을 벌였다. 매일 싸우면서도 맨날 붙어 다니는 것이 싸우다 정든 모양이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로벨은 모닝스타 등에 물을 끼얹고 브러쉬로 옆구리와 배를 빡빡 긁어주었다. 모닝스타는 기분이 좋은지 입술을 뒤집고 ‘푸르뤼륑-!’ 하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저 남쪽에서는 칼바람이 몰아치는데, 여기는 축제라도 벌일 판이군요.”
“주인을 잘 만나는 것이 무지렁이의 복이지.”
로벨은 모닝스타를 빗질하다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모닝스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체구가 다부진 종마를 타고, 어깨주름을 과하게 잡은 더블릿을 입은 중년 기사와 종마의 고삐를 잡고 길을 인도하는 젊은 종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로벨은 본능적으로 무장을 확인한 후 별 볼 일 없자 관심을 끊었다. 예의를 아는 기사라면 늑대성으로 찾아올 테니, 그때 인사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중년 기사의 생각은 달랐다.
“여봐라, 이리 좀 와 보거라.”
중년 기사가 큰 소리로 로벨을 불렀다. 로벨은 너무나 당연히 자신이 아니라 생각했다. 포비아 왕국에서 로벨을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세 사람뿐인데, 셋 중 저렇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네 이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로벨은 고함이 몇 번 오간 뒤에 비로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나? 나 말이오?”
“여기에 네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그러나 금방 이해했다. 모닝스타를 씻기기 위해 부츠와 쇼오스를 벗고, 우플랑드 소매를 바짝 올렸다. 복장으로 기사 신분을 알릴 길이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기사’라면 수행원을 노닥거리게 놔두고 직접 말을 씻길 리 없으니, 모닝스타를 빗질하는 로벨을 기사의 몸종이나 서임 받지 못한 기사 종자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로벨은 상대방의 명예를 위해 점잖게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본인은 늑대성의 영주인 로벨 로드ㄹ...”
“나도 알고 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의 몸종 아니냐! 이런 깡촌에 그런 명마를 가진 기사가 또 있겠느냐!”
종자 시절 사람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면 큰코다칠 거란 가르침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슬며시 만졌다. 기사에 대한 모욕으로 봐야 할지, 외지인의 실수로 봐줘야 할지 고민했다.
로벨의 판단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웃통을 벗은 용병 십 수 명이 우르르 몰려와 주위를 둘러쌌다. 성장기에 잘 먹지 못해 체격은 조금 작지만, 험난한 삶이 묻어나는 얼굴과 실전으로 다져진 근육이 퍽 위협적이었다. 몸뚱이에 훈장처럼 새겨진 칼자국과 화살 흉터가 험악한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기사 나리? 무슨 일입니까요?”
“저 늙은 나으리는 누굽니까? 못 보던 얼굴인뎁쇼?”
용병에 이어서 영지민도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대부분 호기심이지만, 포위당한 입장에서는 공포였다.
기사와 기사 종자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저 멀대같은 놈은 말똥이나 치우는 몸종이 아닌 모양이다.
“나, 나는 랭스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조단 랭스터다! 이곳 영주, 로벨 로드릭 후작을 만나러 왔다! 그, 그러니 썩 물러나라!”
로벨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명예를 운운할 상대가 아니었다.
“랭스터 가문?”
그 가문은 이제 명예가 없는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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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동부지방을 다스리던 조프리 랭스터 백작은 후계자 전쟁 당시 류트 프란시스 공자편에 서서 싸우다 패전하여 잉그비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랭스터 가문의 기사들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풍비박산이 났다. 랭스터 가문의 땅과 재산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한 기사들이 나눠가졌는데, 로벨이 소유한 회색산도 그중 하나였다.
“로벨 로드릭 경이 소탈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설마 말구종 노릇까지 할 줄은 몰랐소.”
“...쓰읍.”
“아, 나쁘다는 뜻이 아니오. 기사라면 무기와 말은 직접 관리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펄프 대장 이하 여러 용병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조단 랭스터 경을 압박했다.
랭스터 가문의 후계자라 주장하지만, 랭스터 가문은 패망해서 사라진 가문이다. 영지와 작위가 소실되었으니, 사실 랭스터 ‘경’이라 부르는 것도 합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벨은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였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명예 또한 포함되었다.
“조프리 랭스터 백작과 어떤 사이오?”
“이복동생 되오.”
“이복?”
로벨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이 아니오. 랭스터 가문의 사람 중 아무나 불러와 증언케 해보시오.”
“저 먼 남쪽 집안 사람을 어떻게 불러와요.”
어린 집사가 잘 들리게 중얼거렸다. 조단 랭스터 경은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볼탄 반도 최고의 기사 가문 집사가 망해서 땅 한 조각 남지 않은 자칭 후계자보다 나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에게 조용하라는 손짓 후 대화를 주도했다.
“본인을 왜 찾아온 것이오?”
“후작이 동부평야를 정복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소.”
로벨 일당이 동시에 한숨 쉬었다. 허풍쟁이가 정말 열심히 일한 모양이다.
“...헛소문이오.”
“헛소문? 그럴 리가? 사트로 시티에서 버팅거 시티까지 소문이 파다하오만?”
“설령 군사를 일으켜도 동부지방을 차지할 생각은 없소. 내 땅과 내 재산을 지킬 뿐이오.”
“내 땅이어야 했을 후작의 땅 말이오?”
로벨이 차지한 회색산은 본래 랭스터 백작의 땅이었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게 왜 기사님 땅이에요? 프란시스 가문에서 하사한 땅이죠! 욕심 많은 조프리 랭스터 백작이 충성맹세하지 않고 반란 일으켜서 본래 주인에게 돌아갔고, 그 주인이 우리 영주님께 하사했으니까 우리 영주님 땅이죠!”
조단 랭스터 경은 조용히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오해하지 마라, 작은 몸종아. 네 주인이 차지한 땅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흥! 뺏을 수나 있고요?”
어린 집사는 기사를 상대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위험한 짓이었다. 로벨은 가진 게 칼 한 자루와 자존심뿐인 기사가 가진 것을 전부 사용하기 전에 중재했다.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되찾고 싶소. 우리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씨를 뿌리고 말을 씻긴 땅 한 토막만 내어주시오.”
로벨은 금방 알아들었다.
“나를 따라 종군하겠다는 말이오?”
“바로 그렇소.”
조단 랭스터 경은 탁자를 탁! 치고 가슴을 크게 폈다.
“거듭 말하지만, 본인은 랭스터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요. 이 이름의 가치를 생각해주시오.”
로벨은 그 가치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단 랭스터 경은 알기 쉽게 말해주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 후작은 지금 볼탄 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을 차지할 명분을 손에 넣은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