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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41화 (241/605)

241화. 장마

241화. 장마

도반 도트넘 백작과 회담은 상식적이며 합리적이었다.

북부대로 통행세는 기존대로 화물의 5%를 유지하고, 세수의 40%를 늑대성이 가져가며, 그 대신 전시 및 전시에 준하는 위기 발생 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어린 집사는 ‘악마와 계약했어... 악마의 계약이야...’ 중얼거리면서도 고정된 수익을 포기 못 해 계약서를 꼭 끌어안았다.

로벨도 찝찝하긴 마찬가지였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진짜 도반 도트넘 백작처럼 행동했다. 오래 알고지낸 이웃처럼 웃고, 원수가 된 가문의 기사처럼 떠들고, 새로운 사업 파트너를 만난 장사꾼처럼 협상했다.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인간관계 그 자체였다.

‘늑대의 왕보단 낫지만... 영...’

도반 도트넘 백작은 올 때처럼 소리 없이 떠났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정체 모를 불안을 떨쳐내고 밀린 업무에 착수했다. 지금은 1년 중 두 번째로 바쁜 시절이었다. 봄 추수가 시작되었다.

시장이 열리고, 고층건물이 생기고, 상인과 손님이 수시로 찾아오지만, 영지의 기본은 역시 농사였다.

그람 형제는 로드릭 마을과 뉴 로드릭 마을을 오가며 보리 수확량을 확인했다. 농사가 잘되어 작년보다 수확량이 20% 많았다. 그람 형제는 기뻐하는 농부에게 춘경지 토지세와 방앗간 이용료를 부과했다.

리암 수사는 늑대성의 특산물로 자리 잡은 ‘리암 수사표 맥주’를 생산하기 위해 양조장을 점검했다. 가장 중요한 재료는 잘 익은 보리와 질 좋은 홉과 깨끗한 물이었다. 사실 그 외에는 쓰이지도 않았다.

헨리 피터 상회장은 리암 수사표 맥주의 예상 생산량을 전달받은 후 거래할 상단을 추려 경매에 부쳤다. 사트로 시티 상인과 노스폴드 시티 상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인이 로드릭 상회와 거래하기 위해 찾아왔다.

여관 주인 지미와 루시는 볼탄 반도 각지에서 찾아온 상인들에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상인들은 로드릭 마을의 발전에 놀라고, 로드릭 가문의 수완에 찬사를 보냈다. 조상 대대로 로드릭 가문을 섬겨온 지미 일가도 어깨가 바짝 올라갔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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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북쪽에 위치한 로드릭 마을은 여름이 더디 찾아왔다. 남쪽에서 죽네 사네 할 때쯤 슬슬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과 진득하지 못한 날벌레를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이네.”

“여름이야.”

농부들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여름은 옛 신이 축복한 계절이었다. 집집마다 보리와 콩이 가득하고, 숲과 들에 살찐 짐승이 어슬렁거렸다. 집이 부실하고 옷감이 부족해도 밤이 무섭지 않았다. 굶어 죽을 일도, 얼어 죽을 일도 없었다. 털 많은 짐승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한낮에 헐떡이는 양과 밤새 지치지도 않는 벌레 소리에 익숙해지자 장마가 찾아왔다.

로벨은 켈트 경이 보낸 장문의 감사편지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덧문을 올린 나무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또강- 똑-

로벨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린 집사가 뛰쳐나와 무어라 소리치자 비를 피해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인 용병들이 구시렁거리며 흩어졌다. 더위에 지친 아야와 이야카가 빗줄기 사이를 뛰어다녔고, 마녀 키르케가 철부지 늑대 남매를 잡기 위해 함께 뛰어갔다. 지하창고에서 올라온 리암 수사는 두 다리를 훤히 드러낸 마녀 모습에 얼굴을 붉히고 화급히 자리를 피했다.

마녀 키르케는 기어이 늑대 남매를 생포한 후 이마에 흐르는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을 닦았다. 그러다 성 안의 로벨과 눈이 마주쳤다.

“기사님! 기사님! 비가 와요!”

로벨은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여름비는 언제나 좋았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너무 많이 오지만 않으면 말이야.’

우기에는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개울이 범람해서 소중한 밀밭을 망치지 않는지, 도로가 망가져서 말과 마차가 상하지 않는지 확인하며 남은 시간에 느긋하게 편지를 쓰거나 무구를 손질했다.

“비가 많이 와요.”

어린 집사가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로벨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오후에 배수로 좀 손봐야겠어요. 저러다 막히면 성 안이 엉망이 돼요.”

“...비 그치면 해.”

“비 그치면 배수로를 왜 봐요? 비오니까 고쳐야죠.”

부지런한 사람은 날씨와 상관없이 바빴다. 로벨은 성 안팎살림을 모두 책임지는 어린 집사 모습에 감탄하며 동시에 한숨 쉬었다.

“왜 한숨이에요?”

“아니,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으니까...”

어린 집사는 로벨의 책상에 한가득 쌓인 편지지를 힐끔 보았다. 어린 집사도 대부분 읽은 것이었다.

“이맘때가 원래 그렇잖아요?”

“올해는 좀 심해.”

로벨의 전쟁은 봄과 함께 끝났지만, 볼탄 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영지를 잃은 사트로 가문 기사와 영지를 받지 못한 프란시스 가문 기사의 불만이 점점 안으로 향하였고, 묵은 원한과 합쳐져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도 다행히 로드릭 땅에는 피해가 없었다. 병사 100여 명 겨우 거느린 하이에나들은 전성기를 누리는 사자가 먹이 다툼에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자에게도 피해가 없진 않았다. 로드릭 시장으로 오는 행상인이 징발을 가장한 약탈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로드릭 가문 깃발을 지참한 상인은 ‘조금 과한’ 세금으로 끝났지만, 그렇지 못한 상인은 옷가지만 남기고 탈탈 털리기도 했다. 북부대로를 이용하는 상단 숫자도 크게 줄어서 세수가 예년만 못했다. 어린 집사도 처음에는 깃발 장사가 잘 된다고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장이 침체되어 불안해했다.

“영주님이 밥충이 용병단 데리고 나가서 교통정리하면 안 돼요?”

“안 돼.”

에릭 공작과 볼프 후작이 가만있으니 로벨이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로드릭 가문의 재산을 건드리면 그거라도 핑계 삼을 텐데, 로벨의 참전을 두려워하는 영주들은 로벨의 ‘L’만 보여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 덕분에 로벨과 로벨 휘하 가문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기다려보자. 가을이 오면 좀 잦아들겠지.”

로벨은 평소답지 않게 점잖게 타일렀는데, 어린 집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배수로 삽질을 지휘하고 있었다. 에릭 공작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거칠고 사나운 용병들이 어린 집사 호통에 움찔해서 열심히 흙을 퍼 날랐다.

“오늘 중에 못 끝내면 사흘 치 급료 삭감이야!”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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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까지 갈 것 없이 장마가 끝나자마자 사고가 일어났다. 그것도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일어났다.

“우리 공장은요?”

“그것도 마찬가지로...”

“이이이...! 이 망할 호수성 중늙은이가...!”

비가 그치자 잠잠하던 거물들까지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르젠 백작이 자신에게 충성맹세한 영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500명의 군사를 소집해 과거 랭스터 백작의 영토였던 동부평야로 쳐들어갔고, 헤르만 백작도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600명의 군사를 긁어모아 버팅거 시티를 차지했다. 그리고 버팅거 시티의 모든 군수물자를 징발했는데, 먹기도 좋고 장기보관하기도 좋은 로벨의 식품공장은 1순위 징발대상이었다.

“피해가 얼마나 돼?”

“그리 많지는 않아요.”

리암 수사가 까끌까끌한 정수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영주님의 자산 중에 식품공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아요. 그리고 겨울철 저장식품을 주로 만들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창고도 거의 비어있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영주님을 모욕한 게 중요하죠!”

로벨은 ‘그게 언제부터 중요했는데?’ 라고 묻고 싶은 것은 참았다. 어린 집사도 순전히 명예 때문은 아니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에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개나 소나 말이나 양이나 로드릭 가문의 재산을 넘볼 거예요.”

깃발 보험 때와 마찬가지로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까다로웠다.

“헤르만 백작하고 싸울 수 없잖아.”

“꼭 싸울 필요 있나요? 그 뭐지, 정치적 압박? 그런 걸 해봐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음...”

로벨은 군사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고, 어린 집사는 경제분야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정치에서는 둘 다 문외한이었다. 30년 넘게 칼밥만 먹은 펄프 대장이나 수도원에서 도 닦은 리암 수사보다 못하니 할 말 다했다.

“에릭 공작님한테 말해서 군사를 물리게 하면 어떨까요? 주군의 말인데 듣지 않을까요?”

“그건 몰라. 그 헤르만 백작이잖아.”

에릭 공작과 사이가 틀어질 만큼 틀어졌다. 보는 눈이 있어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지만, 고운 말이 통할만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에릭 공작의 간섭을 계기로 충성맹세를 철회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졌다.

“하여간! 그놈의 호수성이 맨날 문제에요!”

펄프 대장이 일찍 서리가 내린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페르젠 가문과 연합하시죠.”

“페르젠 가문도 좀... 알잖아. 그쪽 기사들이 날 싫어하는 거.”

로벨이 정색하자 펄프 대장이 눈가에 주름을 지었다.

“정말 연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소문만 내면 됩니다.”

“소문?”

“우선 버팅거 시티의 징발 사건으로 로벨 로드릭 후작이 대단히 화가 났다는 소문을 퍼트리십시오. 헨리 피터 상회장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사실이야. 나 화났어.”

로벨은 팔짱을 끼고 콧김을 짧게 뿜었다. 흥! 로벨을 오랫동안 보아온 측근들은 무섭기보다 귀엽게 여겼다. 펄프 대장도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허풍쟁이를 시켜서 페르젠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십시오. 편지 내용은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버팅거 시티’와 ‘랭스터 가문’이 거론되어야 합니다.”

로벨보단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이해가 빨랐다.

“아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로드릭 가문과 페르젠 가문이 손을 잡았다고 여기겠군요!”

“직접적으로 헤르만 가문을 거론하진 않았으니까 물증은 없고요?”

허풍쟁이의 입담을 생각하면 가는 곳마다 소문이 퍼질 것이다. 로벨 로드릭 후작은 버팅거 시티를,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구 랭스터 백작령을 나눠가질 거란 소문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로벨은 손뼉을 치고 물었다.

“좋아! 그리고 다음은?”

“...끝인데요.”

“...끝이야?”

여기까지가 펄프 대장의 한계였다. 어린 집사는 김이 샌 듯 삐죽였다.

“헤르만 백작이 겁먹고 사과하면 해피엔딩이지만, 그쪽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리 쉽게 물러나진 않겠죠. 최악의 경우 진짜 전쟁이...”

그때, 아야와 이야카의 귀를 비틀던 마녀 키르케가 불쑥 말했다.

“장미성 공작님한테도 편지를 보내세요.”

“뭐라고 보내?”

“음... 역시 내용은 중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동부질서’란 단어만 넣으면 되지 않을까요?”

어린 집사가 입술로 소리를 내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프란시스, 페르젠, 로드릭 가문의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히힛! 그러면 호수성 백작님도 별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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